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상주,김천,군위,칠곡)에 함께한 여행-1
조선 후기 우리 민족 스스로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수많은 고초와 순례가 이루어진 현장을 방문해 보고 그 숭고한 희생의 덕으로 풍요와 포교가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는 순례!
우리 조상들은 왜 위정자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살육했었는지, 당했는지?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만 너무 풍요를 누리며 굴러든 풍족함에 빠진 건 아닐까 하며 순교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배우는 자세였던 것 같다.
상주읍성 옥터 유적(尙州邑城 獄址遺蹟) 지정: 비지정/ 소재지: 상주시 성동로 17
「삼국사기」는 687년 사벌주에 성(城)을 쌓았다고 처음 전한다. 상주옥(獄<囹圖>)은 「경상도속찬 지리지」가 1385년(우왕 11) 축성했다고 전하는 상주읍성의 남문인 홍치구루(弘治舊樓) 바깥에 위치한 부속 시설이다.
조선시대 초기 8도 체제가 확립되자 상주 목사(牧使)가 약200년 간 경상도 감사(監司)를 겸 하면서 상주는 경상도 감영(監營)이 되었는데 늦어도 상주 옥은 이때 이미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후기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100여 년의 박해 기간 중, 특히 1827년(丁亥)박해와 1866년(丙寅)박해 당시 상주 과날이던 상주시 화남면•문경시 문경읍, 마성면, 동로면, 모전동과 그 부근•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영동군 황간면•제천시 월악면 덕산리 등지에서 체포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순교(致命殉敎)하였다.
상주 옥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성첩(城堞)과 문루(門樓)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김천시내를 통과하다가 본 인공폭포
이 초가(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번지)는 2009년 2월16일 선종하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시던 곳이다.
추기경의 집안은 원래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 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이신 김요안(金要安) 공은 광산 김씨로 병인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 했고, 조모 강말손(姜末孫)여사는 남편의 순교 후에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갖은 고생에도 교우들의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였으며, 당시 유복자로 추기경의 부친이신 영석(永錫, 요셉)이 태어났다.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김보록 신부(대구교구 설립자)의 일을 도왔으며, 동학난을 만나 칠곡 장자동 옹기굴로 피신하게 된다. 이때 뮈텔, 김보록 두 신부의 중매로 대구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달성 서씨 서용서(徐用瑞)회장의 딸 중하(仲夏,마르띠나)와 혼인을 하였다. 이 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이다.
그후 왜관 평장목, 김천 지대골의 옹기굴, 대구 남산동을 전전하던 추기경의 부모는 칠곡 신나무골과 선산을 거쳐 1922년 4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군위에 들어온 해인 1922년 5월 8일(음력)에 낳은 막내가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추기경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추기경이 8살 되던 해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옹기와 포망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 초가에서 공소를 열었다.
추기경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지금 대구가톨릭대의 전신인 성 유스티노신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 집에서 형인 동한(東漢,가롤로) 신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앙의 꿈을 키웠으며, 생전에 가끔 이 집을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상하셨다.
가실성당에서~
1. 1박 2일의 요약
(17일) 조원동성당앞/06시00분-동수원TG-영동•경부-옥산휴게소/07시15분~29분(95.2km)-경부• 당진영덕고속도로-남상주TG/08시21분-상주 옥터성지/08시37분~09시16분(94.7km)-남성동 성당 /09시25분~35분(0.6km)-3번국도
위,아래: 상주읍성 감옥터 찾아가는 길 모습
-김천황금성당/10시30분~11시18분(36.7km)-군위축협프라자/ 12시43분~13시39분(70.6km)-김수환추기경생가/13시47분~15시59분(3.9km)
-한티순교성지/16시 51분~17시30분(44.5km)-원(회•초밥•물회)식당/18시22분~19시41분(12.2km)-유진모텔/20시01분 [동명성당•동명지 걷기/20시25분~21시35분] 주행거리 약 358.4km
저녁 먹으러 간 원식당 골목 풍경, 영농자재센터 골목
(18일) 새벽 동명지산책/04시55분~06시40분-조식/07시00분~30분-가실성당/08시20분~11시14분 (24.9km)-신나무실성지/11시28분~12시06분(7.3km)-가나안덕/12시45분~13시48분(23.0km)-버스 -45고속도-연풍TG/15시45분(116.2km)-37•21국도-40•35고속도-덕평휴게소/16시59분~17시11분 (약100km)-조원동성당 앞/17시55분(37.8km) 주행거리 약 309.2km 총주행 약 667.6km
가실성당 일찍 도착해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경청하는 순례단원들
위,아래:신나무실성지 이선이 엘리사벳 묘 앞에서 설명하는 현상근 단장님과 경청하는 순례단원들
2. 각 지역별 상세글
개괄적 들렸던 성지와 시설들을 보다 세밀히 기록해 봅니다.
1) 상주읍성 옥터 유적(尙州邑城 獄址遺蹟) 지정: 비지정/ 소재지: 상주시 성동로 17
「삼국사기」는 687년 사벌주에 성(城)을 쌓았다고 처음 전한다. 상주옥(獄<囹圖>)은 「경상도속찬 지리지」가 1385년(우왕 11) 축성했다고 전하는 상주읍성의 남문인 홍치구루(弘治舊樓) 바깥에 위치한 부속 시설이다.
조선시대 초기 8도 체제가 확립되자 상주 목사(牧使)가 약200년 간 경상도 감사(監司)를 겸 하면서 상주는 경상도 감영(監營)이 되었는데 늦어도 상주 옥은 이때 이미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후기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100여 년의 박해 기간 중, 특히 1827년(丁亥)박해와 1866년(丙寅)박해 당시 상주 과날이던 상주시 화남면•문경시 문경읍, 마성면, 동로면, 모전동과 그 부근•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영동군 황간면•제천시 월악면 덕산리 등지에서 체포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순교(致命殉敎)하였다.
상주 옥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성첩(城堞)과 문루(門樓)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상주읍성 옥터 유적(尙州邑城 獄址遺蹟) 지정: 비지정/ 소재지: 상주시 성동로 17
「삼국사기」는 687년 사벌주에 성(城)을 쌓았다고 처음 전한다. 상주옥(獄<囹圖>)은 「경상도속찬 지리지」가 1385년(우왕 11) 축성했다고 전하는 상주읍성의 남문인 홍치구루(弘治舊樓) 바깥에 위치한 부속 시설이다.
조선시대 초기 8도 체제가 확립되자 상주 목사(牧使)가 약200년 간 경상도 감사(監司)를 겸 하면서 상주는 경상도 감영(監營)이 되었는데 늦어도 상주 옥은 이때 이미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후기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100여 년의 박해 기간 중, 특히 1827년(丁亥)박해와 1866년(丙寅)박해 당시 상주 과날이던 상주시 화남면•문경시 문경읍, 마성면, 동로면, 모전동과 그 부근•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영동군 황간면•제천시 월악면 덕산리 등지에서 체포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순교(致命殉敎)하였다.
상주 옥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성첩(城堞)과 문루(門樓)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상주감옥터 박상근 마티아 순교성지
◎ 안동교구 첫 번째 복자: 박상근 마티아(1837~1867)
◎ 문경의 아전으로 칼레 신부의 피신을 헌신적으로 도우며, 복음을 전파하다가 상주 감옥에서 순교함.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복자로 시복됨
박상근 마티아는 신유박해를 피해 숨어든 충청도 지역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한 그는 숙모인 홍마리아와 친척 및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특히,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칼레(N. Calais, 133~1884)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은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칼레 신부를 문경읍내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숨어 있던 신부님이 이웃사람에게 들키자 다시 한실(문경시 마성면 상내리)로 피신하던 중 체포의 위험 속에 허기와 갈증으로 칼레 신부님은 마티아에게 돌아가라고 설득하였지만, 마티아는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다며 “신부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함께 죽겠습니다.”(칼레 신부의 서한 기록)하였다. 그러나 칼레 신부가 “마티아, 내가 말한 대로 하시오. 순명하세요,”하자 손을 잡고 울면서 통곡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그해 12월에 체포되어 이곳 상주감옥으로 끌려왔다. 죽음을 앞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니 밝혀진 기록에만 함께 순교한 교우가 20여명이 넘는다.
1867년 1월 상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상주 감옥 터는 안동교구의 첫 번째 복자 박상근 마티아가 신앙을 증거한 거룩한 땅이다. 2014. 8. 천주교 안동교구
상주읍성(尙州邑城) 돌(石)
조선시대 상주 읍성 감옥 터 주변에서 발견된 이 돌 2점은 매일수산을 경영하는 강신모씨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옥터 성지 조성의 뜻을 이해하고 기증하여 이곳에 전시하게 되었다. 이 돌은 당시 감옥에서 순교한 선조들의 믿음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19. 9.29 천주교 남성동 성당 옥터 성지 관리위원회
2) 남성동 성당(南城洞聖堂) 경상북도 상주시 왕산로 105(남성동 150-7)
남성동성당은 안동교구 소속으로, 1962년 서문동성당의 베네딕도회 경도범[엘리기우스] 신부가 현재의 대지 일부를
매입하여, 교회 건축가 알빈 슈미트 신부의 설계로 성당 및 사제관, 부속 건물 기공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1963년 11월 28일 왜관 대리구장 오도하스 아빠스의 주례로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주보성인으로 ‘구세주 예수’를 모시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활동하고 있다.
(by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종 표면에 적힌 글 풀이
주종(제일 큰 종) CHRISTE SALVATOR REGE NOS 구세주 그리스도님! 우리를 다스리소서
보조 종1(중간 크기 종) MARIA REGINA, COELI PROTEGE NOS 하늘의 여왕이신 마리아님! 우리를 보호하소서
보조 종2(제일 작은 종) SANCTE JOSEP INTERCEDE PRO NOBIS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소서
GLOCKENGIESSERFI ERDING 1963
이 종은 보조 종1이며 종탑에 있던 것을 2009년 2월14일 현 위치에 전시 봉헌합니다.
스탠드글라스가 경상도로 내려오니 한지공예로 해 더욱 한국적인 듯하다.
상주의 성지 사주읍성 옥터와 남성동성당까지 1편으로 합니다. 2편에서 김천 황금성당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