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2) 연천군(漣川郡)-1

아름답지만~ 2017. 3. 30. 09:12

연천군은 경기도 최북단에 있는 군으로 해방이후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나누어졌다가, 한국전쟁 이후 38선 이북의 지역을 수복해 다시 남한에 속해졌다.

북쪽으로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한탄강 일대의 자연경관이 빼어나며,

한탄강 유원지가 연천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2개읍 8개면 96개 행정리

(법정리 103개)가 있으며, 면적은 675.22㎢, 인구 45,725명(2015)이다.

군내에는 국가지정 문화재(사적6,천연기념물2,중요민속자료1),

지방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2,기념물10)문화재자료2점이 있다.

위는 경순왕릉 배치도, 아래는 숭의전

                                                                       위는 당포성, 아래는 재인폭포

1. 신라 경순왕릉(新羅 敬順王陵) 사적 제244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휘(諱)는 전(傳)이며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경순왕이 경애왕(景哀王)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국력이 쇠퇴하였다.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였는데 특히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세(大勢)가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고려 왕건(王 建)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 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경순왕이 경종(景宗) 3년(978)에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 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그후 오랜 세월동안 실전(失傳)되었다가 조선시대 영조(英祖)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陵表),양석(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등이 이때 마련되 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순왕의 운구(運柩)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 곳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왕실에서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밖에

쓸 수 없다”하는 이유로 운구행렬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경순왕릉이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게 됨에따라 신라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다. (안내글 인용)

경순왕릉을 찾는 길은 임진강을 우측에 놓고 달리는 곳이었고, 못미쳐서 호로고로가

보이는 길이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들리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2.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 사적 제467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

호로고로는 임진강 북안의 현무암 절벽 위에 있는 고구려성이다. 호로고루(瓠蘆古 壘)라는

명칭은 일대의 임진강을 삼국시대부터 호로하(瓠蘆河)라 불렀던데서 유래 되었다.

성의 둘레는 40m로 크지 않지만 특이하게도 남쪽과 북쪽은 현무암 절벽 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평야로 이어지는 동쪽에만 너비 40m, 높이 10m,길이 90m 정도의 성벽을 쌓아

삼각형 모양의 성을 만들었다.

한강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후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았는데,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당포성,

무등리보루 등 10여 개의 고구려 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그 중 호로고루는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한성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상에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고 직접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길목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고 구려의 남쪽 국경방어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 다.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성 내부에서 건물지와 수혈유구,대규모 석축집수지,

우물 목책 등 다양한 유구와 연화문와당,치미,호자(虎子),벼루 외에도 많은 양의 고구려

토기와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화려한 기와건물과 상당히 높은 신분의 지휘관이

호로고루에 상주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안내글 인용)

3. 숭의전(崇義殿) 사적 제223호,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8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 시킨

4명의 왕들과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조선초기 처음 사당이

건립되어, 1451년(문종1)에 숭의전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후로 숭의전의 관리와

전례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졌다.

숭의전의 설치 배경에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서 역대 시조의 의례체계를 정비한 과정과

더불어 고려 왕족 및 고려 유민 등에 대한 회유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숭의전 건립 이래 수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숭의전 복원은 1972년부터 1986년 까지 수년에 걸쳐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숭의전 대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옛 왕조의 영광과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안내글 인용)

                                                              위는 고려 4왕의 위패가, 아래는 16충현의 위패가

숭의전 잠두봉 암각문[강건너 삼화리에서 이곳을 보았을 때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임진강의 침식작용으로 잠두봉이 임진강에 면한 곳은 수직

절벽이 생겨났는데, 어떻게 새겼는지 이곳에는 한수의 칠언절구가 남아있다.

☸중작 숭의전(重作 崇義殿) 숭의전을 중수하고

려조사궁사백추(麗祖祠宮四百秋) 숭의전을 지은 지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수교목석갱신수(誰敎木石更新修)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개식흥망한(江山豈識興亡恨)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의구잠두출벽류(依舊蠶頭出碧流)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있구나

주세상심만월추(住歲傷心滿月秋)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여금위군묘궁수(如今爲郡廟宮修)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성조갱걸려생석(聖祖更乞麗牲石)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유여징파만고류(留與澄波萬古流) 아무도 숭의전은 징파강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징파강(임진강의 별호)

이 시는 1789년(정조13) 마전군수였던 한문홍(韓文洪)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시로 지어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이 시를 새겼다.

 

호로고루를 지나며 숭의전을 찾아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 이러니 점심 먹을 집을 몇 곳

기웃거려 보니 별로인체 숭의전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화장실을 가면서 ‘왕자회관’을

보고 들어가 식사를 주문하고 차를 위의 주차장에 주차했다.

식사후 주인 아줌마와 얘기하니 왕씨 집안으로 대제를 시아버님께서 주관하셔서 별로

장사가 되지 않으나 대제날 종중 분들의 식사 할 곳이 필요해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식당도 문을 닫을 예정이란다. 바로 옆에는 고려가든이

있는데 그 곳은 아주머니가 왕씨라 한다. 두 식당이 일요일과 월요일 교대로 휴일을

한다고 하는데 식사 손님은 월요일이라 우리 밖에 없었다.

                                                     위는 왕자회관, 아래는 좌측은 왕자회관 우측이 고려가든

숭의전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銅像)[왕건의 동상은 본래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개경의 종묘를 헐고 연천의 마전 앙암사에서 전조의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르러 주자가례에 입각한 제례법의 개혁으로

동상과 진영(초상화)을 목조(위패)로 대신하게 되자 잠시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겨 보관 하였다가

세종 11년 현능 곁에 매장하였다. 최근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능 정비공사 때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북한 학자들이 금동불상으로 잘못 판단하여 개성박물관에 보관해 오다 1997년

개성박물관을 방문한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왕건의 동상임을 알아내어 현재는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입구에는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약수가 있는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이 물을 마셔서 붙인

이름이며, 고려가 패망한 이후 왕씨 성은 강제로 어머니 성으로 개명되었으며 1394년

“맹인 이흥무의 점괘사건”으로 여러 왕족이나 점괘에 관여된 사람들이 참수되었고,

다른 지방에 살던 왕족도 색출 참수했다고 한다.

고려왕족의 수난사(왕씨에게 불어닥친 씨바람)[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왕족의 수난은 개경에서

쫓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392년10월13일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건립하였으며 왕우의 아들 조와 관은 왕씨 성을 뺏기고

어머니의성인 노(盧)씨를 따르게 하였다. 1394년 1월 고려 왕족을 피바람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한다. “맹인 이흥무의 점괘사건”으로 불리는 이 희대의 참극은 밀양의 한 궁벽한 점쟁이

집에서 시작되었다. 밀양의 유명한 점쟁이인 맹인 이흥무에게 조선의 개국공신인 박위의 명을

받은 김가행과 박중질이 찾아와 “고려 왕조 공양왕의 명운이 우리 주상전하 보다 누가 낫겠는가?”

라며 점을 치게 하니 이흥무는 “남평군 왕화의 명운이 귀하다 하고 그 아우 영평군 왕거가

그 다음이 된다”고 점을 쳐 주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1394년 4월 주모자인 김가행,박중질,

이흥무 등은 참수되고 연루된 왕화,왕거 역시 참수형을 면치 못하였다. 이 참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척,강화,거제에 살던 다른 고려 왕족들에게까지 미쳐 강화,거제도의 앞바다에서 고려의

왕족들을 모아 모두 수장하여 죽이고 전국 곳곳을 수색하여 왕씨들을 참수하였다.

4. 당포성(堂浦城) 사적 제468호,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78

고구려시대 임진강변에 돌로 쌓은 평지성이다. 당포성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의

침식작용으로 높은 수직 절벽이 끊어진 지점에 구축되어 있다.

임진강의 물길이 만들어낸 수 km에 달하는 수직절벽은 현무암 주상절리로 되어 있는데, 높이 20여m에 달해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평지로 연결된 부분만을 돌로 쌓았는데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점은 연천일대 고구려 성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당포성 남쪽 성벽인 주상절리 절벽은 다양한 주상절리의 모양과 함께 하천의 침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글 인용)

                                                                  아래쪽 사진은 임진강변의 주상절리 절벽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 성이다.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은 절벽이기 때문에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로 연결되어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나머지 한 면(동 쪽)에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내부를 성으로 사용하였다.

한강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후부터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년 동안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호로고루,당포성,무등리 보루 등 10여개의

고구려 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당포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면서 강물의 흐름이 느려져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으로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 략적 요충지였다.

당포성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축조되었지만 신라가 점령한 후에는 성벽을 고쳐 쌓아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성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안내글 이용)

숭의전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길가에서 보이며 이정표도 있어 따라 들어선 당포성은

호로고루와 비슷하게 그 옛날의 성이었다. 짧은 둘러봄의 당포성은 그 당시로 는 꽤나

요충지 같이 보였다. 이후 전곡구석기 유적지는 네비를 켜고 찾았으나 이 곳도 월요일

휴무로 개방구간만 둘러보게 되었다.

                                                   연천군의 1부를 마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