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 관광-4
7) 삼인리 송악[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이 송악은 줄기의 둘레가 80cm에 이르고 높이가 15m나
되는 거목(巨木)이다. 내륙에 자생하는 송악 중에서 가장 큰 식물로 꽃은 가지 끝에 여러 개가
둥글게 모여서 핀다. 약용으로 쓰이는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늘푸른 덩굴식물 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에서 주로 자라며, 한계선이 동쪽은 울릉도까지, 서 쪽은
인천 앞 바다의 섬들까지 퍼져 있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이다.
남부지방에서는 송악을 소가 잘 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소밥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나 무 밑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속설이 있다.](by 안내문)
선운사로 들어서는 길목 도솔천 가에 있는 특이한 식물이 산사를 찾는 이들의 눈길을
잡는 식물이 있는 곳, 우리는 이곳을 선운사를 몇 번이나 찾았건만 지난해에야 찾아가
보았던 곳이다.
8) 장사송(長沙松)과 진흥굴(眞興窟)[고창군 아산면 도솔길]
[이 나무는 반송(盤松)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07m이며,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이 나무의 명칭을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
불려지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지명인 장사현(長沙縣)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眞興窟)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진흥굴은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버리고 머물렀다고 하여 진흥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의 암석은 유문암질 응회암이다. 풍화작용을 받아 갈라진 틈(절리)이 계속
성장하면서 천정과 옆면의 암석 표면이 양파 껍질처럼 층상으로 벗겨지는 박리작용에 의해
형성된 자연동굴 에 인간의손길이 가해져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by 안내문)
이곳에서 삼형제 내외를 모두 기념사진에 담고자 근처에서 쉬고 있는 분께 부탁을 하며
우리는 삼형제라고 하니 여자분들이 형제냐고 한다. 요즘 세태가 그렇게 인식되는
사회로 변한 때문인 듯 하다. 남자가 형제라며 세태가 그렇죠 했더니 미안한 미소로 답을
한다. 형제들이 재산 때문에 의를 끊고 사는 형제가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다소 무리한
요구나 주장을 억제하며 우애를 다질 필요로 보인다.
9) 도솔암 마애불[고창군 아산면 도솔길 294]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마애불상 중의 하나로
미륵불로 추정된다. 지상 3.3m의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 15.6m,
폭이 8.48m가 되며, 연꽃무늬를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추었다. 머리 위의 구멍은
동불암이라는 누각의 기둥을 세웠던 곳이다.
명치 끝에는 검단선사가 쓴 비결록을 넣었다는 감실이 있다. 조선 말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 가 열어 본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고 전한다. 이 비결록은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 손희중이 가 져갔다고 한다.](by 안내문)
몇 번을 다녀간 선운사와 산으로 올라 용문굴도 다녀왔건만 마애불은 처음인 듯 했다.
꽤 먼거리를 걸은 나의 허리가 통증을 느끼게 했던 곳이다. 그래도 마애불에 예는 갖추고
조심스레 일어나 내려서며 맞은편 산봉우리 사자바위를 보며 단풍을 담아봤다. 이곳
단풍은 제대로 들어서 단풍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다.
앞산의 사자바위와 도솔암 마애불 근처의 단풍과 어우러져~
10) 고창 선운사[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선운사(禪雲寺)는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한 뒤 통일신라기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3년(1354)에 효정(孝正)스님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重修)하였다. 조선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重創)한 스님은 행호극유(行浩克乳)스님이시다.
행호스님은 성종(成宗)의 숙부인 덕원군(德源君)의 도움을 받아 1474년에 2층의 장육전(丈六 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완공한 이래 10여 년에 걸친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통하여 선운사의 옛 모습을
되찾아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임에도 왕실의 원찰로 법등을 환하게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宣祖)
30년(1597)의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후 광해군(光海君) 5 년(1613)
봄에 일관(一寬)스님과 원준(元俊) 스님이 힘을 합하여 1619년까지 6년에 걸쳐서 보전 (寶殿),
법당(法堂), 4불전(佛殿), 지장전(地藏殿), 부도전(浮屠殿), 능인전(能仁殿)을 중건(重建)하여 다시
사찰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720년까지 중건(重建)과 중수(重修)가 계속되었고 그 뒤에는
외형적인 불사보다는 걸출한 고승대덕들이 많이 배출되어 사격(寺格)을 드높였다.
조선후기 화엄학(華嚴學)의 대가인 설파상언(雪坡尙彦) 스님과 조선후기 선문(禪門)의 중흥조(中興祖)
백파긍선(白坡亘璇) 스님을 비롯하여 구한말(舊韓末)의 청정율사(淸淨律師) 환응탄영(幻應坦 泳)스님,
그리고 근대불교의 선구자(先驅者) 석전(石顚) 박한영 스님이 선운사에 출가하거나 수행 하시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었던 명문사찰이 되었다. 선운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보물 제290호 이며 여기에
모셔진 세 분의 부처님들은 보물(寶物) 제1752호이다.](by 안내문)
선운사 대웅전 뒤의 동백 군락
선운사는 몇 번을 왔던 곳이고 절기로 보아 특이한 볼거리도 없는 터이고, 너무 많이
걸어서 나의 허리가 매우 통증을 하소연하고 있어서 들린둥 만둥하고 나와
주차장까지 힘겹게 걸었다.
매년 증설되는 사찰시설들은 그만 해야만 사찰과 자연이 어울릴 것이다. 도솔암까지 몇 군데서
벌어지는 공사가 어쩌다보면 관광객 포화로 인해 고즈녁한 사찰의 아름다움이 저해되지는 않을까?
5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