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유적지(원곡,대덕,시내 및 보개면)(2018.04.05)-1
안성의 유적지를 찾으며 실은 네 번째이나 이침부터 내리는 비가 조금 그쳐주기를
바라며 떠난 길, 때로는 보슬비로 때로는 굵은 비가 지속적으로 내려 계획을 조금
변경했고, 조금 일찍 수원으로 올라왔다. 그 과정을 정리해 본다.
아래,위 청원사에서~
아래, 위 낙원역사공원에서~
1. 다녀온 날: 2018년 4월 5일 목요일
2. 다녀온 길 요약: 남부경찰서(09시55분)-51분-원곡청원사(10시46분~10시56분)-32분
-안성죽리석조여래입상(11시28분; 비가 다소 심해져 찾지못함)-14분-도기동 삼층석탑
(11시42분~11시48분)-6분-아양동석불입상(11시54분~11시58분)-9분- 낙원역사공원
(12시07분~12시18분)-2분-극적루(12시20분: 차창투어)-4분-박기완 의 함흥냉면과 갈비
(12시24분~13시12분)-9분-영평사(13시21분~13시56분)-21분-굴암사
(14시17분~14시28분)-57분-삼성전자입구(15시25분)-35분-Home(16시)
위는 청원사 대웅전에서, 아래는 안성죽리석조여래입상을 못 찾은 곳
위는 도기동 삼층석탑, 아래는 낙원역사공원의 고목 뿌리를 조각한 모습
위는 낙원역사공원의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등, 아래는 굴암사의 벚꽃
차창투어로 마친 극적루를 어느 블로그에서 차용 기재
3. 다녀온 곳들 내용
① 청원사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전하는바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었다고도 하나 이 역시 불투명하다. 현재까지 청원사의
창건연대나 창업주 연혁 등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청원사 대웅전 삼존불의 복장유물에
의해 고려말 국태민안을 위한 원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청원사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통심길 16-102에 소재하고 있다.
❍ 안성청원사대웅전(安城淸源寺大雄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청원사는 천덕산(天德山)에 위치한 산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청원사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웅전 삼존불상의 복장유물에서 고려 충렬왕 6년
(1280) 국왕이 국태민안을 위하여 발원한 사경(寫經)과 묵서가 발견되어 이미 고려 말에는
국가의 원찰로서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져 철종 5년
(1854) 을 전후하여 대웅전의 중수가 이루어졌고, 1998년에는 요사를 보수하고 산신각을 옮겼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인데, 전면 공포는 다포계 형식으로 구성하고 후면 공포는
출목익공 형식으로 구성하여 전면의 의장을 더 화려하게 처리하였다. 내부에는 후면 벽에 붙여서
불단을 설치하고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사경(寫經): 후세에 전하거나 공양축복을 받기 위하여 불경을 옮겨 적은 경전
❍ 청원사칠층석탑(淸源寺七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 안성시 원곡면 통심길 16-102
이 탑은 높이 3.5m로 단층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올렸다. 이 석탑은 여러 개의 돌로 지대석을
조립하고 기단을 놓았다. 기단의 갑석은 상•하면 두 곳에 오엽의 연화문을 새겼고 각 측면마다
4 개씩의 인상문이 있다. 각층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새겨져 있으며, 탑몸돌과
지붕 돌은 각각 다른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의 아랫쪽에는 얕은 지붕받침이 있고
낙수면 의 경사와 반전은 위로 올라갈수록 급해진다. 상륜부에는 보주(寶柱)가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기다란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체감율이나 기단의 인상기법 등에서 조선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보주(寶柱): 탑의 꼭대기에 얹은 구슬(여의주)모양의 장식
안상(眼象): 원형이나 장방형의 곡선을 새겨서 우묵하게 파낸 조각의 일종
♲ 예전부터 이 앞 도로(23 지방도)를 자주 지났으나 이번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23번 지방도에서 좌회전으로 들어서니 성곡저수지를 지나 천덕산 기슭에 한적하고
고즈녁한 분위기를 띄우지만 다소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다.
② 안성 죽리 석조여래입상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죽리 17
전설에 의하면 큰 장마나 전염병 등 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화강암
전면에 낮은 부조(浮彫)로 여래형(如來型)의 입상을 꽉차게 조각하였다. 양손을 선정인
(禪定印)처럼 왼손 위에 오른 손을 가지런히 올려 양손 엄지손가락을 맞대 고, 내부에
Y자로 홈이 나있는 연봉우리 같은 지물을 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정인은 앉아있는
부처에게서 볼 수 있으나 이 불상은 서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세부 표현에서 중국 원명시대 의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어렵게 네비로 도착한 곳은 별장급의 조경석 석축으로 단장한 집에서 비 단도리를 하는
주인인 듯한 사람께 물어보니 앞에 있다고 하는데, 앞의 단장한 석축만을 보면서
찾으려다가 헛걸음 쳐 다른 분의 블로그에서 보니 잘 지은 집의 반대편에 있었는데
빗줄기가 다소 굵어 뒤는 생각도 못하고 다음 예정지인 영의정 기자헌묘는 잔디로 발이
심하게 젖을 것을 우려해 도기동으로 향했다.
다른 분의 블로그에서 인용한 죽리석조여래입상
③ 안성도기동 삼층석탑(安城道基洞 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재76호, 안성시 도기동 184
구 안성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도기동 입구 언덕 위에 건립되어 있는 이 탑은 높이가 5.4m로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백제계 석탑을 이은 고려시대 석탑이다. 평면 사각형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여러 장의 돌로 조립된 지대석 위에 모서리 기둥[우주(隅柱)만이 조각된 기단을
놓았다. 갑석은 1장의 얇은 돌로 만들었는데 아래에는 1단의 부연이 있다. 탑신부 중 1층
탑몸돌만 여러 장의 돌을 사용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돌은 편평한 석재를 놓아 다른 석탑에서와 같은 조형미를 찾을 수 없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생긴 모양의 특이성 때문에 5층
옥개석이 소실된 5층 석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안성경찰서를 지나 직좌회전해 드니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다소 높은 곳에 터를
잡고 삼층석탑이 서 있다. 석탑은 사찰터가 추정되어야 하나 홀로 높은 곳을 차지한
모습이 좀 의아스런 삼층석탑이었다. 아양동석불입상으로 네비를 만들고 멀지는
않으나 안성천을 건너 좌회전 해 시내의 골목으로 찾아나선다.
④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 菩薩立像) 향토유적 제10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364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 石佛立像)과 나란히 왼쪽에 서있는 거대한 보살입상
(菩薩 立像)으로 이곳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미륵불(彌勒佛)로 존숭(尊崇)해 오고
있 다.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젊은 장수가 도기리 탑산에서 뛰어올라 알미산을 딛고 비봉산 장수바위로 뛰어
가다가 실수로 여미륵의 목을 차서 부러뜨렸다고 한다. 이후 그 장수는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아양동 사람들에 의해서 미륵의 머리는 복구되었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는
현 위치에서 3m 앞이라고 하며 일제(日帝)때 수해(水害)로 도괴(倒壞)되어 목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마을민의 꿈에 미륵이 현몽하여 주민들이 두레를 만들 고 쌀을 거둬
복구했다고도 한다.
머리 부위에 화관(花冠)과 화판(花瓣)이 새겨져 있고 하단에 복발(覆鉢)이 있다. 얼굴
전체의 인상은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후덕(厚德)함을 느끼게 하며 눈•코•입이 가지런하고
양귀는 가늘고 길다. 보강한 목 부위에는 삼도(三道)의 흔적이 엿보인 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고 밑으로 내린 왼손과 허리부분의 하부 이하는 매몰되어 있다.
가슴 앞에 영락(瓔珞)의 문양이 보이고, 어깨와 팔 부분에도 화문(花紋)이 보인다.
불상의 전체적인 조법은 고졸(古拙)하고 토속화된 경향을 띠고 있다. 전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본래의 높이는 약 11자반(380cm)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높이는 337cm, 어깨 폭은 118cm의 규모이다.
❍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 石佛立像) 향토유적 제15호,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364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 菩薩立像) 옆에 위치한 미륵불(彌勒佛)로, 화강암 1석으로
조각하였으며, 수법이 고졸(古拙)하고 토속화 경향을 지닌 석불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규모는 보살입상보다 작으며, 인상은 위엄이 깃들어 있다. 머리 부위에는
관모(冠帽)처럼 두정(頭頂)에 표식이 있고 눈•코•입이 가지런하며, 귀는 짧고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없이 화문(花 紋)으로 보이는 넓은 띠가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으로 양팔에 걸쳤는데, 좌우에 늘어진 소맷자락에는 각각 3개의 의문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무릎 부위 하단부부터 매몰되었는데,
현재의 높이는 260cm, 어깨 폭은 79cm의 규모이다.
석불 앞 시멘트로 조성된 제단석(祭壇石)은 『을사년(乙巳年) 정월십사일(正月十四日) 아양동일동
(峨洋洞一同)』이라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1965년 1월 보수(補修)때 제작된 것임을 알수 있다.
♲ 안성천에서 그리 멀지않은 삼거리에서 보이고 아양주공 1차아파트가 북쪽을
울타리처럼 막고 있다. 석불이 있는 곳은 주차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작은 터를
콤팩트하게 다듬어 보살입상과 석불입상을 나란히 모셔 놓았다.
2부에서 다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