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성지순례(24.06.22~23./밀양,거제,경주)-2

아름답지만~ 2024. 6. 29. 18:51

남파랑 거제 20코스(양지암 등대길/거제 섬 & 섬길 6코스)

시점(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현위치(2.4km; 50)-능포항(2.9km; 1시간)-장승포항(8.5km; 3시간)........종점(거제해양문화관; 6시간30)

지심도<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에서 동쪽으로 1.5km 해상에 위치>

지심도는 면적이 0.338, 해안선의 길이는 3.5km의 작은 섬으로 장승포항, 지세포항에서 도선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으며 탐방 시간은 2시간 이내이다.

하늘에서 바라 본 섬의 모양이 마음심()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지심도는 남해안 섬들 중 어느 곳보다 동백나무의 숫자나 수령이 월등하여 동백섬이란 이름이 잘 어울린다.

양지암조각공원

거제의 상징성과 비전을 담은 20점이 넘느 조각품들로 채워진 능포동 일대에 조성된 공원이다.

황톳길, 자갈길 등 다양한 건강 도로가 펼쳐져 있고,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튤립 공원의 아름다움과 사계절 쪽빛으로 빛나는 바다 전망을 감상하기 좋다.

정자와 벤치 등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휴식을 즐기며 천혜의 자연을 즐길 수 있다.

거제조선해양문화관

어촌의 전통문화와 어업의 변천사 등을 보전전시하기 위한 어촌민속전시관과 선박의 역사와 기술에 관한 조선해양 전시관으로 이루어진 문화관이다.

어촌민속전시관은 각종 수산자원 전시 및 시뮬레이션 체험, 어촌의 생활상, 어선 제작과정, 거제도의 역사등을 볼 수 있다.

조선해양문화관은 사람과 바다 중심의 다양한 기획전과 해양특성화 교육 프로그램 및 어린이 체험시설인 유아조선소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천주교 순례길 종합안내

천주교 순례길 1. 약수터~서이말등대(4.8km/2시간 45)

2. 약수터~예구마을~서이말등대(8.27km/4시간 25)

3. 예구마을~돌고래전망대(3.12km/1시간 30)

서이말 등대 지리끝(쥐이골)

일본 대마도가 보이는 거제도 동쪽 끝자락 주을리 자리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거제도에 천주교 복음을 처음 가져온 윤사우와 그의 장남 경문(베드로)이 움막을 짓고 살던 외딴 곳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가려고 이곳에 온 이들은 일본을 포기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아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해초를 캐어 생활하다 보니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되었다.

그러다가 봉수대에 살던 한정선을 만나 함께 해초작업을 하면서 친하게 되었는데 한정선이 그들이 천주교인임을 알게 되었고 자기도 세례 받기를 원하므로 윤사우(스타니슬라오)가 직접 교리서를 만들어 한정선이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후 경문은 공고지에 사는 주관옥의 딸 또금 (아델라)과 혼인을 하게 되자 아버지 사우는 함안 논실(가동)로 가고 경문은 이곳과 처가를 오가며 결국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곳을 보면 척박했는지 알 수 있다. 세월이 지나 그들이 사용했던 움막과 밭은 흔적만 남아 있고 우물은 지금까지 잘 나오고 있다.

공곶이(公古基)

거제도 일운면 예구마을 포구에서 산비탈을 따라 20여 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공곶이는 한 노부부가 평생을 피땀흘려 오직 호미와 삽, 곡괭이로만 일궈낸 자연경관지다.

동백나무, 종려나무, 수선화, 조팝나무, 팔손이 등 나무와 꽃만 해도 50여 종, 4만 평이 넘는 농원 곳곳에 노부부의 손길 안 닿는 곳이 없을 정도로 공곶이는 생명의 숲 그 자체다.

돌고래 전망대 가매 너른(가마넣은) 바위

거제도에 천주교 복음을 전파한 이들은 윤성우(스테파노), 윤사우(스타니슬라오) 형제와 사우의 두 아들 경문(베드로)과 봉문(요셉)이었다.

둘째 봉문이 진목정에 있는 진진부의 여식 순악(아네스)과 혼인하여 처가살이를 하게 되자 큰아들 경문을 데리고 대마도가 보이는 주을리 끝자락에 있는 지리 끝(쥐이끝;鼠耳末)에 자리를 잡아 움막을 지어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해초를 캐어 생활하다가 공고지에 사는 주관옥의 딸 또금(아델라)과 혼인하여 서이말과 공고지를 왕래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포졸들이 들이닥쳐 막무가내로 천주교인인 경문을 잡아가서 문초하고 태형을 가했다. 풀려난 경문은 이 사실을 서울에 계신 주교님께 보고하러 간 사이에 출산을 위해 와현리에 있던 경문의 처 아델라와 동서 이석원을 관아에서 잡아가 남편의 행방을 대라며 문초하다 만삭인 그를 풀엊고 이석원을 심하게 문초하여 배교를 강요하나 이석원이 끝까지 버티다 거의 반주검이 되어 풀려나자 지금 이 자리 (너른)에서 숨어버린 가족들도 찾을 수 없고 한숨을 쉬다가 부싯돌로 담뱃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니 그 불빛과 냄새를 맡은 가족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족들(이석원 내외, 주아델라, 동생가족)은 여기서 살 수 없으니 욕지로 피신하기로 하고출발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심하고 출산 때문에 외도에서 내려 아델라는 남의 집 부엌에서 출산하여 아들을 낳는데 이름을 명주 (명을 구하다)라고 지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는데 이곳이 초기 거제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피난했던 장소 중 하나이다.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아래는 가마처럼 생겼다고 가마(가매)바위, 위는 넓(너른)다고 넓은 바위이며 교회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장소이다.

현재는 돌고래의 이동과 생태를 관측할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3. 복자 윤봉문 요셉

윤봉문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 당한 뒤에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정착하였다.

윤 요셉의 부친인 윤 스타니슬라오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또한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윤봉문 요셉은 장성하여 진 아네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87년 겨울에는 경상도를 담이한 로베르(A.P.Robert, 김보록)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자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윤요셉이 거제도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로베르 신부를 안내 하였는데, 그 해 거제도에서는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이듬해 봄에는 그곳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었다.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함으로써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박해였다. 이 박해 때, 윤 요셉은 다른 교우 3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모진 형벌에도 관장이 강요하는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도적과 같으니, 윤봉문을 진주로 압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윤 요셉은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때가 188841(음력 220) , 당시 윤 요셉의 나이는 36세였다.

윤봉문 요셉이 순교한 다음, 로베르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구장에게 보고 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인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묘지 약사(略史)와 시복

윤봉문 요셉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장재실)에 살던 윤고미와 장회장(張益今), 그리고 곽광수의 부친(郭令正)이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896년에 아들 윤학송(尹學松,루카), 성낙두(베드로), 윤학선(요한)이 장재리에 있던 순교자 시신을 진목정에서 바라보이는 옥포 쪽박골에 안치하였다.

세월의 흐름과 여러 상황 변화로 순교자 묘지를 옮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교구장 주교 님의 교령발표로 순교자의 무덤을 파묘하여 2013420일 현 위치인 일운면 지세포리 산 103-12에 이장하였다. 파묘하는 과정에는 교구장 안주교님과 총대리, 지구장 신부, 한창규 해부학 교수와 구형모 전문 발굴자, 많은 신부와 신자들이 참관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유골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나 오른쪽 골반 뼈와꼬리뼈, 그리고 발목뼈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유추해 보면 얼마나 가혹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알 수 있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공경하고 신앙을 지켜내신 순교자의 열정과 신심을 알 수 있다. 이장된 순교자의 유해는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순교자의 탑에 안치하였다.

이후 윤봉문 요셉 순교자는 20148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집전으로 광화문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동료 123위 시복식에서 시복되시어 복자의 반열에 오르셨다.

 

순교자의 탑 아래 시신을 모신 상세도

오석, 생횟가루+마사, 오동나무관, 향나무관, 순교자의 유해

4. 경주읍성(慶州邑城) 감옥(監獄)

오랜 세월동안 이곳에 세워져 있었던 문화 중고등학교가 1996년도에 충효동으로 이전, 현재의 우방명사 마을 신축부지가 되었다.

1997320일부터 1119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에서 이 일대를 발굴조사, 다른 유적들과 함께 이 경주 읍성 감옥터도 발견하게 되었다. 감옥터는 방형(方形)에 가까운 둥그스런 외곽 담장 안에, 옥사(獄舍) 2()과 부속사 1(), 그리고 남쪽에서 출입문(出入門)이 발견 되었다. 죄인들을 가둔 2()의 건물터(建物址)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나란히 배치하였다.

동편건물터(東便建物址)는 동서길이(東西長) 11m, 남북길이(南北長) 15m, 서편건물터(西便建物 址)는 동서길이(東西長) 8m, 남북길이(南北長) 12.5m였다. 담장은 폭() 2.5m의 기단 위에 높이 () 1.2m의 축()󰠥() 모양으로 냇돌을 쌓아 올렸다.

또한 다망 바깥에는 폭() 3.8m~4.7m, 길이 80cm안팍의 해자(垓字)를 설치, 탈옥이나 외부 침입을 막았다. 담장 안쪽에서 발견된 우물속에서 나무 두레박이 다섯 개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경주장흥고명(慶州長興庫銘)의 분청사기(粉靑沙器) 대접들을 포함하여 토기류와 와편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경주읍성내 감옥의 존재는 이미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다.

정조(正祖) 22(1798) 이후의 제작으로 짐작되는 조감도기법(鳥瞰圖技法)의 경주읍성내전도 (慶州邑城內全圖)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이 지도(地圖)에는 당시 읍성 내의 도로와 주요건물들 그리고 서북쪽에 옥사(獄舍)와 담장 등을 상세히 그려 놓은 뒤 그 위에 한자(漢字)()’이라 고 분명하게 표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발굴조사 결과, 이 경주읍성내전도(慶州邑城內全圖)는 대단히 사실적인 지도였음이 증명(證明)된 것이다.

한편, 경주 관아와 옥 터는 천주교 역사 안에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1815년 을해박해, 1860 년 경신박해, 1868년 무진박해 등 역대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려 관장(官長) 앞에 끌려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허인백(許仁伯; 1822~1868,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베드로)이 경주에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이들은 1868914(728)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 온 허인백의 부인 박조이에 의해 비밀리에 안장되었다가 진목정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경주 진목정 뒷산에 합장하였다.

그후, 197310월에 대구 감천리 천주교 묘지를 거쳐 현재 대구 산천동 복자성당 구내에 이장 되어 있다.

관아터와 경주문화원이 오류로 엉뚱한 곳을 향했다. 성지순례의 성급한 성지 지정에 문제가 있다. 성건성당(경주시 북문로 55번길 24),경주읍성 감옥터(경주시 북성로 61), 경주관아(경주시 중앙로 67-1/도우동 159-3)/ 버스-250m-성건성당-496m-감옥터-272m-관아터

우리는 상당한 시간을 헤비하고야 일행과 만났고, 4명은 관아터는 얼씬도 못한채 귀로에 들었다. 성지로서는 관내라는 개념을 붙여 지정할 필요가 있겠다. 비 천주교인이라도 성지 10여 곳 이상 다녀봤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으로 경험해 당황스러웠다. 자료는 다 뽑이 놓았는데도 40여 분이상 헛걸음 친걸 우리 네 명만의 잘못일까?

우리 네 명 때문에 늦어졌지만 황간휴게소 이후 유성에서부터의 버스전용차로는 텅 비어 빨리 귀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