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과 다산유적지 다녀오기-2
잘 가꾸어진 나무들과 늘어나는 관광객의 눈높이에 맞게 여러 시설들과 볼거리를 만들어
놓아 젊은 사람들이 연인과의 추억을 담기에 충분해 보였으며, ‘겨울연가’의 촬영지
세 곳에서는 어김없이 일본인 관광객을 만날 수 있었다. 허리가 불편한 본인은 몇 번의
휴식으로 겨울연가 첫키스촬영지,연련지,수제원,송파은행나무길,전나무길,이슬정원,
메타세콰이아길,남이풍원,자작나무숲,단풍길을 거쳐 입구 모닥불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와 ‘남이섬웰빙닭갈비’에서 점심을 먹고 떠났다.
장강(長江)과 황하(黃河) [살아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엄마와 아이”의 모습, 유년시절을 넓은
대지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성장한 위청청선생은 흙(대지)이라는 재료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주관적 기준과 기대가 클수록 커지는 화(禍)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행복’과 는 점점
멀어져가는 인간세상의 안타까움을 ‘엄마와 아기의 행복한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을 통 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선생의 작품을 전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문화와 예술의 섬을 지향하는 남이섬의
매력에 이끌려 수많은 그의 소중한 작품을 위청청행복원미술관에 남기고 있다.
※작품설명 중국대륙을 상징하는 장강과 황하를 어머니의 젖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으며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은 중국 민족을 뜻한다.] ※위 안내글을 복기한 것입니다.
7. 다산유적지: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 정(丁)씨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尹)씨(고산
윤선도의 후손)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다. 이곳 마현(마재) 마을은 선생이
태어나시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若鉉)과 동복형인 약전(若銓)•
약종(若鍾) 그리고 누이(매형이 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의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셨다.
선생은 반계(磻溪) 유형원•성호(星湖) 이익 선생의 뒤를 이어 조선 시대 실학사상
(實學思想)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후기 개화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經集)과
문집(文集)을 저술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의 화성을 설계하셨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셨으며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도 남기셨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는데 『한국 최대의
사회 과학자』라고 적혀 있다.
다산문화의 거리에는 1. 여유당생가, 2. 사당, 3. 기념관, 4. 문화관, 5. 다산의 기상,
6. 다산의 문화, 7. 다산의 철학, 8. 다산의 과학, 9. 다산의 생애, 10. 다산의 유배생활,
11. 다산의 교훈, 12. 실학박물관, 13. 서화관, 14. 주차장이 있으며, 문화관을 거쳐
정약용선생의 동상을 보면서 멀리 사당을 지나쳐 여유당을 돌아보고 조그마한 동산으로
올라 다산묘에 들리고 여유당의 동측으로 돌아 여유당 사랑채를 지나고 정문격인
‘실학연수(實學淵藪)’란 현판이 붙은 문을 지나 귀로길에 올랐다.
여유당(與猶堂) [이 곳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이던 여유당이 있었던 곳으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생의 후손인 정일권 국회의장의 휘호를 자연석에 각자하여 이 비를 세우다.
1974년 10월 일 경기도지사] ※위 사진에서 정일권을 의도적으로 훼손한 모습이 보인다.
위 사진 두 장은 2009년 3월 21일 찾았을 때의 흔적이며
아래의 두 장은 2013년 6월 19일 찾았을 때의 흔적.
8. 소회: 언젠가부터 디카의 깊이가 얕아졌다. 통증 때문에 집중력과 사물을 안정적으로
다루는데 결격 사유가 생긴 듯하다. 남이섬에서는 더많은 곳을 둘러봐야 되었건만 통증을
억제하며 더많은 곳을 돌아볼 여유가 체력적으로 되지 못한 듯 했다. 다산유적지는 강진의
다산유배지를 몇 번씩 다녀왔건만 시간적으로 다산의 유배중의 생활이 가물가물할 때여서
감흥이 부족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고 돈다지만 우리는 왜
이다지도 포용의 덕이 부족함 속에서 서로를 헐뜯고 살아야 하는지, 역사는 작금의
사태와 비슷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 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컨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거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깍는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 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해 낸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두어 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서 써가지고 문미(門 楣)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