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포은정몽주선생 묘와 저헌이석형선생 묘 등-2

아름답지만~ 2018. 4. 3. 20:40

워낙 많은 분묘들이 존재하고 있어 일부를 파악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짧은 지식

때문에 연안이씨(延安李氏)의 묘역을 찾겠다고 아픈 허리와 다리를 과로시켜서 몇 군데는

먼발치로만 더듬고 영안이씨비각공원(延安李氏碑閣公苑)을 둘러보며 착각을 깨달았다.

 

 

 

 

 

 

 

 

 

 

❍안내문(案內文)

1. 여기에 세워진 비석(碑石)은 이곳 문수산(文秀山) 경내에 모셔져 있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선조님(先祖任)의 행적비(行蹟碑)로써 신도비문(神道碑文) 및 묘갈문(墓碣文)과 행장(行狀)을

번역(飜譯) 종합(綜合)하여 세운 비석(碑石)입니다.

2. 이 안내판(案內板) 왼쪽길로 약 30m지점 잔디 언덕위에 모셔져 있는 2기(二基)의 묘소(墓所)가

계시니 오른쪽 묘소(墓所)가 조선조 세종(朝鮮朝 世宗)때 삼과(三科)를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등을 역임(歷任)하셨으며 성종(成宗)때

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신 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輔國崇祿大夫判中樞

府事)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공신연성부원군(功臣延城府院君) 시(諡) 문강공

(文康公) 호(號) 저헌(樗軒)이요. 휘 석형(諱 石亨)이신 선조고(先祖考)와 그 배위(配位)이신 증(贈)

정경부인영일정씨(貞敬夫人迎日鄭氏)묘소(墓所)이며 그 왼쪽 묘소(墓所)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친가(親家) 증조부(曾祖父)로써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이며 정치가(政治家)요 대학자(大學者)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충의백(忠義伯) 영일정공(迎日鄭公) 호(號)는 포은(圃隱)이요 휘(諱)는

몽주선생(夢周先生)의 묘소(墓所)이시니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참배(參拜)하시기 바랍니 다.

3. 행적비(行蹟碑) 오른쪽 길로 약 200m를 가시면 재실(齋室)인 문강재(文康齋)와 그 왼편에는

서울 종로구(鐘路區) 연지동(蓮池洞) 저헌공(樗軒公)의 생가(生家) 연못에 세워졌던 계일정(戒溢亭)이

복원(復元)되었으니 관람(觀覽)하시기 바랍니다.

1997.10. 연안이씨저헌공파대종회(延安李氏樗軒公派大宗會) 회장 백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공원(碑閣公苑)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저헌석형(樗軒石亨) 문강공(文康公)은 연안이씨(延安李氏) 중흥조

(中興祖)이시다. 삼과장원(三科壯元)의 석학(碩學)이셨고 대문장가(大文章家)로 덕행(德行)이

높으셨으며 정치행정가(政治行政家)로도 치적(治績)이 많으셨고 편집시문 등(編輯詩文 等) 많은

문적(文籍)을 남기셨다. 공(公)은 서기(西紀)1415年~1477年 수(壽) 63에 서거(逝去) 문수산

(文秀山) 쌍유혈(雙乳穴) 포은선생(圃隱先生) 좌혈(左穴)에 영면(永眠)하시니 신도비(神道碑)는

현손(玄孫) 월사 정구공(月沙廷龜公)이 지으시고 당대(當代) 명필(名筆) 신익성공(申翊聖公)이

중국(中國)에서 구(求)해온 돌에 새겨 세웠는데 500여년(餘年) 설우풍화(雪雨風化)로 부석되어

애석하던차 경기도 문화재(京 畿道 文化財)로 지정(指定)되어 영구보존(永久保存)하게되었다.

국비(國費)로 신도비(神道碑)를 이 곳에 옮겨 세우고 비각(碑閣)을 건립(建立)하였으며 정씨문중

(鄭氏門中)과 협조(協助)묘역성역화사업(墓域聖域化事業)을 추진(推進)하고 비각(碑閣) 앞을

정비(整備)하여 공(公)의 행적비(行績碑)와 역내(域內)에 모셔져 있는 자손(子孫)의 신도비

(神道碑)[손(孫) 명장공묘(命長公墓)는 보은(報恩) 수한면(水汗面) 광촌리(光村里), 효장공묘

(孝長公墓)는 괴산(槐山) 감물면(甘物面) 오문리(五問里)에 계심]를 세워 비각공원

(碑閣公苑)을 조성(造成)하다.

후손(後孫)들은 선조(先祖)님의 운덕(隱德)을 흠모(欽慕)하며 그 유덕(遺德)을 후세(後世)에 길이

전수(傳授)코져 합니다. 西紀 2002年 四月 五日

연안이씨(延安李氏) 저헌공파(樗軒公派) 대종회(大宗會) 회장(會長) 소정(蘇庭) 4배(培)근식(謹識)

저헌(樗軒) 석형(石亨) 문강공(文康公) 묘역문화재(墓域文化財) 송(頌)

정경부인(貞敬夫人) 삼각산(三角山)에 백일기도(百日祈禱) 치성(致誠)드려 바위깨고 백룡(白龍)나와

승천(昇天)함이 현몽(現夢)이라 신동(神童)으로 진세(振世)하니 명현기상(名賢氣象) 보이시고

장(壯)하도다 삼과장원(三科壯元) 광화중문(光化中門) 드셨다네

진관사(津寬寺)에 사가독서(賜暇讀書) 사육신중(死六臣中) 4인(人)이니 전라감사(全羅監査) 안갔으면

만고충신(萬古忠臣)되셨으리 연화방(蓮花坊)에 모정(茅亭)짓고 계일청덕(戒溢淸德) 가르치니 후손

(後孫)들은 계계승승(繼繼承承) 계일정신(戒溢精神)살았도다

한성판윤(漢城判尹) 칠여년(七餘年)에 왕은상찬(王恩賞讚) 더하셨고 정도문치(正道文治) 청렴수범

(淸廉垂範) 선정송덕(善政頌德) 드높았네 팔도조선(八道朝鮮) 체찰사시(體察使時) 고을마다 남긴

문적(文籍) 치평요람(治平要覽) 대학연의(大學衍義) 지은책도 많으시네

생전(生前)에는 부원군(府院君)에 정승반열(政丞班列) 오르셨고 기년정유(忌年丁酉) 2月 8日 이순여삼

(耳順餘三) 소세(素世)하니 성종(成宗)임금 스승예우(禮遇) 철조소찬(撤朝素饌) 하셨으며 문강 시호

(文康諡號) 받으시고 부도전(不挑典)에 드셨다네

문수산(文秀山)의 명당국(明堂局)에 쌍유혈(雙乳穴)이 있더이다 오른쪽에 포은선생(圃隱先生) 왼쪽

혈(穴) 저헌선조(樗軒先祖) 자손만대(子孫萬代) 영화지지(榮華之地) 명당(明堂)자리 아니던가

선조은덕(先祖恩德) 천우(天佑)하사 이 자리를 주셨도다. 후예자손(後裔子孫) 영민(英敏)하여 등과

(登科)한 이 얼마인고 은옥(銀玉)•관자(貫子)•금관자(金貫子)를 두수(斗數)로서 헤아리네 정승판서

(政丞判書) 대제학(大提學)에 봉군공신(封君功臣) 몇몇인고 권문세가(權門勢家) 이루어도 계일정신

(戒溢精神) 지켰다네

천하문장(天下文章) 사대손(四代孫)인 월사공(月沙公)이 비문(碑文)짓고 당대명필(當代名筆) 선조부마

(宣祖駙馬) 신익성공(申翊聖公) 글씨써서 중화(中華)에서 구(求)한 돌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니

귀(貴)하고도 귀(貴)한지고 이나라의 보배루다 반천년(半千年)의 역사(歷史)흘러 선현(先賢)의 뜻

기리고자 신도비(神道碑)와 저헌묘역(樗軒墓域)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되니 묘하(墓下)에서

이곳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옮겨세워 비각건립(碑閣建立) 길이 보존(保存) 연이가문(延李家門)

영광(榮光)이라

『문수산(文秀山)에 선조묘소(先祖墓所) 헤아리니 삼백여소(三百餘所) 묘역중(墓域中)에

신도비갈(神道碑碣) 설우풍화(雪雨風化) 마멸(磨滅)되어 한문(漢文)글자 안보이고 읽기 또한

어려워라 의역비(意譯碑)를 새로세워 비석(碑石) 숲을 이루었네 선조적덕(先祖積德) 빛나도다

경사(慶事)로다 문화재역(文化財域) 연이가문(延李家門) 이 나라의 대수거목(大樹巨木)

화수(花樹)라네 보존(保存)하세 가문전통(家門傳統) 지켜가세

선조음덕(先祖陰德) 보우(保佑)하니 천추만세(千秋萬歲) 융창(隆昌)하리』

서기(西紀) 2002年 4月 5日 저헌공(樗軒公) 십칠대손(十七代孫) 경봉(暻峰) 비동경진(悲動敬鎭)

 

 

 

 

뒤늦은 방문에 수많은 분묘를 대부분 찾아 뵙고 비각공원에서도 수많은 비문들을

돌아보다가 너무 점심시간을 지내서 오윤겸묘역을 찾으러 가면서 들린 '한몸손두부'에서

한참 늦은 시간의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찾은 오윤겸묘역은 입구에는 석비가 있었으나 가까워 지면서는 도로도

좁아지고 안내판도 없어 되돌리는 수 밖에 없었다.

오윤겸선생묘(吳允謙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104호(1987.02.12지정),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은 『쇄미록(瑣尾錄)』의 저자인 오희문(吳希文)의 아들로, 1582년

(선조 15) 과거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28년(인조 6)에 영의정에 올랐다.

묘역의 규모는 240㎡이며, 묘소는 해주오씨 선영(先塋) 내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두번째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의

봉분은 홀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봉분 주위에는 사성(莎城)을 둘렀으며 근래에 와서 후손들이 새로 단장하면서 봉분에 원형의 호석을

둘렀다. 앞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이 있으며 그 앞에 장대석(長臺石)으로 계절(階節: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쌓았다. 아래 단 배계절(拜階節: 무덤 앞 계절 밑에 절을 할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든 땅)에는 동자석(童子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을 좌우로 배치하였고, 왼쪽 동자석

앞쪽으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비의 규모는 총높이 282㎝, 비 높이 226㎝, 너비 70㎝, 두께 25㎝이다. 비문은 마모가 심한 편이며

비좌(碑座)는 측면에 당초문(唐草文)이 새겨져 있고 위쪽 모서리에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글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썼다. ‘숭정정해(崇禎丁亥)’라는 명문으로

보아, 1647년(인조 25)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Daum백과] 오윤겸선생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