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주사(興住寺)는 유명세가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로 아이를 갖기위한 기도처로 또
만세루(萬歲樓)와 삼층석탑이 유명하다고 해 가영현가옥과 함께 들려보기로 하고
네비의 안내를 받으며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은행나무가 마치 절의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상처럼 버티고 서 있다.
1. 흥주사(興住寺) 전통사찰 제46호(1962.10. 1) 충남 태안군 태안읍 속말1길 61-61
흥주사는 태안읍 상옥리 1154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상량문(上樑文)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고려말엽(高麗末葉)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현재 흥주사의 대웅전(大雄殿)에 안치된 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
(釋迦如來) 를 비롯하여 좌측에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우측에는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로 이루어졌는데, 석가삼존의 형식도 아니고, 또한 협시불(挾侍佛)로
아미타불을 배열해 놓은 것도 보기 드문 매우 이례적인 형식이다. 흥주사는 지난 1962년
10월 1일 전통사찰(傳統寺 刹) 제46호로 등록되어 있다. by 안내글 인용
2. 흥주사 은행나무 도기념물 제156호, 나무 둘레 8.4m, 높이 22m, 태안읍 상옥리 1154
옛날 먼 길을 가던 노승이 백화산 기슭에서 잠시 쉬던 중 하얀 산신령이 나타나 노승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은 장차 부처님이 상주할 자리이니 지팡이로 이곳에 표시를
하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한 노승은 꿈에 산신령님이 가리킨 곳에 지팡이를 꽂아두고 불철주야
기도를 하니 신비스럽게도 지팡이에서 은행나무 잎이 피기 시작하였다.
노승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더욱더 기도에 전념하니 또다시 산신령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 나무에 자식이 없는 자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게되고 태어난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얻어 부처님을 모실 것이니라’하며 사라졌다.
몇 십년 후 산신령님 말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해 불사가 이루어졌고, 부처님의 손길이
자손만대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승은 절을 흥주사라 이름 하였다 한다.
흥주사와 더불어 찬란한 역사를 함께했던 이 나무는 흥주사의 부처님을 지키는 사천왕의
역할을 하여, 후대에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 항상 산천이 진동할 듯한 울 음을 터트려
애통해 한다.
또한 지금도 가끔 목탁소리를 내어 신도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신비의 힘을 가진
나무로 주민 및 신도들의 정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by 안내글 인용
3. 흥주사 만세루(興住寺 萬歲樓) 도유형문화재 제139호(1990. 9.27), 조선시대
이 누각은 흥주사의 중문이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수기(重修 記)에
전 군수와 현 군수 이일(李鎰; 1538~1601)이 고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에 세웠는데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서 만들었으므로 밖에서 보면
이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건물의 앞쪽에만 공포(栱包)가 있는데, 1출목(出目) 2익공(翼工) 형식으로 주심포
(柱心包) 양식에서 익공계(翼工系) 양식으로 변천해 가는 과도기 현상을 말해준다.
만세루는 흥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는 승병(僧兵)들이 무기
저장고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by 안내글 인용
4. 흥주사 삼층석탑(興住寺 三層石塔) 도유형문화재 제28호(1973.12.24), 높이 3m
이 탑은 고려시대 삼층석탑으로 추정된다. 이중(二重)의 받침돌 위에 몸돌이 2층 까지
남아있고 3층은 없으나 탑의 구조나 비례로 보아 삼층석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흥주사는 태안의 마애삼존불이 있는 백화산(白華山)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222년(백제 구수왕 9년)에 흥인조사(興仁祖師)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하나 건물 구조나
유물•유적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은 몸돌이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지붕돌에는 모두 3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부는 거의 없어지고 네모난 석재 한 개만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 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 다. by 안내글 인용
❀ 상옥리로 향하는 길은 시골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나니 우람한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 있고 근래에 생겼다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찾으니 꽤나 커 쉽게 눈에 뜨인다. 은행나무가 흥주사의 왼편을 차지했다면
오른 편에는 500여 년의 느티나무가 균향을 맞추듯 대조를 이룬 모습이다.
유명세를 타는 유적을 갖은데 비해 흥주사는 아담한 절이다. 대웅전 앞에 만세루가, 만세루
앞 약간 우측으로 은행나무, 아주 먼 좌측으로 느티나무가 있다. 대웅전과 만세루 사이에는
삼층석탑, 대웅전의 우측으로 선열당과 좌측으로 심훈당이 있고, 다소 떨어진 대웅전의
좌측 뒤 언덕에 삼성각이 위치해 있었다. 감로수란 조그만 누각은 물을 잔뜩 품은채
대웅전과 심훈당 사이 뒤켠에 자리하고 있다. 약수라도 떠 먹고자 들여다 보니 웅덩이에
고인 물같아 되돌아 나와 백화산으로 오르는 등산안내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조그만
운동기구들과 안내도를 보고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5. 태안 상옥리 가영현 가옥 전통건조물 제4호,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3구 969
야산(野山)을 뒤로한 이 집은 동남향(東南向) 약 260㎡(79평)의 초가로, 대단히 큰
규모(規模)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두이자형(二字型), 문간채는
서(西)쪽으로 배치된 입구자형(口字型) 모양의 전형적인 시골 부농(富農)의 집이다.
몸체 건립 년대는 18세기말(世紀末)로 보이지만, 겉채는 민가(民家)의 간이식 덧붙이기
구조법으로 차츰 덧붙여 지었으며, 문안채는 1940년에 마지막으로 지어 성장 (成長)해
가는 가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사랑 마루의 아자형(亞字型) 난간(欄干)이 초가집의
난간이란 의미(意味)에서 재미를 더해준다. by 안내글 인용
❀ 가(賈)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다. 숭의사(崇義祠)를 다녀왔으면 이해가 빠르련만
그렇지를 못한 아쉬움이 있는 집이다. 임진왜란에 이여송장군을 따라왔다가 귀국하고
정유재란에 다시 가유약(賈維鑰)장군은 아들 가상(賈祥)과 손자인 가침(賈琛}을 데리고
와 1598년 부산전투에서 부자(父子)가 사망하였고, 가침은 조선에서 일생을 보냈으므로
그의 후손이 세웠을 집이다.
기대하고 간 큰 규모의 초가집은 현재는 누가 사는지는 모르나 태안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이는 초가집을 유지하기 어려운게 작금의 실정일 것이다. 명품고택(名品古宅)이란
팻말에 부응하는 신경 씀씀이가 요구된다. 이리저리 한바퀴를 돌고 안채도 들어가 봤으나
신발은 있건만 기척에도 내다보는이 없고 별채로 창고인듯한 이 건물은 올 봄에 이엉을
교체하지 않으면 서서히 명맥은 사라질 지경이었다. 몇 년전 블로그에는 깔끔하게 이엉이
덮혔는데 볏짚이란게 매년 다시 이어줘야 하니 그리 될 수도 있겠다. 집 뒤로 대나무숲이
마치 안간 힘을 쓰는 듯 보였고 곳곳이 주저 앉는 듯한 모습은 보는 이를 애처롭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당국의 빠른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시내의 옛 동헌을 찾아간다.
다음에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