경주여행에서 빠진 기록들-3
12) 경주 서악동 고분군(慶州 西岳洞 古墳群) 사적 제142호
서악동 고분군은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두 4기의 봉분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12~18m에 이르며, 밑둘레는 146~188m정도로 비교적 큰 편으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추정된다. 고분들은 무열왕릉(武烈王陵) 뒤편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 무열왕(604~661)의 직계조상이 모셔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악동 고분군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묘제가 변하고 있음과 함께 왕릉의 입지가 평지에서 산지의 말단부 구릉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 1월 13일 주상절리를 보고난 후 어르신이 앉아 계신 곳에서 해상동물 화석편을 본 후
샛길로 질러서 고분군으로 이동해 들어가 보고, 태종무열왕릉으로 이동했다.
고분 뒤로 보이는 산이 선도산이다. 산 정상 근처에 성모사가 있다.
13) 김인문 묘(金仁問 墓)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1006-1
무열왕릉(武烈王陵) 동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무덤에는 김인문(金仁問, 629~694)이 안치되어 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文武王)의 친동생으로,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金庾信)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唐)나라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효소왕(孝昭王) 때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직을 추증하고 서라벌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9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에서 김인문의 비석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그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무덤 및 둘레 82m, 지름 29.9m, 높이 6.5m로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며, 부근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모양 받침돌(龜趺)이 있다. |
전에 태종무열왕릉을 본 뒤 그대로 떠나고, 이후 자료에 무열왕의 자손이라는 사실로
한번은 돌아보리라 마음 먹었던 곳이다. 무덤의 왕릉 여러 곳을 돌다보니 신선감은
없지만, 통일신라를 이룩하는데 당의 협조를 이끌어 낸 사람을 찾아본 경우다.
무열왕릉 앞에서 길건너의 김양, 김인문의 묘
경주 서악동 귀부(慶州 西岳洞 龜趺) 보물 제70호, 통일신라시대 7세기
이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둘째 아들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인문(金仁問, 629~694)의 묘비를 세웠던 것이다. 받침돌에 있는 돌 거북은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비슷한 양식으로 네 발로 힘 있게 나아가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
앞 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다섯 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 가닥의 목 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것과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하다. 등에는 비석을 받쳐 세웠던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없어졌는데, 19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에서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귀부는 7세기 귀부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용머리로 변화되기 이전 귀부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 석비 받침돌의 초기 양식이라 할 수 있다.
◐ 1월 13일 태종무열왕릉을 거쳐 나와 큰 길을 건너 김양 묘의 뒤 남쪽에 자리하고 있어
눈발이 흩날리는 속에서 돌아 보았다.
14) 김양 묘(金陽 墓)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1000-1
이 무덤은 김양(金陽, 808~857)묘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 동쪽에 김인문 묘(金仁問 墓)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세손(世孫)으로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신문왕(神文王)이 된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민애왕(閔哀王)의 뒤를 잇게 하였고, 다음 왕인 문성왕(文聖王)도 받들었다. 그 후 헌안왕(憲安王) 때 김양이 세상을 떠나자, 대각간(大角干)을 추증하고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
◐ 1월 13일 마지막 묘와 귀부를 보고 눈발이 날리는 주차장 구역을 나가다가
웬 친구가 말을 걸며, 자기는 OBS에서 취재차 나놨다면서 ‘경주지역 지진 피해로
관광객이 줄었는데 겁은 나지 않느냐’며 나와 아내에게 질문을 했고 ‘무슨 호들갑이냐?
단석산의 마애불 덮기도 지연되지만 그렇게 걱정스럽지 않아서 관광을 왔다’고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눈은 훨씬 많이 내려 30~40분 기다려 신경주역으로 갔다.
15) 소회(所懷)
종합적인 기록을 나름 분류해 정리하다가 보니 꽤 오랜 세월을 매달려 지치기도 하고 기록은
자세히 올려야 해 이번에는 싸잡아 빠진 기록을 함께 하며 나름대로 종료를 하고자 한다. 한국
사람 특유의 더 많이 더 빨리를 염두에 두다가 보니 왕릉들은 웬지 허술하게 정리가 되었고,
처음 기록은 나름 군살을 많이 붙이며 자세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뒤의 기록은 마치
누구에게라도 쫓기는 기록인 듯하다.
경주에서는 보기드문 눈이라는데, 신경주역에는 흔적이 뚜렷하다.
끝까지 읽어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