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유적지(원곡,대덕,시내 및 보개면)(2018.04.05)-2
⑤ 안성낙원역사공원 소재지: 안성시 낙원동 609-5
안성 낙원역사공원의 원래 이름은 안성공원이다. 이곳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6년 이곳에 수백 년 된 나무가 울창하고 연꽃 피는 연못과 동일정이라는 정자
1개소가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원 및 피서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공원의 위치가
안성경제의 중심인 시장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안성천이 흐르고 있어서 늘
풍요로운 공간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현재 기록상으로 보면 근대적 공원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부터이다.
1926년 이전에 공회당도 들어서 당시 한참 활발하던 각종 시민단체의 집회와 운동회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23년 이곳에 정구장이 있었고 기호정구대회가 개최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공터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 및 문화의 공간으로
이용되어 그네뛰기, 활쏘기, 널뛰기 등 민속행사와 씨름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안성공원 내에는 수목이 울창한 중에 조그마한 정자 하나가 있을 뿐 아무 설비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지역유지의 기부로 정자 세 개를 짓고 죽산에 있는 석불과
보개면에 있던 고탑 등을 옮겨오고 일방으로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는 등
면목일신하게 되었다 한다.
해방 후에도 안성공원은 시민의 휴식공간이자 각종 행사 및 집회장소로 계속
이용되었고, 1969년 동본동에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79호인 오명항토적송공비를
옮겨오는 등 비석도 추가로 이건하거나 설치하여 비석군의 규모도 커져갔다.
이처럼 안성공원은 안성의 중심적 문화공원이었으며, 일제의 철폐계획을 주민들의
단결로 지켜내고 주민들의 모금활동으로 근대적 공원으로 조성해서 유지해 온
역사적인 공원이다.
현재는 약 11,599제곱미터의 부지에 연못, 분수대, 놀이기구들이 들어서 있으며
석불좌상과 석탑 49기의 비석과 같은 문화재, 소설가 이봉구 문학비 등의 문화적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조선 후기의 문신인 오명항선생(1673~1728)이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안성의 군관민이 세운 송공비이다. 오명항은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손자로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공부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후에는 부수찬,
이조좌랑, 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쳤다. 붕당정치로 소론이 실각하자 관직을 그만 두었다가 소론이
다시 집권할 때 벼슬길에 올라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경기•
충청•전라•경상 4도의 도순무사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였다.
비는 네모진 받침 위에 둥글게 처리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비문은 당시 종사관인 우의정
조현명이 짓고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글을 썼으며, 대제학 이광덕이
전액(篆額: 비 몸돌 상단부에 새겨져 있는 비석의 명칭)을 썼다.
❍ 안성공원 석조광배(安城公園 石造光背) 향토유적 제9호
이 광배는 화강암 1석으로 조성한 고려시대의 석조광배로 죽산에서 출토된 것을 수습하여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갖춘
보주형의 광배(光背: 불상 뒤의 둥근 빛)로 주변에는 화염문(火焰紋)이 돌려져 있고, 상면에는
연화좌(蓮華坐: 연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위에 큼직한 화불(化佛: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변화한 것) 1구가 조각되어 있다. 신광에는 인동초문(忍冬草紋: 덩굴풀이 꼬여
뻗어나가는 모양의 무늬)이 조각되어 있으며 광배의 높이는 110cm, 중심 폭은 102cm이다.
또한 광배 앞에는 16판의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는 지름 90cm, 두께 13cm의 8각 연화대좌
(蓮花臺座: 연꽃이 조각된 불상 받침대)가 있다.
❍ 안성공원 석불좌상(安城公園 石佛坐像) 향토유적 제8호
죽산면에 있던 석불부재를 모아다가 현 위치에 옮겨놓은 것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흔적이 보이나
보존은 양호한 편이다. 화강석의 광배(光背: 불상 뒤의 붉은 빛)와 대좌(臺座: 불상을 안치 하기
위한 대)를 갖추었으나 원형인지는 알 수 없다. 광배는 1석으로 조성된 거신광(擧身光)으로 둘레
가장자리에 화염문(火焰紋)이 있고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원좌 (圓座)
주변에 단엽연화문(單葉蓮花紋) 12판(瓣)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밖으로 2중의 테로 두광을 갖추었다.
그 사이에 운문(雲紋)이 있으며 신광(身光: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의 2조선(二組 線) 사이에도
운문이 있다. 광배의 높이는 157cm이다.
화강석 불상은 목과 오른쪽 어깨, 그리고 좌측 무릎 일부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을 갖추고 있으며,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털)과 상호(相好: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는 마멸이 심하고 옷 문양은 유려한 편으로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다. 좌상의 높이는 121cm이다. 대좌(臺座)는 8각의 하대(下 臺) 위에
복련(覆蓮)을 조각했으며 중대석(中臺石)은 없고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은 단엽(單葉)내에 화변
(花辨)의 장식이 있는 2중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 앞에는 석등대석(石燈臺石)으로 추정되는 연화대석(蓮花臺石)이 놓였으며 방형(方形)의 지대
(地臺)위에 거의 방형으로 가늘고 긴 복변연화대석(覆辨蓮花臺石)이 있다. 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안성공원(安城公園) 삼층석탑(三層石塔) 향토유적 제18호,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5
이 석탑은 1932년 보개면에서 석탑부재를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탑은 갑석과
삼층의 탑신부만 남아 있다. 1층 탑신석 남쪽 면에는 문비의 흔적이 있으며, 나머지 삼면에는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갖춘 좌상(坐像)이 1구씩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석에만 우주(隅柱: 모퉁이 기둥)가 모각(模刻)되어
있고, 2층과 3층 옥개석의 형식은 같으나 3층 옥개석은 아래층에 비해 두께가 얇고 반전(反轉)도
상대적으로 약하다. 2층 옥개석 상면은 3층 탑신석의 일부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석탑의 전체 높이는 208m이며 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약간씩 비를 뿌리는 날씨 12시를 넘긴 시간은 여유로운 관람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부지런히 설명서가 붙어있는 유적을 위주로 서둘러 다녔다.
안성시민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기에는 다소 면적은 좁더라도 아주 좋을 것 같았다.
서둘러 이곳 저곳을 보고 전체적인 설명을 한 공원의 현황을 보았으나 소설가 이봉구의
문학비는 보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일행들의 뱃속에서 신호음이 연속되어 식당으로
가면서 극적루는 차창으로 바라보며 통과해 미리 파악했던 식당 '박기 완의 함흥냉면과
갈비'로 달려가 갈비탕으로 배를 채우고 영평사로 향했다.
⑥ 영평사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신장길 79-42
영평사는 사찰의 년륜이 짧으나 故박정희대통령 추모관을 매우 큰 규모로 꾸며놔 친구들과
벌써 두 번째, 그러니 세 번째의 방문인 곳이다.
「영평사 석비(石碑)의 글 [“침묵을 깨고 나투신 미륵와불 석가모니 부처님의 뒤를 이어
56억7천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다는 미륵부처님! 2004년 불사도중 정림스님의
기도 중에 영험을 얻어 오랜 세월 땅속에 계시던 미륵와불이 침묵을 깨고 영평사 기도도량에 나투시게
되었다. 현재의 여신상 미륵와불은 길이 약 12m 몸둘레 약 9m의 발견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불자 여러분! 중생이 쌓은 죄업이 1천 2백겁동안 생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했으니 도솔천과
맞닿는 이곳 영평사 와불과 인연되어 한량없는 복을 누리십시오.」
♲ 대웅전을 먼저 들려 예를 갖추고 빗발이 한층 굵어지는 가운데 3층 추모관으로 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그 분의 재임시절을 회고하고 내려와 다음 행선지인 굴암사를 향했으나
먼저의 네비길이 아닌 고삼저수지를 아래로 끼고 돌아서 연 꽃마을도 지나며 새로운 관광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⑦ 굴암사(窟岩寺)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진현리,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미륵전 산신각 요사채가 있고, 유물로는 마애석불 2위와 석탑
부재 등이 있다. 마애석불은 미륵전 안에 1위가 있고, 미륵전 옆애 1 위가 있다. 둘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 부재는 기단부가 없는 것으로 조선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미륵전 안에 있는 마애불은 화강암에 새겨 만든 불상으로 높이 3.5m이며, 지름 2m의 두광
(頭光)이 있다.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전 바깥에 있는 마 애불은 좌불로 높이
3.3m이다. 암벽 전면에 배치되었고, 부분적으로 닳아 없어진 흔적이 있으나 원형은
살펴보기에는 충분하다. 머리에 육계가 있고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이 있다.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by 두산백과
❍ 굴암사마애여래좌상(窟岩寺磨崖如來坐像) 향토유적 제11호, 소재지: 안성시 대덕면 진현리 산26
거대한 화강암의 암벽에 조각한 불상으로 전실(前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다. 암벽
동쪽에 양각된 이 마애여래좌상은 큼직한 원형(圓形)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으나,
약 30년 전에 지은 보호건물로 인하여 그 일부가 가려져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가 있으며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눈•코•입이 정제되었고
양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으로
의문(衣紋)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수인(手印)은 엄지와 검지로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지었으며 왼손은 무릎에서 약간 들고 있다. 양 무릎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으며 의문은 양팔과 무릎에서 흘리고 있다. 마애불의 전면에 백색칠을 해 놓았고, 현 좌상고
(坐像高)는 354cm, 두광경(頭光徑)은 200cm이다.
❍ 굴암사마애선각좌불상(窟岩寺磨崖線刻坐佛像) 향토유적 제12호, 안성시 대덕면 진현리 산26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바로 옆 암벽(巖壁) 전면에 걸쳐 선각(線刻)으로 거대하게 조각하였다.
부분적으로 머멸된 흔적이 보이나 원형(原形)을 살피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윗부분은 마멸이
심한 상태이지만 머리 위에 육계(肉髻)가 있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양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법의
(法衣)는 통견으로 의문(衣紋)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랫부분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데, 그 위에 법의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수인(手印)은 마멸되어 확실하지 않다.
불상(佛像)의 실측치는 전체 높이 417cm, 견폭 284cm이다.
♲ 불교TV에서 방영된 굴암사를 아내가 안성에 있는 절이라기에 찾아 보았고, 평소
지나다니던 길에서 멀지않은 곳이었는데 이제사 알게된 것이 어찌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곳이다. 나는 사곡동을 근 1년여 출퇴근하며 지났던 길이니까 그당시에
알았다면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한 곳이다. 헌데 향토유적의 관리는 어디서 하는가? 위의
안내글은 다른 분들의 안내판이 깨끗할 때의 사진에서 인용 했다. 겨우내 눈보라에
얼었다가 녹았다가 손상이 되었다손 치더라도 온갖 꽃들이 자태를 뽐내는 때는 안내문
정도는 정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