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 파주시(坡州市)-1

아름답지만~ 2017. 3. 29. 09:35

파주시는 경기도 북서부에 있는 시로, 1970년 미군기지 철수로 대규모 신도시의

건설이 시작된 곳이다. 1995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2000년대부터 인구가 급증했다.

북부에는 임진강이 연천군과 경계를 이루며, 하류에는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4개읍

9개면 7개행정동(22개 법정동), 246개 행정리(104법정리)가 있으며 면적 672.78㎢,

인구 423,321명(2015)이다.

시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2,사적11,천연기념물2),지방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7,

무형문화재2,기념물18),문화재자료8점,등록문화재5점이 있다.(by다음백과)

파주 유명관광지[1.제3땅굴,2.도라전망대,3.평화누리,4.임진각관광지,5.황희선생유적지,6.화석정,

7.헤이리예술마을,8.파주영어마을,9.오두산통일전망대,10.파주프리미엄아울렛,12.파주출판도시,

13.파주삼릉,14.공릉관광지,15.윤관장군 묘,16.용미리마애이불상,17.보광사,18.유일레저타운,

19.마장저수지,20.벽초지수목원,21.파주이이유적,22.감악산산림욕장,23.황포돛배,24.허준선생 묘]

평화의 돌[이 조형물은 전세계 전쟁터의 한과 슬픔이 서린 돌을 모아 만들었습니다.

세계 64개국 86개 전장에서 보내온 이 돌들이 새 천년에는 고통과 갈등을 넘어 민족화합과

인류평화의 디딤돌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0년 1월 1일 경기도 지사 임창열]

1. 파주 용암사(坡州 龍岩寺)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龍尾里 磨崖二佛立像)

대학교 시절인 1963년 양돈장 견학을 겸했던 방문지가 이 곳이니 53년만의 재방문이

되는 곳이다. 그때의 용암사는 기억이 없던 곳으로 보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규모의

사찰이었던듯 하며 마애이불상으로 오르며 눈에 익은 동자상을 스치며 계단길을 올라

마애이불상 앞에서 예를 갖추고 둘레를 돌아와 삼배를 올리고 내려왔다.

그렇게 오래된 방문에서도 칠층석탑과 동자상을 알아 본다는게 신기할 정도였고

안내글을 보니 더욱 감탄할 일이었다. 한 처사께서 신통한 미륵불이 계시다고,

특히 허리가 안좋은 분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해 보니 스페인 몬세랏대성당의 앞에

성조지동상처럼 어느쪽이던 나를 보는 듯해, 삼성각 미륵불에게 삼배를 하고 나왔다.

                                       삼성각 내의 미륵불, 몇년전 스페인 몬세랏에서의 성 조지상 인용

☸ 용암사(龍岩寺) 전통사찰 제87호(1988년10월25일 지정),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742-28

용암사는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위치한다. 고양시 벽제관(碧蹄館)에서 광탄으로 향하다

혜음령 고개를 넘으면 국가 보물 제93호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가람(伽藍)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고려 제13대 선종

(宣宗;1083~1094)때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을 조성한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약 900여 년전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 만들어진 11세기를 창건연대로 잡고 있다.

조선시대는 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전란에 의하여 한동안 절이 소실되었고, 근대에 들어

1930년대 절이 재창건 되었으며, 1935년 4월 대웅전 3칸을 재건하였다. 당시 장단군에 있던 장선환

대사가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수호하였는데, 한 때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던 사명(寺名)을 현재의

사명인 용암사(龍岩寺)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4년10월에 이승만대통령, 함부통령, 미대사 등 각계인사가 참석 칠층석탑과 동자상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대웅보전 앞뜰에는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이 재임기간에 1군단을 방문 후 유국준 외

참모들과 이곳을 다녀가시고 구국통일, 국태민안 각 한기씩 세우신 천일기도광명등과 봉덕사 종을 본

따서 제작한 범종(높이 187cm, 종구<鐘口> 115cm)을 안치한 범종각이 있다.(안내글 인용)

☸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磨崖二佛立像) 보물 제93호(1963년 1월21일 지정)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 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아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 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 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안내글 인용)

☸ 동자상과 칠층석탑에 관한 유래

구전에 의하면 고 이승만대통령 모친께서 용암사 쌍미륵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하여

고 이승만대통령이 탄생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1954년 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재임시에 용암사를 방문 참배하시며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칠층석탑을 세우셨다.

동자상은 정면에서 좌측의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칠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으나,

고 이승만대통령께서 4.19로 인하여 하야하시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신 후 재야관련단체들의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심하여 1987년 철거되어 종무소(요사채) 우측에 모셔 있던 것을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여 지금이라도 늦은 감은 있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여러

불자님들과 현주지 포운당 태공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모시다.(안내글 인용)

2. 황희(黃喜) 선생 유적지

① 황희 선생 묘역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92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 황희(尨村 黃喜;1363~1452)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 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으며 봉분의 규모 역시 크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과 향 로석 등의 석물이 있다.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고, 묘역 아래에 는 그의 업적을 기린 사적비와

1945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안내글 인용)

월요일의 휴관으로 쓸쓸히 돌아보았으며, 문화해설사의 안내가 있으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내가 평소 알았던 청백리의 안택을 비교적 여러 곳 둘러보고 나왔다.

② 황희선생 유적지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127

이 곳은 조선초기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황희(尨村黃喜;1363~1452) 선생의

유적지이다.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본관은 장수(長水) 로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판강릉대도호부사 군서(君瑞)의 아들이다. 1392년 고려 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관직에 나오게 되었다. 선 생은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세종연간에는

19년간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세종성세(世宗盛世)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문종 2년 (1452)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예장하고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유적지 내에는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조 1년(1455)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황희선생 영당과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위치하 고 있다.

본래의 영당 건물은 6.25전쟁 때 전부 불탓으나, 1962년 후손들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양식의 맞배집으로 복원하였고 영당 내부 중앙에 별도 의 감실을 두고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반구정(伴鷗亭)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는데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라는 뜻에서 이름 지었다. 정자 내부에는

미수 허목의 『반구정기(伴鷗亭記)』와 여러 개의 중수기 편액이 있다.

이외에도 월헌공 황맹헌 선생 부조묘,앙지대(仰止臺),경모재(景慕齋),방촌황희선생동상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황희 선생의 업적과 유품을 전시한 방촌기념관이 있다.

이 곳은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어 아예 출입구를 잠궈 놓아 발걸음을 허탕치고 되돌아

나올 밖에 방법이 없었던 아쉬운 곳, 특히 반구정은 아쉬웠던 곳이었다.

                                                          파주시의 1부

 

'국내 여행기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연천군(漣川郡)-1  (0) 2017.03.30
(1) 파주시(坡州市)-2  (0) 2017.03.29
결혼 47주년 기념여행( 2박 3일)-2  (0) 2017.03.27
결혼 47주년 기념여행( 2박 3일)-1  (0) 2017.03.27
삼남길 이어가기  (0) 2017.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