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여행-1
홍성은 필자가 20세기 말 1년여 직장 관계로 드나들어서 그리 낯설지 않으며, 산을 즐겨
다닐 때 용봉산은 단골 산행지의 한 곳이었으나 20여 년이나 지난 홍성의 발전과 뒤늦은
역사의 탐구에 빠져 찾아본 홍성지역은 의외로 역사적인 분들의 출생지로 또 종교적으로
박해의 정도가 매우 큰 곳을 알 수 있었으나 당초 계획했던 곳 이외의 추가적인 사안들의
증가로 매우 수박 겉할기 식으로 다녀왔다. 부족한 부분이 많음을 자인하며 다녀온
기록을 정리해 본다.
제 1경 용봉산[홍북면 용봉사길 1,2 일원]
산세가 용의 형상과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봉산이라 부른다. 병풍바위, 거북바위, 두꺼비 바위 등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용봉사, 최영장군 활터가 있다.
제 2경 홍주읍성과 여하정[홍성읍 아문길 27]
홍주읍성은 홍주목 관아 보호와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초기에 축성되었다. 홍주성은 당초
1,772m였는데 현재는 810m만 남아 있다.
제 3경 만해한용운선생 생가[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당, 생가, 만해체험관, 민족시비 공원이
있다.
제 4경 그림이 있는 정원[광천읍 충서로 400번길 102-36][장곡면 장곡길 438번길]
76,364㎡의 산비탈을 이용하여 조성한 개인수목원으로 각종 수목 및 화훼류 등 1,200종 6만 여 점으로
조성되어 있다. 특히 봄철에는 수많은 꽃들과 분수, 연못들이 어우러져 마치 꽃의 천국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곳이다.
제 5경 오서산(791m)[광천읍 오서길 351번길 8-10]
홍성,보령,청양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해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이며, 은빛의
억새풀이 장관을 이룬다.
제 6경 남당항[서부면 남당항로 218]
천수만의 대표적인 항구로서 각종 수산물의 집산지이다. 사시사철 우럭,광어 등 싱싱한 활어회를 먹을
수 있다. 특히 봄에는 쭈꾸미와 갑오징어, 가을에는 대하•전어•꽃게, 겨울에는 새조개를 맛볼 수 있다.
제 7경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갈산면 백야로 564번길 11]
일제강점기시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이곳에는
기념관과 백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제 8경 궁리포구[서부면 남당항로 689]
천수만을 앞에 두고 있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의 해지는 모습은 섬들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과 같다.
1) 다녀온 날: 2019. 01. 25 09시 35분~17시50분
2) 여행요약: 집-1시간 25분/110.00km-김좌진장군생가지/24분간-33분/7km-만해 한용운
선생생가지/21분간-29분/7km-백야김좌진장군묘-26분/18km-홍성천하상 주차장/
2시간 49분간[홍주읍성, 홍주아문, 조양문]-6분/1km-홍주의사총/16분간
[순교성지(생매장터)]-16분/10km-최영장군사당/5분간-8분/1km-성삼문유허지 /10분
-2시간/110km-집 [총주행거리 264km,통행료 6,800원]
3) 다녀온 곳들의 이해
1. 김좌진장군(金佐鎭將軍)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 1889~1930)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이다. 장군은 1889년(고종 26 년)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였다. 1907년 호 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문학을 교육하였다.
무관학교를 세워 항일에 힘을 기르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2년 6개월(1911~1913)의 옥살이를 한 후 압록강을 건너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압록강을 건너며 지은 시는
아래와 같다.
「칼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 끝에 서릿발 차거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에 앞장섰다. 홍범도 장군과의
작전 성공이후 시베리아로 갔다가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
(新民府)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에 올랐다.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장군의
장례식은 그 곳 교포들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무덤은 원래 1940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된 것을 1957년에 장군의 선산(先山)으로 옮긴 것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2) 만해한용운선생(萬海韓龍雲先生)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879년
(고종 16)에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서 태어났다. 만해는 1904년 강원도 인제
내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으로 출가하여, 1905년 백담사(百 潭寺)에서 득도하였다.
계명(戒名)은 봉완(奉琓)이고 법호(法號)는 만해(萬海),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獨立宣言書)의 공약(公約)
삼장(三章)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시집 “님의 침 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抵抗文學)에 앞장서고 민족혼(民族魂)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入寂) 하니
서울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만해는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佛敎)를 통한 애국청년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워 일으키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되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丹楓나무 숲을 향하야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의 꼬같이 굳고 빛나든 옛 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微風에 날아갔다오
날카로운 첫키스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念慮하고 警戒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離別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離別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念慮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黙을 휩싸고 돕니다.」
망우동 소재 묘소의 사진은 블로그의 다른 분들 사진을 인용합니다.(아래,위)
2부로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