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박 2일의 여수지역 관광-2

아름답지만~ 2018. 1. 16. 20:45

②오충사는 임진왜란•정유재란때 구국(救國)을 위하여 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압해정씨(押海丁氏) 창원파 일문(昌原派 一門)의 충절공 정철

(忠節公 丁哲), 충의공 정춘(忠毅公 丁春), 충숙공 정린(忠肅公 丁麟), 충정공 정대수

(忠貞公 丁大水)등 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우(祠宇)이다.

오충사는 여수시 선원동 가곡마을에 건립되었던 가곡서원(佳谷書院)으로부터 연원한다.

이 가곡서원은 임진왜란 중 큰공을 세우고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철(丁 哲)의 공을

인정하여 조선 조정에서 충절공(忠節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자, 1826 년(순조 26) 4월

성균관과 순천향교 유림들에 의해 사우 건립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해 7~8월에 전라도

향교(광주,나주,전주,남원 향교 등)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어 1847년(헌종 13) 전라도 유림들의 상언(上言)에 의해 가곡서원이 건립 되었으며,

이후 사충사(四忠祠)를 병설하여 정철, 정춘, 정링, 정대수 등 사충공신(四忠 公臣)을

배향(配享)하였다. 그런데 사충사는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가곡서원과 같이 훼철(毁撤)되었다. 이 사우(祠宇)는 1923년 8월 압해정씨 창원파 문중과

유림, 향민들에 의해 현 위치에 이건하고 이충무공(李忠武公) 후손들과 합의하여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主壁)으로 사충공신(四忠功臣)을 함께 배향하고 오충사 편액

(五忠祠 扁額)을 걸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철거되면서 사중재산(祠中財産) 까지

몰수당하였다가 1962년 현위치에 추모복설(追慕復設)하였다. 앞면 3칸 단층 팔작지붕이며

신당, 강당, 재실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1976년 한차례 중건되었으며, 충의로 순국하여 나라를 지켰던 다섯 충신을 찬양하고

기리기 위하여 여수지역 유림들과 이충무공 유적 영구보존회가 향민들과 같이 매년 3월

16일과 9월 16일에 석채례(釋菜禮)를 봉행(奉行)하고 있다.]by 안내문 인용

 

 

 

                                                                         아래는 2017년 9월 16일의 석채례를 봉행한 글귀들

❍선소유적에서 주민에게 물으니 꽤 거리가 된다고 해 택시로 이동을 했다. 넓게 조성된

유적지는 우리는 서둘러 충의문을 거쳐 오충사로 들어갔으나 내부는 접근하지 못했다.

전같지 못한 건강은 걸음 수를 줄이려고 맞줄임이 심한 편이다. 오충사 바로 옆의

칠현신사적비는 아주 최근의 작품이라 세세히 들여다 보지 않았으나 주 비석에 을묘사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의 충신을 모셨다고 써있어 두 분이 누구일까 궁금하므로만 접어야

했다. 또 사충사유적비는 다소 떨어진 곳에 있으나 돌아보기에는 비용에 비해서

별로인듯해 생략하였다.

 

 

③이순신공원[웅천택지지구내의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한편은 바위산으로

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산수첨경원이라는 조그마한 금강산을 꾸며 놓았다. 또 이순신을

도왔던 수많은 인물들을 인공벽에 소개해 놓았고 주변으로는 넓게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해 놓았으며, 여수 항일독립운동탑,삼려통합석과 바위언덕에 계단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산수첨경원[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축소해 만든 산수첨경원입니다. 수려한

우리나라의 모습을 느끼시고 여유로운 휴식의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이순신장군을 도운 사람들: 의승수군(義僧水軍), 무명의 전라좌수군(無名 全羅左水軍),

정씨 사충신(丁氏 四忠臣), 해상의병(海上義兵), 송희립(宋希立; 1553~?), 정걸 (丁傑;

1514~1597), 나대용(羅大用; 1556~1612), 정운(鄭運; 1543~1592), 김완 (金完; 1546~1607),

김인영(金仁英; ?~?), 배흥립(裵興立; 1546~1608), 이순신(李 純信; 1554~1611), 권준

(權俊; 1541~1611), 어영담(魚泳潭; 1532~1594), 이억기(李億棋; 1561~1597),

원균(元均; 1540~1597) by 안내글 중 성명만 인용

 

 

 

 

 

 

 

 

❍산수첨경원은 바위와 소나무를 섞어서 조경한 작은 금강산이라 앴으며, 이순신장군을

도운 분들은 의외로 많았고 각 분들의 내력을 설명해 주고 있었으나 성명으로 대치함은

그 분들에게는 예가 아니지만 생략할 밖에 없었다. 각 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장군을 도와

해전사에 신기록을 이룰 수 있었다는데 감사했다.

✴삼려통합석[3려(麗) 시•군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 뿌리이나, 1949년 8월 15일

여수읍이 여수시로, 나머지 9개 면은 여천군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이후 1986년 1 월

1일 여천군 삼일읍과 쌍봉면이 여천시로 승격되어 여수반도는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었다.

그러나, 1997년 9월 9일 전국 최초로 주민 발의에 의한 3려 주민의 의견조사결과

통합에 찬성한 주민의 수가 과반수를 넘어 1998년 4월 1일 전남 제1의 통합 여수시

출범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조형물은 통합 여수시로 다시 태어남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로 이곳 웅천산에서 채취한 돌로 하나가 되는 여수의 기운을 느끼기 위하여

이곳에 삼려통합석을 세웠다.] 2016.6 여수시 by 안내글 인용

 

❍이순신공원의 데크계단을 내려선 곳에 만들어진 삼려통합석은 꽤 큰 돌로 만들었고

가까이에 마치 고인돌처럼 만들어 좀더 예술적인 가미가 있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건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나라가 고인돌이 많다가 보니 그렇게 보이게 한

작품이 아쉽다는 뜻으로 지적해 본다.

 

 

④이순신 어머니사시던 곳(慈堂址)위치: 여천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번지, 면적: 1026㎡(303평)

이충무공께서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시어 좌수영 본영에 근무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1592~1597) 충청도 지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모친(草溪卞夫人)을 웅천동 송현

(일명 古音川)마을 정대수(丁大水; 충정공)장군 댁으로 모셔와 전란 중에도 어머님께 아침

저녁 문안 드렸던 곳으로 이충무공의 효심이 깃든 충효의 장소 이다.

현재의 집은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창원정씨 문중에서 1930년 초에 개축한 건물 (39평)이며

유물로는 선소병기(船所兵器)의 인수인계서인 반열책(反悅冊)과 자당께서 쓰셨던 가재도구

중 절구통과 밥솥이 보존되어 있다. by 석비글 인용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부인

                                                                        이순신장군과 자당의 문안인사

 

                        자당께서 쓰시던 돌절구와 밥솥, 초점이 흐릿한 솥은 바닥은 헐었다는 안내인의 얘기

❍너무 깨끗해 유적지 기분이 다소 미흡하지만 나름의 노력은 기울인 듯 했으나 주변이

아파트 숲으로 변해 있어 불만족 스러웠으나 정대수장군의 집안이라지만 잘 꾸며져 있던

분묘를 이장하는 모습에서 이순신 자당지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으나 아직 이장한

곳을 깔끔하게 정리는 못했으나 향후에는 좀더 잘 꾸며질 것으 로 기대되었다. 이곳을

나와 영당지를 찾는 노력은 여수시민의 친절한 안내로 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었다.

 

 

 

 

                                                       3부로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