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삼년산성
삼년산성(三年山城) 사적 제235호, 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마립간 8년(486)에
아찬실축이 일선군(一善郡)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규모 수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축성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완성하여 삼년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삼국 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654~661)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918~943,재위)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둘레 1680m, 최고높이 22m, 폭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다수의 건물터가 남아있고, 산성 인접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반원형 치성과 성내 배수를 위한 수구 등 특이한
축성양식과 축성 및 수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미지 인접 암각자 군에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김생의 글씨체로 전해오고 있다.
✍ 정작 입구에는 화사한 꽃들만이 산성과 함께 할뿐 한가롭기 그지없다. 역사적으로는
매우 오래된 성인데 평가는 별로인 듯하다. 스틱을 가져오지 않아 힘겹게 오르니
서문지와 암각자 그리고 삼년산성 전체배치도가 우리를 맞이한다.
✾ 서문지 [삼년산성의 주 출입문으로 추정되는 서문지는 산성 문지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 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낀 지점의 북쪽
경사면에 있 어 성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또한
서문지를 중심으로 남북 으로 2개의 치성이 배치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80년 보은지역의 대홍수로 후대문지 아래층에서 1차
문지로 추정되는 자취가 노출됨에 따라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서문은 2단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차 문지는 기둥 홈과 문설주 홈, 문확 홈이 파인 신방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 2,250m,
폭 422cm의 규모로 되어 있다. 특히 문지방석에서 폭 166cm의 마차 바퀴 마멸 흔적이
발견되어 무척 큰 마차가 통행하였음을 일 수 있으며 일반적인 성문의 구조와 다르게 외부로
열리는 특이 한 구조로 되어 있다.]
✾ 암각자(岩刻字) [삼년산성 내 연못 맞은 편 암석지대에 새겨진 글자들을 말한다. 가장
아래 부분에는 아미지(蛾眉池), 윗부분에는 유사암(有似巖)과 옥필(玉筆), 그리고 보은사
쪽 암벽에 남술 (南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 가운데 ‘아미지’는 규모도 크고,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당 초 연못이 점차 줄어들어 서쪽 성벽 근처에 마치 반달 모양으로
남아 있던 모습을 보고 새긴 것 으로 짐작된다. 높이 2m, 너비 3.5m 크기의 수직암벽에
높이 66cm, 폭 19cm로, 신라의 명필가 김생의 글씨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미지’가
새겨진 암석 위에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평지가 있는 데 이곳에는 산성 경관을 조망하거나
적을 감시하려고 지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사적 제235호 삼년산성(三年山城) 전체배치도
①현위치/화장실,②서문지,③아미지,④암각자,⑤안내소/화장실,⑥보은사(報恩寺),⑦남문지,
⑧남동치성,⑨동문지,⑩북동치성,⑪서북치성
✍ 서문지에서 서북치성으로 오르는 길은 정비된 나무 계단길이 가파르다. 차근차근
쉬엄쉬엄 올라 어느 분의 묘역에서 뒤돌아 보니 서문을 보호하려는 서문의 남북으로
치성이 배치되어있고, 서문지를 출발한지 14분만에 서북치성에 닿아 북문지를
너머멀리 북동치성이 보인다. 서북치성에서 잠시 내려서니(6분) 북문지이다.
✾ 북문지(北門址) [북문지는 성문 밖으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어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성문 양식으로 보았으나, 발굴조사 결과
차단벽으로 추정되던 시설은 후대에 축조된 치성으로 밝혀졌으며 현재의 성문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북문지 입구에는 처음 쌓은 성벽이 붕괴된 후 성벽의 채움석을 정리한 후 개구부(開口部)를
설치 하였고, 바닥면은 바깥쪽으로 경사지도록 하였다. 규모는 폭은 3.5~3.6m, 길이는
7~7.5m에 이르 며 문구부 안쪽으로 성 안으로 통할 수 있는 6m 너비의 계단이
1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후대에 조성된 치성은 처음 쌓은 성벽의 바깥 면에 빗대어 축조한 것으로 길이 6.6~7m,
너비 12~13m의 규모이며 양쪽 측벽과 모서리 부분이 심하게 붕괴되어 있다. 또한 치성
상부에서는 4 개의 초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는 정면 5~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북문지까지 내려서는 길은 다소 가팔랐다. 북문지에서 우측으로 보은사가 있으나
고찰 같이 보이지 않아 곧바로 북동치성으로 오르는데 가팔르지는 않았으나 나에겐
힘에 부쳐 잠시 의자에서 쉬었다가 북동치성의 전망대로 계단을 밟아 오르고, 이곳서는
남동치성이 잘 보인다. 성내 길가의 벚꽃은 화사하게 개화하고 있는데 뱃속의 신호는
자주 온다. 서서히 내려서는 길의 동문지에 다다르니 뱃속이 참기 어려운 상태이다.
부리나케 동문지를 본 후 숲속에 지뢰를 묻고 나왔다.
✾ 동문지(東門址) [동문지는 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에 있으며, 이곳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수구(水口)가 있다. 동문지의 원래 모습은 성벽의 안쪽 약 절반 정도가 다른 곳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ㄹ’자형으로 돌아야만 통행이 가능한 형태였다. 지표에 남은 모습을
보아 동문지는 적이 공격해 올 때 방어를 겸비한 특이한 성문 구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두차례의 발굴조사결과 동문지는 적어도 서너 차례에 걸쳐 수축하고 개축했으며 ‘ㄹ’형 구조는
후대에 문지 조성 과정에서 축조된 구조물로 밝혀졌다.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 인접 성벽 위쪽에서는 삼국시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이
발견되었고, 안쪽의 평평한 곳에서는 방아확, 돼지 모양의 기와조각, 목제 망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구 분 |
최초문지 |
최종문지 |
성체 |
보충성벽 |
여장 |
수구 | |
규모cm |
길이 |
1050 |
1355~1400 |
||||
넓이 |
501 |
350~390 |
1550 |
11 |
43 | ||
높이 |
2100 |
580~600 |
70~80 |
63 |
✍ 동문지의 밖에는 소로길이 뚜렷이 나 있다. 남동치성으로 가는 길 주변의 성벽은
많이 허물어진 곳이 많았다. 남동치성애서 북동치성은 뚜렷하나 서북치성은
산봉우리로 대신하는 듯하다. 이곳 남동치성 부근에도 분묘 이장을 권고하는 표지가
있고 보은 대야리 고분군을 안내하는 표지가 있어 밖을 보지만 가까이는 아닌듯 하다.
✾ 보은 대야리 고분군(報恩 大也里 古墳群)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산 23
이 고분군은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보은읍 어암리, 대야리, 성주리, 길상리, 풍취리,
강신리와 탄부면 평각리에 분포하고 있다.
오정산을 중심으로 비탈진 지역 곳곳에서 볼수 있으며 600ha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봉분의 지름이 15~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168개소, 10m 내외의 중형 고분이 141개소, 소형
고분이 1,335개소로 모두 164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몇 개의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며 대야리와 평각리 경계 지역에서는 신라 고분군 중
지름 20m에 달하는 대형 봉토분이 많이 조사되었는데 이렇게 많은 수가 조사된 유적은 영남 지방을
제외하고는 보은 삼년산성 고분군이 유일하다.
고분의 구조와 주변에 수습된 유물로 볼 때, 삼년산성이 축조 시기가 5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사이에 신라인이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야리 고분군은 산성과 고분군이 함께 분포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중부지역 최대의 고분
군으로서, 신라 묘제와 토기편년 연구 및 신라 지방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남문지로 이어지는 성벽도 많은 허물어짐이 밖으로도 안으로도 많았다. 남문지로
가면서 성내의 보은사도 보이고 벚꽃도 화사한 모습을 보이며 서문지도 보인다.
✾ 남문지(南門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 끝에 위치하며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 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지은 치성(雉城)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 문 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지의 규모는 너비 3.6m, 길이 10.8m이고 높이는 서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약 5m, 동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9m에 이른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으로 두세 차례 개축하다가 결국에는 문 입구를
폐쇄하였으며, 남문지 부근의 성벽도 두세 차례 개축했다. 문지 터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바닥
확쇠 한 쌍과 문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못과 철제 광두정이 출토되었다.
✍ 남문지를 지나서는 말끔히 정비된 산성을 따라 간간히 설치된 계단을 내려선다.
약 1시간 반의 성벽을 완주하고 나니 서문지에서 약 100여m의 보은사도 기권하고
보은을 떠났다. 차를 세운 곳까지 와 또 시동이 걸리지를 않는다. 보험사에 전화하고
시동을 걸어줄 차와 통화를 하고나서 다시 시동을 걸으니 엔진이 돌아간다. 급히
시동을 해 줄 차에 전화를 해 출동을 취소시키고 출발하며 생각이 문득 난 청주의
상당산성으로 향했다. 자동차의 시동 안걸림은 결국 후에도 발생빈도가 높아지며
전자회로판을 교체함으로써 해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삼년산성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