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의 옛 동헌을 기대하며 넓은터의 목애당과 경이정은 시야에서 빤히 보이는 거리이다.
차를 한켠에 대고 우선 대문격인 근민당에 이르러 안을 들어가려니 자물쇠로 잠겨있다.
문틈 사이로 목애당을 담고 울타리를 돌았으나 담장이 매우 높았다. 주차공간의 고목이 된
느티나무를 지나 경이정으로 갔으나 경이정 역시 공사중인 듯 비계목으로 둘러처져 있다.
실망한 아내를 위해 향교는 생략하고 백화산으로 길이 난 곳까지 오르니 군부대 앞, 하는수
없이 후진해 다소 넓은 자리를 택해 주차한다.
1. 목애당(牧愛堂) 도유형문화재 제138호(1992.08.07),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300-7
목애당(牧愛堂)은 조선시대 태안현의 동헌으로 사용된 건물이며, 조선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與地圖書)」태안군 공해조(公廨條)에 보면 객사 안에
정청•동헌•서헌•청방•중대청•하마대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목애당 외에
근민당(近民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내삼문(內三門)과 경이정(憬夷亭), 이들
중간에 있는 부속건물 등 4동 만이 남아 있다. 건물들이 없어진 것은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때에 불타버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목애당 건물은 오랫동안 태안군청의
민원실로 사용되면서 뒤편으로 건물을 달어내었고, 내부도 많이 변 경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by 안내글 인용
2. 경이정(憬夷亭) 도유형문화재 제123호(1986.11.19),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573
경이정(憬夷亭)은 조선시대 태안현 관청 건물의 일부로 행정청의 입구에 해당한다.
건립시기는 1399년~1400년(정종 원년~2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경이(憬夷)라는 말은 멀리 항해하는 사신의 평안함을 빈다는 뜻으로 중국의 사신이
안흥항을 통하여 육지에 들어올 때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또 이곳 해안을 지키는 방어사(防禦使)가 군사에 관한 명령을 내릴 때도 이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에는 정월 보름달에 주민들이 안녕과 평안을 비는
재우제(宰牛祭)를 지냈으며, 오늘날에는 이곳에서 중앙대제를 지낸다.
1925년~1927 년간에는 야학당으로 사용되었다.
1987년~1988년에 전면적으로 보수하여 복원하였다. by 안내글 인용
3. 횃불(봉)과 연기(수)라는 의미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조선 시대의 군사 통신 시설이다.
평화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선이 해안에 접근하면 3개, 적선이 해안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군이 육지에 상륙하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의 전달이 불가능 할 때에는 포성이나 뿔나팔 징
등으로 알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
백화산 봉수대는 조선 중기인 16세기 초를 전후하여 신설된 봉수로, 「신증동국 여지승람」
에 따르면 동쪽의 서산북산 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남쪽의 도비산 봉수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내는 봉수는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 안산, 강화, 인천을 거쳐 한양의 목면산에
최종 전달되어 적의 침입을 알렸다.
백화산 봉수대는 해안이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 특성상, 빈번하게 발생한 왜구의 약탈에
대응하는 봉수대로서 백화산성과 함께 서해안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 을 알 수 있다.
by 안내글 인용
❀ 주차한 곳 가까이 이정표가 있다. 정상까지 0.2km라 하니 올라 보기로 했으나
100여 개의 계단 오름은 나에게는 쉬운 구간은 아니었다. 간간히 나무가 자라기는
하지만 나무가 얼마되지 않는 석산(石山)이다. 힘에 겨울만 하니 바위의 글씨가
나타나고 봉화대가 가까이다. 확 트이는 시야에 태안읍을 호령하는 듯 했고 석성의
규모는 정상의 부분만 남아 있는듯 하며 날씨도 쾌청해 꽤 먼곳의 지점들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음 행선지인 백화산의 북봉으로 이어지는 길 380m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돌아볼 요량으로 데크로 접근했다.
다음 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