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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정몽주선생 묘와 저헌이석형선생 묘 등-1

아름답지만~ 2018. 4. 3. 20:18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은 선죽교(善竹橋)와 얽힌 이야기로

고등학교 역사에서 충실히 배웠던 기억이 있는 인물로 마음은 항상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를 못하다가 뒤늦게 찾고자 자료를 검토하던 중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의

묘도 같은 묘역이라는 사실과 묘역 초입의 연안이씨비각공원(延安李氏碑閣公苑)이

있었다. 또 주변 능선에 수많은 영일정씨묘역(迎日鄭氏墓域)이 있어 불편한 다리로 꽤

많은 묘들을 찾았으며 그 분들의 자료도 찾아보고자 한다.

 

 

 

❍정몽주선생의 묘(鄭夢周先生之墓)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호(기념물),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

이 곳은 고려 말의 충신이며 동방리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된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며,

본관(本貫)은 영일(迎日)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 과거(科擧)에 연 삼장(連 三長)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벼슬이 예문관검열

(藝文館檢閱)부터 예조정랑(禮曹正郞)대사성문하찬성사(大司成門下贊成事)등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까지 오르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았다.

5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향교(鄕校)를 세워 유학(儒學)을 진흥하여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당시 부패된 관료들의 사전제도(私田制度)를 혁파(革罷)하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두어 조운(漕運)에 힘썼으며, 조전원수(助戰元帥)로 함경도, 전라도

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왜구(倭寇)를 격퇴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명(明)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가 두 나라의 국교(國交)를 원활하게 하고 밀린 세공(歲貢)을

탕감(蕩減)받았으며, 일본(日本)에 사절(使節)로 가서는 왜구(倭寇)의 침범을 금하게 하고

귀국시에는 억류되어 있는 고려인 다수를 대동귀국(帶同歸國)하는 등 려말외교(麗末外交)에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선생은 고려사직

(高麗社稷)을 지키려다 1392년 (음)4월 4일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殉節)하셨다.

선생의 나라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애국충절(愛國忠節)의 단심가(丹心歌)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산 교훈(敎訓)이 되고 있다. (안내글 복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殉節)한 후 송악산 중들이 풍덕군 산자락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으로 이장할 때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 다홍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관직,성시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이방원(李芳遠; 후일의 태종)은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동방이학지조로, 훗날 조선시대 사림파의 시조가 되었다.

정몽주의 7세손에 이르러 별좌공파•판서공파•포천공파로 분파되었고, 포천공 정종선

(鄭從善)의 손자인 정지한(鄭之翰)이 모현면 왕산리 왕곡마을 속칭 왕구리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이후 갈담리와 일산리 등으로 퍼졌다.

능원리에 포은 정몽주묘역과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

(神道碑)가 묘역 앞에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사당에는

 정몽주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선생 묘(墓)

이석형(1415~1477)선생은 조선조에 명재상(名宰相)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대호군(大護軍) 중

좌의정(左義政) 회림(懷林)의 아들로서 자(字)는 백옥(伯玉), 호(號)는 저헌(樗軒),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세종(世宗) 23년 진사(進士), 생원(生員), 문과(文科)에 연달아 3장원(三壯元)하여 사간원정언

(司諫院正言)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받았다.

세조(世祖) 1년 첨지중추사(僉知中樞事), 이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때 익산 동헌(東軒)에

사육신(死六臣)의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글을 남겨 모함을 받았으나 선생의 학문을 아끼는 세조는

예조참의(禮曹叅議)로 체직,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 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黃海道觀察使)가 되어 모든 정사(政事)를 반듯이 처리함에 세조는 “경은 나의 서도(西道)의 주인

(主人)이다.”라 칭송하였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호조참판

(戶曹參判)에 이어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로 호패법(號牌法)을 정착시켰다.

세조 승하 후 고부청승습사(告訃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보국숭록대부

(輔國崇祿大夫; 正一品)가 되고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에 책록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선생은 학문(學問)의 거봉(巨峰)으로 도덕(道德)을 숭상(崇尙)한 유학자(儒學者)이며 고려사

(高麗史)를 편찬 하였고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저헌집 (樗軒集) 등 저서가 많다.

신도비(神道碑)는 4대손 문충공월사 이정귀(李廷龜)대제학(大提學)이 찬하였는데 본래 묘소 앞에

있었으나 비각을 세우면서 아래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공원(碑閣公苑)에 이전 보존하고 있다.

선생의 성품은 온유순후(溫柔淳厚)하여 항상 불우한 민생을 도왔으며 만년(晩年)에는 집터

(연지동 서울대병원자리) 연못에 계일정(戒溢亭)을 지어 자손들을 훈육(訓育)하고 시선(詩仙)으로

지내니 모두 신선(神仙)같다고 하였다.

계일정신(戒溢精神: 분에 넘침을 경계함)은 후손들이 그 유지(遺志)를 받들어 가문훈(家門訓)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후예번성(後裔繁盛)하고 훈공(勳功)에 빛나는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대표적인 명문

(名門)으로 평판받아 왔다. 이는 선생의 검소하고 겸손한 계일정신의 훈육(訓育) 때문이며 현세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훌륭한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안내글 복기)

 

 

 

두 분의 묘는 쌍유혈(雙乳穴)의 좌우에 모셔져 있다. 우리는 잘 정돈된 묘역으로 홍살문을

거치고 모현당(慕賢堂)과 영모재(永慕齋)를 거쳐 우측으로 오르니 이석형선생의 묘였다.

둘러보고 잔디밭에 난 소로를 따라 좌측으로 건너가니 정몽주선생의 묘였다. 잘 꾸며진

묘는 태조 이성계의 뜻일까, 아니면 태종 이방원의 뜻이었을까 아무턴 왕묘를 뺨친다고

생각되었다. 원혼을 위로해 주어야 속죄하는 마음일까? 다시 좌측의 묘들을 훑어보며

이곳이 영일정씨의 묘역으로 변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포은선생의 아들 정종성(鄭宗誠)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를

지냈으며, 손자 정보(鄭保)는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되어 세조의 국문(鞠問)을 받아

사형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포은 정몽주의 손자라는 연유로 영일(迎日)에 유배되었다가

단성(丹城)으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정보는 포은의 유학(儒學)을 가통으로

전해온 가학을 전수하였으며, 성품이 올곧고, 구속받기를 싫어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절친하였던 인물이 성삼문•박팽년이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단성의

문태산 기슭에 가매장 하였다가 이후 포은선생의 묘소 아래로 반장(返葬)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정보는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이 포숭된 이후 1703년(숙종 29)에 신원되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근대시기에 이르러 이건하,남정철 등의 노력으로 1906년(광무 10)에 정2품

자헌대부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그 외에도 7대손 별좌공(別坐公) 정응선(鄭應善; ?11.21~1603)의 아들로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정준(鄭儁: 1573~1644)은 희릉참봉•건원릉 참봉을 거쳐 제용감봉사•사재감직장•

장흥고주부와 돈령부주부를 거쳐 1636년(인조 14) 병조호란 때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지냈고,

다시 돈령부판관을 거쳐, 1644년 종친부전첨을 역임하다 졸(卒)하였다. 종손인 응선의

후손들은 주로 모현면 능원리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했고, 둘째인 명선은 고개너머

기흥구 청덕동으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이루게 되고 능원리에는 일부만 남게된다.

                                                                          (by 벽암두릉연가,향토문화전자대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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