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캬톨릭 성지를 찾아서
제주에 성지가 있다는 인쇄물을 보니 꽤 여러 군데가 있다. 규모면으로나 성지의 규모로
보아 제주시를 제외한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제주도의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네비를 이용해 이시돌목장의 주변에 세운 성지, 김대건신부 표착관과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는 곳을 돌아 보았다.
1132도로의 벚꽃 만개
김대건신부 제주표착 기념관 뜰의 꽃들
1) 찾아갔던 날: 2017년 4월 13일 목요일
2) 함께한 사람: 우리 부부와 동서네 부부
3) 성 이시돌 센터: 1135도로를 달리다가 1115도로로 우회전하면 이시돌 목장 입구를
지나면 성 이시돌 센터가 나온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53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새미은총의 동산 입구로 들어서 한바퀴 돌아 보았다.
『‘새미은총의 동산’은 삼나무 숲과 억새 등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호수인 ‘새미소’주변을 묵주기도와
미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성서공원으로 다듬어진 곳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의 특별한 사건과 기적들이 실제 인체크기의 조각품으로 표현되어 있는
‘예수 생애 공원’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 산책하며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묵주 기도 호수’, 야외미사를 할 수 있는 ‘성모동굴’등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새미동산의 초입을 돌아 십자가의 길로 향하며 걷는 길,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뒤따르다가
노루들이 떼지어 도로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숨어버리는 광경을 먼 발치로 보면서 걷는
길에는 수많은 인체 크기의 조각상들이 세웠졌고, 아직도 더많은 조각상을 세우려는 듯
보였다. 이 조각상들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박창훈 세례자 요한 교수가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고 한다. 모든 조각상은 사실적으로 표현한듯 하다.
종교란 이런데서는 더욱 엄숙해지고, 숙연해 지는 법 산책을 겸한 십자가의 길 14처는
태어나서 은총을 받는 모습,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의 언덕 위로
끌려가면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매일
십자가를 메고 가시던 길을 매일 걸으며 기도했다고 한다.
『제1처: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 제2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 제3처: 예수께서 기진하여
넘어지심, 제4처: 성모와 만나시는 장면,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짊어져 줌,
제6처: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드림, 제7처: 기진맥진한 예수께서 두 번째
넘어짐, 제8처: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부인들을 위로하심, 제9처: 예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제10처: 예수께서 옷벗김을 당함, 제11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힘, 제12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제14처: 예수께서
무덤에 묻힘, 제15처: 예수의 부활』
위: 제1처는 빌라드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 아래: 제2처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위: 제13처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아래: 제12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제14처: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호숫가 나무들의 병해충 예방을 위해 종사원 두 분이
소독중이었다. 호수의 물은 흙탕물이다. 한바퀴 호수를 돌아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성모동굴이 야외 기도를 드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게된 곳이고 여기를 지나니
새미은총의 동산이 나온다. 이시돌 센터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하며 테쉬폰이란 집의
형태를 공부하고 나왔다. 몇 번을 헤매이며 성클라라 수도원과 함께인 금악성당을
찾다가 이곳을 떠났다. [09시57분~11시35분; 1시간40여 분]
『테쉬폰(Ctesiphon)[이라크 바그다드 가까운 곳에 Ctesiphon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이 건축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기에 이러한 양식의 건물을 테쉬폰(Ctesiphon)이라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도 약 20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형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답니다. 그 오랜 세월 거센
태풍과 지진으로부터 어떻게 온전히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곡선형으로 연결된
쇠사슬 형태의 구조에 있답니다.
이곳 이시돌에는 1961년도에 처음 목장에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고 이후 조금 작은 크기로
제작해 돈사로 사용을 했으며 1963년에는 사료공장, 1965년에는 협재성당을 건축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지요. 테쉬폰 주택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이시돌에만 있는 귀중한 보물이랍니다.]』
4)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1115•1116•1115•1132도로를 차례로 지나면 이정표가
나온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카톨릭 성지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이다. 성 김대건 신부(1822~1846)가 1845년 8월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8월31일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 조선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28일간의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것을 기념함과
동시에 제주 지역에서 한국 최초 신부의 첫 번째 미사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것을 기리기
위하여 60여억 원의 예산을 투자하여 대지 약 14,190㎡, 건물면적 약 554㎡ 규모의 2층
건물로 2006년 11월 2일 개관하였다. (by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라파엘호(RAPHAEL)[이 배는 1845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이 제물포에서 상해로 가고
돌아올 때 탓던 무동력 목선(병선)으로,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 이름을 붙인 배이다.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13명의 일행과 함께 상해에서
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끝에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고,
다시 전라북도 금강 하류 화진포(나바위)에 도착하여 한국 본토에 상륙하였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기록을
고증으로 하여 이 배를 복원하였고, 1999년 7월31일 김대건 신부 귀국 154년 만에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배의 길이 13.5m, 너비 4.8m, 깊이2.1m, 중량 27.2톤 2006년 9월20일 천주교 제주교구
〇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 기념관 [1층:영상실•소성당, 상징이미지월, 인포메이션, 성 김대건신부 유해
공경실, 사무실
2층:도입부-이미지월, 김대건신부 흉상, 김대건신부 연혁, 사도의 길, 라파엘호의 여정,
하느님의 섭리로 뱃길을 가다, 김대건 신부의 고난의 길 14처, 한국에서의 첫 미사,
제주에 뿌린 신앙의 씨앗, 제주 교회사 연표, 복음의 전래, 역대 주교•선종사제•평신도,
제주교구 성지와 성당, 성 이시돌 목장의 탄생과 변모]』
복원된 라파엘호를 승선해 보고 넓은 정원을 거닐기도 하며 처와 처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동서와 둘이는 시간을 보냈다.[13시08분~13시30분; 20여 분]
5) 정난주 마리아 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247번길 102의 정난주
마리아의 묘를 찾으려는 노력은 여러 번이나 도로 제자리가 되었다. 대정성지(大靜聖地)를
치면 대정성지(大靜城址)를 안내해 네비를 정난주 마리아를 쳐서 찾았던 곳이다. 이후
자료를 보니 ‘천주교 대정성지’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그녀는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丁若鉉)과 경주 본관 이씨(李氏) 사이에
태어나 명연(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 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若詮),약종(若鐘),약용(若鏞)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壁)의 누이였다.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사(黃嗣永 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애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은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21일 두 살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오씨(吳氏)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 곳에 안장하였다. 정 마라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하였다. 그녀의 삶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결단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될 것이다.]』 (by 안내판 글 복기)
보충이 필요한 글들을 부기해 보면, 백서(帛書)라고 한것은 명주천에 글을 썻기 때문이며,
깨알같이 작은 1만 3,311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당시 황서영의
백서는 비오 11세에 봉정되었고, 현재 로마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1909년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듣고,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후손에게 집과 농토를 사줄 수 있었다.
정 마리아는 제주에서 관비의 유배생활이 시작되었으나,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이후 관비이면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추자도의 아들을 만나 볼 수는 없었다. 그 후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으며,
마리아가 사망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 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가(敎會史家)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그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의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by 차기진, 사목 254호<2000년 3월호>)[15시30분~15시40분; 10여 분]
6) 소회: 다른 관광지와 함께 돌았기에 성지(聖地)만을 따로 모아 정리해, 다소 미흡할 수
있으나 아내가 뒤늦게 신앙을 되찾아 함께 여러 곳을 다니다가 보니 이제 웬만한
성지에서 타 종교지만 예를 갖추는데 익숙해 있다.
전에는 이시돌목장은 학창시절부터 익히 알았던 곳인데 정성을 들여 꾸민 십자가의 길은
인체 크기의 조각상이 더 실감있게 다가오는 듯 했으며, 용수리의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근래에 설립되어 아직 다른 곳에 비해 노련한 분위를 풍기지는 못했으며,
정약용의 형제가 많았음은 익히 알았으나, 정난주가 정약용의 조카이며 황사영의 처로서
남편 때문에 관비로서 고생하다가 영면했다는 건 이곳을 방문하면서 알 수 있으니,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움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을 또한번 느껴본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