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원주지역 관광-3

아름답지만~ 2017. 11. 8. 18:51

[4] 운곡 원천석묘역(耘谷 元天錫墓域)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절의(節義)의 인물로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는 원천석의 묘역이다.

원천석은 1330년에 윤적(允迪)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자를 자정(子正), 호를 운곡

(耘谷)이라 하였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일찍이 국자진사(國子進士)에 합격하였으나

고려 말에 국정이 문란해지자 치악산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이색(李穡)과 교류하면서 시사(時事)를 개탄하였다.

운곡선생은 일찍이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는데, 이방원이 조선왕조 3대 왕으로

즉위하여 수차 출사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치악산 속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30여 년 동안 절의를 지키며 초근목피로 생활하였다. 선생은 위대한 스승으로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청량산인의 블로그에서 차입한 강림면 부곡리의 태종대

저술로는 회고가(懷古歌)와 운곡시사(耘谷詩史)가 전해진다.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國史)와 저촉된다고 하여 후손들이 소각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묘소는 무학대사(武學大師)가 정해준 봉요혈(蜂腰穴)에 썼으며, 꾸밈이 없이

소박하고 청초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일생을 청고(淸高)하게 살다간 선생의

선비정신을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원주역사박물관의 원주원씨 족보 한 장과 원천석 묘역

 

 

 

 

창의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로 알려진 원천석(元天錫; 1330~?)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선생에 대한 칭송은 조선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강원도 원주시 차원에서 “강원의 얼”, “원주의 얼”로

선양하고자 2006년 8월31일 사당을 건립하여 원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숭상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매년 양력 4월23일

운곡제(耘谷祭)를 봉행하고 있다.

운곡 원천석은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의 고둔치를 다녀오면서 알게되었던 태종

이방원의 은사이고, 계곡가에 자리한 태종대, 할미소 등을 안지는 근 20여 년전이다.

 그래서 묘역을 찾게 되었고, 시간이 촉박해 넓은 면적을 찾지는 못했다.

 

 

 

[5] 봉산동(鳳山洞) 천주교성당(天主敎聖堂)과 봉산동 당간지주(幢竿支柱)

1. 천주교 성당 강원도 원주시 봉산로 93

1972년 5월 26일 설립되었으며, 2012년 5월 새 성당을 종합건축사무소 한신에서

설계하고, 시공은 풍산종합건설(주)에서 연면적 619.02㎡의 건물을 봉헌한 곳이다.

봉산동 성당의 주보성인은 성가정이며, 수녀님들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이며

수원관구 관할이다. 새단장을 한지가 그리 오래지 않아서인지 깔끔한 분위였다.

 

 

 

 

 

2. 봉산동 당간지주 강원도 원주시 개봉교길 41(원주시 봉산2동)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나 뜰에 세우는 깃대[당간(幢竿)]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이며, 깃대에는 사찰의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혹은 부처 및 보살의

공덕을 기릴 때 깃발을 단다.

이 당간지주의 높이는 4.3m이며 아무런 장식이 없다. 두 개의 지주 중 하나는 원래

파손되어 없던 것을 복원하였다. 지주는 네모꼴로, 위로 올라갈수록 그 굵기가 완만히

줄어들고, 그 끝은 둥글면서도 뾰죽하게 마감하였다. 지주의 윗 부분에는 깃대를

위에서 묶기 위한 구멍이 나 있다.

이 당간지주에서 특이한 것은 깃대를 꽂기 위한 받침돌을 자연석으로 이용하였고,

지주도 자연석의 양옆을 깍아내고 세워 놓았다는 점이다.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지방 사찰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신라말 천왕사(天王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라 하나, 천왕사의 위치가 북으로

4km 정도 떨어진 점으로 보아 그 관계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차를 간이주차장에 대고 본 당간지주 옆에는 구멍가게가 있고, 그곳에서는 마침

막노동자들이 한잔을 하면서 시끄러워 가급적 흔적을 담지 않으려 조금씩 방향을

틀어 당간지주를 담았고 큰 길가에 조그만 보호 울타리로 된 곳을 곧 떠나게 되었다.

 

 

 

[6] 조엄기념관(趙曮紀念館)과 조엄 묘역(趙曮 墓域)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69-3

문익공(文翼公) 조엄(趙曮; 1719~1777)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이다.

어렸을 때는 명서(明瑞)로 불렸다. 부친은 판동녕부사 조상경(趙尙絅)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1785년(영조 34)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대사헌•한성부 우윤,

예조•공조참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오랜 폐단들을 해소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홍국영(洪國榮)의 무고(誣告)를 받아 파직되어 평안도 위원

(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김해로 귀양살이가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문장에는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도 뛰어나고 민생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 남긴 업적이 적지 않았으며, 통신정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우리나라 최초로 가져오고 그 보관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여

구황작물로 널리 이용되게 한 점은 후세에 공덕으로 기려지고 있다.저서는 통신정사로

일본을 내왕하며 보고들은 바를 기록한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소는 이곳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작동에 있다.

 

 

 

 

 

 

※구황작물 고구마를 들여오다.

고구마는 구황작물로는 좋은 농작물이고, 재배하기가 쉽고, 수확량도 많아, 특히

식량사정이 어려운 춘궁기에는 서민층에게 좋은 대용식품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사츠마 이모’[살마우(薩摩芋)]라 부르고 있으나, 막부(幕府)시대 사츠마

지방에서는 춘궁기 ‘효도작물’이라 하여 ‘효행우[孝行芋(고우고우이모)]’라 불렀다.

이것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고우고우마’가 고구마로 변음(變音)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고구마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조엄이다. 그는1763년 10월 6일 첫 기항지인

대마도 북단 사쓰나포[좌수나포(佐須奈浦)]에서 고구마를 처음 보고 구황작물로

서민들의 춘궁기에는 식량 대용으로 좋은 작물이라 생각되어 종자를 얻어 부산포로 가는

대마도 비선(飛船)편으로 먼저 보냈다. 그리고 사행 중에도 이의 재배법, 보관법, 증식법

등을 자세히 배워 기록해 두었음은 그의「해사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엄이 대마도에서 종자용으로 고구마 몇 말을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應爀)에게 보낸

때가 10월(음력)중순이고, 다음 해 봄 파종기에 절영도(오늘날의 영도) 봉래산 동쪽

해안지대 야산에다가 이 종자를 심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고구마를 처음

재배하게 된 시초이다.

조엄이 사행을 마치고 1764년 6월 22일 부산포로 귀환하여 동래부사 송문재(宋文載)에게

2차분 종자를 전달했으나 그가 신병으로 8월 20일 사임하자 이 종자는 다시 신임부사

강필리(姜必履)에게 인계되었다. 그리하여 강필리는 이의 재배법도 인계 받아, 이를 다시

보완하여 타지방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그가 조엄으로부터 전해받은 보관법, 재배법,

증식법에 2차에 걸쳐 자신이 재배, 증식하면서 터득한 기술을 추가하여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를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엄이 부산지방에 처음 고구마를 전파하게 된 것은 그가 1757년(영조 33)

동래부사, 1758년(영조 34)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바가 있어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 도서지방이나 해안지방의 토양이 고구마 재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조엄의 사행록「해사일기」갑신(甲申; 1764) 6월 18일자에는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해 보내게 된 사연과 함께 그 재배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봄에 양지 바른 곳에 심었다가 넝쿨이 땅 위에 올라와 조금 자라거든 넝쿨의

한 두 마디를 잘라 땅에 붙여 흙을 덮어주면 그 묻힌 곳에서 알을 안게 되는데,

알의 크기는 그 토질의 맞고 안 맞음에 달렸다. 잎이 떨어지고 가을이 깊어지면

그 뿌리를 캐서 구덩이를 조금 깊이 파고 감저(甘藷)를 한층 펴고, 또 흙을 덮어

다지고, 이렇게 하기를 5,6층 한 뒤에 짚을 두텁게 쌓아 그 위에 덮어 비바람을

막아주면 썩지 않는다. 또 봄이 되면 다시 위와 같이 심는다고 한다’

고구마라는 신종작물을 처음 보고도 이 정도의 재배법을 파악할 수가 있다면 그는

사행중에 일본에 있는 육종서도 보았을 것이고, 왜인들로부터 재배법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성공하면 제주도와 다른 도서지방에도 재배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식량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조엄은 ‘문익점이 목면

퍼뜨리듯 한다면 어찌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아니겠는가’라고 그 성공을 기대하였다.

그는 귀로에 다시 고구마 종자를 추가로 구해서 동래부 관리들에게 본격적으로 재배를

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구마는 절영도와 동래부에서 채종된

종자가 타지방으로 확산된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마의 전래로 인해서 지난

250여 년간 조선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제한 공로자는 조엄이 되어야 한다.

 

 

 

 

 

 

4) 에피로그: 원주를 아들 군대생활할 때 및 졸업동기생 모임등 꽤 여러 번을

다녀왔건만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이렇게 많은 유적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박 겉핧기식의 관광으로만 그쳤던 나의

소행이 부끄럽고, 다시 시간을 내어 이번 여행에서 다녀오지 못했던 곳들의

여행계획을 해 보고자 한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강물이 흐르는 곳은 꽤나

번성했을 터, 그래서 어쩌면 충주의 목계나루 보다도 큰 곳이었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래서 지정면(섬강 유역)의 흥법사지나, 이번 여행에서 방문치 못한 남한강유역의

부론면의 법천사지나 거돈사지가 지금은 빈터의 유적만이 쓸쓸한 터를 지키고

있으나 당시에는 국가 종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들을 배출하였으니 사세(寺勢)가

어느정도였을 지는 짐작할 수 있겠다.

비록 부족한 자료나 흔적을 누군가는 다듬고 파헤쳐 미력하나마 복원한다면 선조들이

이룩했던 거대한 유적들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진가를 발휘할 시기가 더 한발자국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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