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추사 김정희 유배지

아름답지만~ 2017. 5. 11. 18:35

김정희(金正喜)는 조선조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우르는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by 다음백과 일부 발췌)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다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의 유배생활은

8년 3개월간인 헌종 14년(1848)까지 였으며,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1856년 과천에서 파란 많았던

일생을 마쳤다.

제주추사관: 이곳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와서 두 번째로 머물던 강도순(姜道淳)의 집터이다.

추사 본인은 귤중옥(橘中屋)이라 했고, 내방객들은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불렀다. 제자

강위(姜瑋)는 ‘수성사’라는 시에서 추사가 “달팽이 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라고 했다.

그가 말한 달팽이집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했고, 국보 180호인

「세한도(歲寒圖)」를 그렸을 뿐 아니라 초의(草衣)스님을 비롯한 당대의 명사들은 물론

제주도 사람들과 빈번한 교류를 통해 일가의 전통을 이룩했다.

제주추사관은 추사기념관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국문화재단,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한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글씨, 추사 편지글, 추사 지인의 편지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세한도는 직접 찍지 못하고 차입함

1) 찾아간 날: 2017년 4월13일 목요일

2) 함께한 사람: 우리 부부, 동서네 부부(넷 이서)

3) 찾아가기: 모슬포항 항구식당(서귀포시 대정읍 하모항구로 64,☏064-794-2254)

에서 점심을 먹고 대정성지를 네비검색하니 1132도로의 동쪽을 향하니

(4.5km,약 8분) 우리가 찾던 곳이 아닌 성지(城址)와 추사관과 유배지가 있는 곳,

일단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니 입장료가 있다. 하지만 찾았던 날은 제주도 전역이

무슨 행사중이라 무료입장 중이었다.

4) 구경하기: 먼저 매표소 앞 돌하르방을 담아본다.

『대정골 하르방 명칭:돌하르방,

                   유형/지정일:도지정민속자료 제2-45(1971. 8.26),대정읍 인성리 728-9 외

돌하르방은 1970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본래는 우석목•무석목•박수머리 등으로 불려졌다.

대정 현성 동문 온성 내에 있는 이 돌하르방은 높이 141cm,너비 52.5cm,폭 50.5cm이며,

왼손 위, 오 른손 아래로 향하고 있다. 본래 대정현성 가까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상은 성문 입구 좌우에 각각 2기씩 세워져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주며 기원하는

수호신적•주술종교적 의미 와 도읍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경계 금표적 기능을 하여

육지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추사관의 입구는 지하이다. 지하로 내려서는 계단은 지체장애자를 위한(?) 통로를

만든 것으로 보이나, 지체장애자가 그 길을 혼자 내려서기에는 부적절한 시설이었다.

각종 자료들이 세한도와 함께 전시되지만 가볍게 둘러보고 유배지 표시를 따라

지상으로 나오니 김정희의 흉상이 있고 추사관을 나오니 유배지가 복원되어 있다.

『추사유배지(秋史流配地) 사적 제487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시•서•화(詩•書•畵)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 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姜道淳)의 집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살면서 제주 지방 유 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 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차를 매우 좋아 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 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 꼽히는 세한도(국보 180호)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 다가 1984년에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에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김정희 전신상과 유적비가 서 있고 정낭,말방에,쉐막,밖거리,모거리,돗통시,

안거리,정지,물팡과 물허벅 및 눌이 안내글과 함께 있으며, 귤중옥(橘中屋)에

걸맞는 탱자나무 꽃이 화창하다. 이 곳 유배지에서 그렸다는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는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구절을 뜻하며,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린 스승을 찾아온 역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라고 하며, 유배지의 한켠 동상 뒤로는 대정성지의 성벽이 있다.

정낭 [제주 특유의 대문인 정낭은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기둥이 모두

내려져 있으면 주인이 집에 있음을, 두 개 걸쳐 있으면 저녁 때쯤 돌아옴을 알리는 표시이고,

모두 걸쳐 있으면 장기간 외출했다는 뜻이다. 거지와 도둑이 없다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습이다.

말방에 [말방에(연자방아)는 소나 말을 이용해서 곡식의 이삭을 찧거나 빻는 일에

이용되었다. 보리와 조가 주식인 제주에서 꼭 필요한 말방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는데, 이 집에는 개인 소유의 말방에가 있었다.]

쉐막 [소를 기르는 외양간을 쉐막이라 하는데 이처럼 대문 옆에 두었다. 대문이 없는

제주 전통 민가와는 달리 이 집처럼 부잣집에는 이와같은 대문이 있었다.]

밖거리 [밖거리(바깥채)는 김정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제주 유배 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거리 [모거리(별채)는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돗통시 [제주의 가정 마다 하나씩 있던 돗통시는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놓은 공간이다. 돼지를 돗통시에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다시 밭에 뿌려 이용하 는 방법은 제주만의 지혜로운 농법이다.]

안거리 [안거리(안채)는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강도순은 김정희가

제주 유배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강도순네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전한다.]

정지 [부엌을 제주에서는 정지라고 부른다. 겨울이 춥지 않은 제주도는 육지의 온돌

구조와 는 달리 취사와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분리되어 있다. 바닥에 솥덕이라고 하는

4~5개의 돌로 만든 화덕을 두고 사용했다.]

물팡과 물허벅 [식수로 이용할 물을 길어올 때 사용했던 옹기를 물허벅이라 하고 이것을

올려놓는 곳을 물팡이라 한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바닷가의 샘물이나 고인

빗물(奉天水)을 물허벅에 길어와 식수로 사용했다.]

눌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 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고 하며, 이를 만드는 행위를 ‘눌을 눈다’고 한다.]

 

『대정성지(大靜城址) 제주특별자치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2호

대정성지는 조선 태종 18년(1418)에 대정현감 유신(兪信)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 하기 위해 만든 읍성(邑城)의 터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며, 보성, 인성,안성 일대에 걸쳐 있다. 동문,서문,남문 세 개의 성문이

세워졌는데, 문 위에는 누각이, 문 앞 에는 돌하르방이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 등이 있었고, 십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왜적의 침입을 알렸다.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이 성은 집과 밭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제주에서 흔히

보이는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성벽에서 당시의 축성법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김정희는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을

판독하였으며, <금석과 안록>이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추사의 중국교류: 조선과 중국 사이를 공적 또는 사적으로 오가면서 문화를 전파한

사람들은 사신들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의 폭을 넓혀 가는 경로는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의 이야기와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을 통한 것이었다.

추사 역시 동지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방문하여 북경 인맥을 만들었고 그들을

통해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는 청조의 전성기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가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추사의 중국교류는 단순히 대국의 문화라서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점차 낙후되는 조선 현실에 대한 자각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추사는 북경에서 여러 학자들과 어울렸지만 결정적이었던 것은 평소 흠모하던 당대

최고의 학자 옹방망(翁方網)과 완원(阮元)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경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중국과의 교류는 지속되는데 특히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해 주었다. 그래서 추사는 평소 이상적의 빈번한 여행과 주선을 통해 제주도에서도

중국 학예계의 정보와 자료를 활용하며 국제 적인 차원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추사관련 유적지로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秋史古宅,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이

있으며, 과천에는 과지초당(瓜地草堂,과천시 주암동 184번지 일대)이 있는데,

후일 시간을 내어 찾아봐야 할 곳이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할아버지 때부터 살기 시작했는데, 당시만해도 충청도 53현에서

한칸씩 지은 53칸 집이었으나 현재 34칸만 남아 있다. 기둥이나 벽에는

주련(柱聯,글을 써붙인 것들)이 많다.』

『과지초당은 추사의 생부 김노경(1766~1837)이 한성판윤을 지내던 1824년에 과천에

마련한 별서(別墅)이다. 1837년(헌종 3)에 김노경이 별세하자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玉女峰) 중턱 검단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두 차례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52년(철종 3) 8월 이후 1856년 10월 10일

서거하기까지 말년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by 다음백과 등 인용)

                                        타인의 카페에서 차용한 자료(추사고택)

                                            다른분들 카페 차입(과지초당)

                                                용머리 해안에서~

                                         자연사박물관 하천 너머의 소공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