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 관광-5
11) 화신식당•정육점[고창군 아산면 녹두로 802, 김공순, ☏063-562-5393]: 아산면은 조그마한
면소재지이다. 음식 먹을 만한 집을 찾으니 이곳을 가르켜 준다. 실상 음식점은 많았으나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지름길이다. 아산우체국 옆의 식당은 시골식당이다.
백반 6,000원인데 마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고인돌박물관에 근무하는 해설사 분들이었다.
근처서 음식을 잘 한다는 반증일 것이다. 식사비는 저렴하고 반찬도 입에 맞으며, 밥은
밥통에서 더 퍼서 먹을 수 있었는데 우리들 모 두 식사를 더하고 나왔다.
12) 고창고인돌박물관[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위사진 좌측부터 5,4,운곡,3,2,1 글을 삽입기술 부족으로 첨기
[탐방코스 안내: 제 1~제 5코스 1.8km-고창읍 죽림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
제 6코스 1.7km-고창읍 도산리 일대
제 1코스: 53기(탁자형 1기, 바둑판형 33기, 불명 19기) 2509호, 2513호의 다양한 양식의
고인돌을 한 눈에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제 2코스: 41기(지상석곽형 1기, 바둑판형 25기, 불명 15기) 동서로 약 276m에 걸쳐 41기가
열을 지어 있으며, 2428호, 2406호가 있으며, 2406호는 120~150ton의 거대 고인돌이다.
제 3코스: 128기(지상석곽형 20기, 바둑판형 53기, 불명 55기) 고인돌이 집중 분포된 특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매장부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고인돌과 무덤 방의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고인돌 유적의 중심이다.
제 4코스: (고인돌 채석장) 총 23개소의 고인돌채석장은 정상부의 성들봉 주변 15개소, 중봉
주변에 8개소가 조사되었다.
제 5코스: 220기(지상석곽형 25기, 바둑판형 135기, 불명 60기) 상감리와 봉덕리~죽림리에
걸쳐 있으며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지역으로, 크기가 2m 내외의 소형 고인돌이 많이 분포된
곳으로 특이한 점은 다지석형 고인돌을 접할 수 있고 일정한 열을 이루고 있 다.
제 6코스: 5기(탁자형 1기, 불명 4기) 죽림리 고인돌군의 앞 능선에 자리한다. 특징은 판석과
상석 사이에 쐐김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by 고창고인돌박물관)
위의 길을 쭉 따르면 오베이골로 가며 운곡고인돌이 있다.
오베이골과 운곡 고인돌[오베이골: 오베이골은 오방골의 전라도 사투리로 호비골, 호비등,
오방골로도 불리고 있으며, 호비끝, 호비 등은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 콧등과 같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오베이골에는 3.4km의 탐방로가 있다.
운곡 고인돌: 이곳에서 북쪽으로 3.4km를 걸어가다 보면 운곡서원 주변으로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 최대의 운곡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5.5m,
너비 4.5m, 두께 4m이며, 무게가 300톤쯤 되어 한국에서 가장 크다. 아산댐 건설공사때 조사된
고인돌인데, 처음에는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에 굄돌이 묻혀 있었지만, 조사과정에서 드러나
확실한 고인돌로 판명되었다. 덮개돌 아래는 길이 1.2m, 너비 0.8m, 두께 0.4m의 굄돌 2개가
남쪽에 받치고 있으며 북쪽의 굄돌은 땅 속에 묻혀 있다.
고인돌 군을 보기 위해서 내가 걷기에는 무리가 되어 관내를 운행하는 열차 ‘모로모로
열차’를 타기위해 30여 분간 기다려서 13시30분 열차로 한바퀴 휘돌아 보았다. 건강만
허락되었다면 운곡고인돌까지 가보았을 터이지만 관광객 일부가 가건만 우리는 그대로
돌아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고인돌군을 뒤로하고 박물관은 패스해
귀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고창고인돌박물관 옆에 청동기시대 살림 등의 구조와 모조품들로 학생들 교육을 도웁는 듯하다.
장방형 움집[장방형 움집은 길이 5~6m, 너비 3~4m 크기가 보통이다. 약 30cm내외의 움을 파고
벽체 아래나 바닥에 1~3열의 구멍을 파고 기둥을 시설한 것으로 보아 맞배지붕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움 안에서는 주위에 돌을 두른 노지와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는데, 노지가
없는 경우도 있다. 바닥은 그대로 다져서 사용하였으나 그 위에 점토를 발라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예도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움집은 집회 등 특별한 장소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망루[청동기시대에는 농사기술의 발달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부의 축적과 권력의 발생으로
주변 집단과 분쟁이 잦아졌다. 그래서 외부로부터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 주변에는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긴 구덩이로 된 환호를 파서 마을을 방어했다. 또한 외부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해
높은 망루를 짓고 감시자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원형 움집[청동기시대 움집은 전기에 한 변이 아주 긴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보이던 것이 중기에는
점차 원형과 방형에 가까워진다.
원형 움집은 직경 5m 내외, 깊이 30cm~1m 내외로 둥그렇게 땅을 파서 터를 잡고,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얹고 갈대, 억새 등을 이용해서 아래는 둥글고 위는 양면이 경사진 맞배지붕
모양의 집이다. 움집 내부 중심부에는 돌칼이나 돌도끼, 홈자귀 같은 연장을 만들던
작업 구덩이를 두었다.
5. 에필로그: 나의 건강이 받쳐주지 못해 고인돌 유적지를 마음껏 돌아보지 못했고
미당 서정주 문학관이나 인촌 김성수 생가, 고창읍성도 들리지 못했으며, 둘째네
외손주들 학교 파한 후 귀가하는데 도와야하는 문제가 신경 쓰여 여행기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 못내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이틀을 충분히 활용했다면 계획표를 거의
100%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며, 마지막 날은 저녁을 먹고 헤어질 수 있었을 터인데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서둘러 삼형제가 귀가하기 바쁜 모양새를 취해
여행의 마무리를 토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