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군-4
태을암은 태안마애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조그마한 암자였다. 입구부터 마애삼존불상의
커다란 사진을 모시고 있었다. 대웅전 앞을 지나서 동백나무가 양쪽에 심겨진 계단을
오르면 마애삼존불상을 모신 전각이 있고, 절 마당 옆의 바위에는 태을동천(太乙洞天)과
일소계(一笑溪) 및 감모대(感慕臺)란 글씨가 있는 바위들이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
보다 이른 시기라고 하지만 매우 조잡한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암자라고는 해도 새로
지은지가 얼마되지 않아 께끗하고 단청도 싱그러우나 스님은 한 분도 만나지를 못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 국보 제307호, 백제시대,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산5
백화산 중턱에 있는 높이 394cm, 폭 545cm의 감실(龕室) 모양의 암벽에 새겨진
백제시대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挾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불과는 달리 중앙에는 보살, 좌에는 석가여래, 우에는 약사여래불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또한 좌우에 여래상은 큰 반면에 중앙의 관세음보살
(관음보살)은 작아 1 보살(一菩薩)• 2 여래(二如來)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통견의 불의(佛衣)가 두텁고 힘차게 처리되었으며, 앞자락이나 두 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도 묵직하게 표현되는 등 부처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양식상으로는 중국 북제(北齊) 불상양식의 계통을 따르고 있어 제작연대는 6세기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당시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역에서 다리 역할을 하였던
태안반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새로운 석굴양식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by 안내글 인용
❀ 절집은 매우 조용했다. 마애여래상 앞에서 조용히 예를 갖추고 좀더 다른 곳을
둘러보았으면 좋겠으나 백화산 정상과 백화산 데크로드를 걸은 뒤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차로 돌아와 남문리5층석탑을 찾아간다.
2. 남문리오층석탑(南門里五層石塔)
문화재자료 제201호(1984.05.17),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435-1규모 높이 4.4m, 화강암, 고려시대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상단부는 백제의 기법이 가미되어 있는데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탑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탑골로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서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단층의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탑신부
(塔神部)의 몸돌은 1매로 만들어져 있다. 최상층의 몸돌은 없어져 지금은 다른 돌로
대체되어 있으며, 상단부에는 1매의 보륜(寶輪)과 원형의 복발 (覆鉢)이 남아있다.
남문리 5층석탑은 태안군 내에 현존하고 있는 석탑 가운데 비교적 손상이 적은 것으로
고려시대 불교유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by 안내글 인용
❀ 비교적 넓은 빈터의 언덕 가에 위치해 있으나 석탑 주위를 둘러친 울타리와 연결된
곳까지 개들이 묶인 상태로 접근해 짓고 있으며 사유지가 북서쪽으로 이어져 있어
석탑의 한 면은 주택과 개들이 차지하고 있는 형세라 달랑 석탑뿐인 곳이 주변을 다소
손질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도 되어 '미성돌솥밥한정식'을 찾아 갔으나
음식점이 바뀌어 그 옆의 ‘비원’(태안군 태안읍 군청8길 34)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다음으로 안흥성과 태국사를 찾아서 20여 분을 달리고 태국사까지 올라갔다.
3. 태국사(泰國寺) 전통사찰 재47호(1982.10.1), 태안군 근흥면 철죽리 1078
백제 무왕(百濟 武王) 34년 국태보안(國泰保安)의 원으로 태국사(泰國寺)가 창건된 이래
조선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특명으로 중창되어 중국(中國)의 사신들이 무사항해를
빌었고, 국난(國難)시 승병(僧兵)을 관할(管轄)하던 호국불교의 요지가 되어 역사적
(歷史的)으로 유래가 깊은 사찰이다. 그후 동학란(東學亂)시 소멸되어 명맥만 유지하여
오다, 1982년에 중창하였고 전통사찰(傳統寺刹) 제47호로 등록되어 있다. by 안내글 인용
4. 안흥진성(安興鎭城) / 안흥성(安興城)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안흥성길 33-6 (근흥면) 문화재 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11호(1979. 7. 3 지정)
안흥성(안흥진성)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의 뒷산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조 제17대
효종 6년(1655)에 축성된 것이다. 축성 연유를 살펴보면 경기사인 김석견이 왕에게
상소하여 안흥진성의 축조를 청원하니 왕이 지경연사인 이후원을 불러 안흥진성
축조의 필요성을 하문하였다. 이에 왕이 충청감사에 명해 안흥진성을 축조케 하니 인근
19개 읍민이 동원되어 10여년만에 축성되었다. 안흥성은 이후 240년간 내려오다
조선조의 고종 31년(1894년) 동학혁명때 성내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이에 따라
성곽은 자연히 폐성되고 말았다.
지금도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동문은 수성루, 서문은
수홍루, 남문은 복파루, 북문은 삼성루라 불렸다. 안흥성은 둘레 1,568m, 높이 3.5m에
이르는 석성(石城)이다. by [Daum백과] 안흥성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수홍루를 지나 주차하고 안흥성 탐방안내도를 보니 태국사가 꽤 멀게보여 차를
타고 오르니 얼마되지 않아 조그마한 사찰 태국사이다. 관음전에 들려 여정의 무운을
빌고 나와 성곽의 흔적들을 담고 절 옆의 목백일홍이 역사를 항변하는 듯 고목의
형태로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는 신진도리안흥외항에 들러 주변의 한적한 상가들,
시골답지 않은 빌딩들, 한가로이 정박한 철선들, 갈매기를 바라보며 바닷물 내음을
마시고 다음의 행선지인 남면의 몽산리석가여래좌상을 향한다.
5. 몽산리 석가여래좌상(夢山里 釋迦如來坐像) 도유형문화재 제122호, 태안군 남면 몽산리 산182
이 불상은 석가여래좌상으로 조각기법과 양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죽사(竹寺)의 옛터로 전해져 온다.
불상의 뒤에는 불꽃 무늬로 장식한 광배(光背)가 있으며, 내부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새겼다.
얼굴 모습은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못하며, 손의 모양은 땅에서 올라오는 악마를 누르는
형태를 하고 있다. 불상이 놓여있는 받침은 1층 받침돌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8각
받침돌을 중간에 놓고, 그 위에 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있는 3층 구조이다. 현재 놓여져 있는
모습은 원래의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by 안내글 인용
❀ 네비는 안내판까지 안내를 한다. 멀리 불상의 모습은 보이나 바로 앞은 논이 이어져
있다. 차를 안내판 가까이 대고 진행방향으로 조금 걸어 고추밭 자리를 타고 석
가여래좌상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역사가 말해주나? 얼굴의 마모가 너무 심하다.
한켠에는 과거의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듯 주춧돌과 출토된 기와들을 조금 쌓아
놓았다. 나오는 길에 들어갈 때 보았던 냉이를 캔다고 잠시 시간을 보내고 다음 행선지인
소근진성으로 향한다.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