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본인은 천주교와는 거리가 있으나, 종교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와 개인의 믿음에서 오는 평안이 목적에는 동일한 개념을 갖었다고 생각해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는 관계로 해외는 두 번이나 했고, 국내는 처음으로 동참했다.
단지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한 이후 정치적인 술수와 동양과 서양이란 생활관습 때문에 사교로 취급 받으면서 수많은 희생을 동반해 순교자도 많고 이름 없이 핍박받은 사람도 많다는게 좀더 특이했다고 볼 수 있다.
1. 가고오는 길 요약
①24.06.22: 05:15/안**댁-조원동 성당/05:40-버스/06:08-동수원TG-고속도-문의청남대휴게소/07:31~0:40-청도새마을휴게소/09:39~09:57-삼랑진TG/10:10-김범우 토마스 묘역입구/10:19~13:14<걸어서 15~20분, 미사, 중식>-고속도-거제도-유섬이 묘입구/15:35~16:27-싱싱게장(경남 거제시 장승포로 10/☏055-681-5513)/17:12~18:11-파우제 호텔(거제시 능포로 16길 82) /18:20~<여장 풀고 자갈치횟집; 능포로 251/☏055-681-9559/~20:10>
위: 싱싱게장백반집 상차림, 아래: 능포항의 거리 풍경
위, 아래: 능포항의 마스코트(?)와 항구의 모습 ㄱ 아래는 우리가 하룻밤 유숙한 파우제호텔
②24.06.23: 04:20~05:50/능포항 운동-버스/06:55-새장승포식당(거제시장승포로 2길19)/07:05~08:15<단원들 식후 건어물 구입 등>-윤봉문 요셉성지/08:40~12:43<성지 둘러보기, 묘소탐방, 경당 미사>-거제대교 경유-부산신항주소/13:49~13:53-경주TG/14:53-금성로(성건성당 입구)/15:04~16:09<일행과 헤어져 감옥터-경주문화원/오류로 엉뚱한곳으로-검찰청으로>-경주TG/ 16:24-건천휴게소/16:31~36<꿀빵 분배>-황간휴게소/18:13~18:40-신갈정류장-동수원TG/20:08-벽산Apt/20:14~18-조원동성당/20:24-집/20:55<안**이 태워다 주어>
2. 김범우 토마스 묘역
김범우(金範禹, 1751.05.22~1787.09.14)는 조선 후기의 역관, 조선 최초의 천주교도이자 천주교 박해의 희생자다. 세례명은 '토마스'로,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고 교리 공부를 하다가 발각된 명례방사건으로 형벌을 받고 밀양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생전에 그가 자신의 집을 정기모임의 장소로 제공하였는데, 그의 집이 있던 곳에는 훗날 1898년에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울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김범우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배교하지 않았기에 귀양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는 그의 저서 《조선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결국 김범우는 고문 후유증인지 어쨌는지 병이 악화되어 1787년 귀양지 밀양에서 병사하였고 이로써 조선에서 천주교 사건 관련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지에 살면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다. 훗날 신유박해(1801) 때 김범우의 여섯째 서제 이우는 문초를 받고 장형을 당하던 중 죽었고, 일곱째 서제 현우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의 집이 최초의 천주교 예배 장소라는 역사적 의의에 따라 오늘날 그곳에 서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묘소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중턱에 있다. 1985년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과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바친 마백락 씨 등은 989년 극적으로 후손의 외손 중 한 명을 만나 김범우의 묘로 지적해 준 묘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김범우의 묘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김범우의 묘소는 이 곳 만어산 중턱에서 발견하게 됐고 그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순교자 김범우를 기리기 위한 토마스 기념 성모동굴성당은 김범우 묘역은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1번지에 99평 200석 규모로 2011년 9월20일 봉헌되었다.(by 위키백과 발췌)
위: 성모동굴성당, 아래: 사제관과 사무실
미사 드리기 전 동굴성당 내부의 모습이다. 경상도라 신부님의 사투리가 더욱 못알아 들었다.
위: 3장은 동굴성당 지붕격인 곳이다.
3. 유섬이 묘 (유처자 묘) 경남 거제시 거제면 내간리 산53-2번지
18001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 지면서 순교한 유항검(46, 아우구스티노)과 그 식솔 들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다.
유항검과 순교한 그의 동생 관검과 제수 이육희, 그의 부인 신희, 장남 중철과 맏며느리 이순이, 차남 문석, 조카 중성 등으로이들 모두 2014년 시복됐다.
순교자들이 처형된 뒤 교우들이 유항검의 고향인 전북 완주군 초남리와 가까운 비우배기에 임시로 매장해 놓았던 것을 1914년 4월19일 전주 전동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동생 관검을 제외한 유항검 등 7명의 순교자들을 합장해 전북 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 길 89 치명자산 성지로 옮겨 왔다. 치명자산 성지는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됐다.
유항검의 자식 가운데 열다섯 살이 안 된 아들과 딸들이 유배를 갔지만 어느 곳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유항검의 자식 중에 ‘유섬이’란 딸이 거제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성래 박사(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가 거제도호부사를 지낸 하겸락(1825~1904)의 문집 ‘사헌유집(思軒遺集)’의 해제를 집필하던 중 우연히 ‘유섬이’에 관한 기록을 찾게 된다.
‘사헌유집’의 기록을 근거로 2014년 유섬이의 묘를 어렵게 찾아냈다. 유섬이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아홉 살이었던 유항검의 딸로 거제도호부 관비로 유배를 왔다. 유섬이가세상을 떠나자 하겸락 부사가 장례비용을 치르고, 제문을 지어 바치고 묘비를 세워주었다.
유섬이는 1801년10월 거제도에 도착해 당시 거제부사(이영철)의 배려로 내간리 한 할머니의 수양딸로 보내졌다. 그녀는 거제에 머물면서 동정녀로서 삶을 살아가야할 종교적 신념으로 마을 사람들의 중매도 거절했다. 그녀는 평생 혼자 살면서 거제에서 처음으로 회양적(산적)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 등 함께 어울려 지내다 1863년 7월 일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입구의 십자가상은 2022년 10월 17일 세워졌다. 데크길도 대충 그때에 만들어진 듯하다.
23일 방문한 곳은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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