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상주지역 관광(2018.11.12.)-1
상주는 나에게는 남산의 산행 및 뒤풀이, 갑장산 등산, 고교 동창들의 경천대관광
그리고 감을 산다고 전 사벌왕릉을 다녀 감을 산 네 번의 방문이 있던 곳이다.
낙동강 1,300여 리 물길 중 강의 이름이 되었을 정도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경천대는
깍아지른 절벽과 노송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하늘이 스스로 내렸다고 해
자천대(自天臺)라고도 한다. 그러나 채득기가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
이란 글을 새긴 뒤 경천대로 바꿔 불렀다.
조선조 이 지역 출신의 선비인 우담 채득기 선생이 지은 정자인 무우정(舞雩亭)이 절벽 위에
위치한다. 무엇보다 경천대는 절벽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대단히 멋진 곳으로
휘어진 소나무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과 강변 기암괴석을 볼 수 있다.
경천대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조선시대 장군 정기룡이 하늘에서 내려온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정기룡이 바위를 파서 말먹이통으로 쓰던 유물이 남아 있다.
상주에서는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유명하며 김상헌과 이식 이만려 등의 문객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옥주봉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멀리 주흘산(1,106m)과 학가산, 낙동강과 백화산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삼림욕장으로
알맞다. 인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 25호로 지정된 전사벌왕릉과 전고령가야왕릉
(경북기념물 제 26호), 충의사 등 문화재가 많다.
❀전 사벌왕릉(傳 沙伐王陵) 경상북도 기념물 제25호,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산44-1
이 능은 상주에 있었던 소국인 사벌국의 왕릉으로 전하고 있다. 주변에는 삼국시대 고분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장축직경 16m, 단축직경 14.5m, 높이 4.5m인 동서향의
타원형 봉토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이 왕릉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서편에
있는 신도비에는 상산박씨(商山朴氏)의 시조인 신라 경명왕(景明王) 아들 박언창(朴彦昌)이
신라말 (917)에 사벌군(沙伐君)으로 책봉되어 있다가 후삼국 동란기에 사벌국을 세웠고 이 능이
그의 묘라는 내용이 있다.
그동안 황폐된 체 돌보지 않다가 조선 현종(顯宗) 이후 누차에 걸쳐 국가에서 수축 또는 보수를
해 왔고, 1825년 상주목사 민종열(閔宗烈)이 현재와 같이 보수하였다. 인접한 헌신동 고분군은
5 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하는 큰 석실 봉토분들이 밀집 분포되어 있어서 당시 이 지역 세력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尙州 化達里 三層石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높이는 6.24m이며, 건립 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8 매의 장대석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탑을 세웠는데, 기단부는 단층으로서 하층기단 면석을
생략한 형식이다. 이는 상주나 문경지방에 분포된 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대석은 마치 하층기단의
덮개돌과도 같이 그 상면에 높직한 원호와 낮은 각형의 핌을 조출하여 그 위에 기단 면석을 받고
있으며, 상면 네 귀퉁이에는 약간의 경사로 합각이 뚜렷하다. 기단 면석은 8매석으로 짜여지고 있고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이 정연하다. 기단 덮개돌은 다른 석탑에 비하여 이례적으로 넓어서
신부와 면석보다 상당히 내밀어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현재 기단 덮개돌 위에 있는 목 없는
불상 1구와 석탑 부재는 이 석탑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〇새로운 소국, 사벌국의 왕릉은 상산박씨의 문중으로 대접받고 있어 매우 단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지역민의 마음에는 사벌국이 각인되겠지만 전사벌왕릉을 보기
이전까지는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역사가 짧기에 단 하나의
능으로 대변되는 사벌왕릉은 1대로서 마침표를 찍어야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천대(驚天臺; 일명 自天臺)
사벌국 옛 땅에 자리한 경천대는 하늘이 지은 절경이라 자천대로 일컬어졌으며, 대 밑에 기우제
터 우담(雩潭)이 있어 상산(商山)의 신성지였다. 이 땅에 최초로 우담 채득기(1604~1647)선생이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은거하였으니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나던 해요, 그런 까닭에
승명사상으로 자천대 정상에다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 여덟 자를 새긴
경천대비를 세움에 후세 사람들이 자천대를 경천대라 불렀다. 우담선생은 충절가의 후예로 학문에
뛰어나 빙고 별좌에 제수된 징사(徵士)요, 신묘한 침술로 국난(國難)에 특채된 명의(名醫)였다.
1637년 세자와 대군 등이 청의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잡혀갈 때 재학지사(才學之士)로 천거되어
왕자들의 몸을 보호하란 명을 받았으나 그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하다가 도리어 유배되었다.
1639년에 방면되어 재차 부르니 나라 위해 목숨 바칠 결연한 각오로 충신연주지사 <봉산곡(鳳山曲)>
[일명 천대별곡(天臺別曲)]을 짓고 섣달에 심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봉림대군(효종)과는 군신
이상의 지기(知己)로서 사생을 같이 하며 망국민의 굴욕과 울분•복수 일념의 충분의기(忠憤義氣)를
시로 주고 받아 한국 시사(詩史)에 희귀한 시첩(試帖) <군신언지록(君臣言志綠)>도 남기었다. 1645년
환국한 뒤 봉림대군의 만류에도 굳이 경천대로 돌아왔음은 초지일관 하려는 신하의 뜻이었고, 충신의
사는 곳이나마 보고싶어 화사(畵師)를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 갔음은 임금의 뜻 둠이었다. 실로,
경천대야 말로 지사(志士)의 은거지로서 그 입구에 선생의 손때가 묻은 소연분[小蓮盆
(연을 기르는 그릇)], 관분[盥盆 (세수대야)], 약분[藥盆(약을 제조하던 그릇)]이 고스란히 남은
유적이요 가사문학의 산실이며 충신의 입절지(立節地)요 효종의 사택지(思澤地)로서 자연과 인문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낙강제일경(洛江第一景), 상주의 국민관광지이다.
❀정기룡장군(鄭起龍將軍) 기마상(騎馬像)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출신지는 곤양(昆陽)으로 처음 이름은 무수(茂壽)로
1586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起龍)으로 이름을 고쳤다.
임진왜란 때 거창, 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령에서 적장을 생포하고 성주⦁합천⦁초계⦁의령⦁경주⦁울산을 수복했다.
1562년(명종 17) 태어났고 1622년 통영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의 묘소는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경북기념물 제 13호)에 있고 상주 충열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다.
2부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