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태안군-5

아름답지만~ 2018. 3. 21. 17:59

태안군의 해안은 굉장히 작은 곶들이 많다. 해안가를 굽이돌아 간 곳에 이정표가 있다.

차에서 내리면서 이런 곳에(?) 성이 있다니 하며 안내된 길을 조금 오르니 촌노께서

호미질을 하신다. ‘아주머니 뭘 하세요?’하고 운을 떼니 ‘풀을 맨다’고 하시며 ‘냉이 캐러

오셨어요?’해서 ‘아니요 소근진성을 찾아 왔어요’ 하니 손으로 쭉 올라가란 신호를

하신다. 뒷동산 오름 정도를 오르는 좌측으로 작은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길가에는 냉이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내려오면서 냉이를 캐리라 하며 올라선 곳에

 소근진성이라는 팻말과 복원된 성곽이 나타난다.

 

소근진성[소근진성은 태안군 소원면 소근리 해안에 위치한 외침 방어용 성으로, 19세기 말

엽까지 군대가 주둔했으나 임오군란 이후 폐지되었다고 한다] 축조년도: 조선 중종 9년

(1514년), 둘레: 2,165척(약 656m), 높이: 11척(약 3.3m)

1. 태안 소근진성(泰安 所斤鎭城) 기념물 제93호(1993.12.31), 태안군 소원면 소근리 산2외 13필지

1514년(조선 중종 9년)에 축조된 평지 진성(鎭城)이다. 성의 둘레는 650m 정도 이며,

대부분 무너지고 동문의 터 부근만 남아 있다. 서쪽으로는 서해에 접하고 있으며,

동•남•북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동문터 북쪽벽은 바닥의

너비 8m, 외벽의 높이 4.4m, 내벽의 높이 2m, 윗벽의 너비 1.7m이다. 문터는 대부분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동•서•북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터의 문폭은 4.2m 서문터의 문폭은 3.3m로 확인된다. 성 안에는 우물 1개소가

있다. 동벽 밖으로는 성벽에서 4.5m 떨어진 곳에 너비 6m, 깊이 2.1m의 규모로 도랑을

파 해자(垓字)시설이 확인되고 있다. 이 성은 좌도수군첨절 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

으로 이용되었으며, 서해안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by 안내글 인용

 

 

 

❀ 둘레를 구경하는게 아니라 동문터인지 양쪽으로 석축이 복원된 모습과 양쪽으로

이어진 성벽만을 보고 배가 아프다는 아내의 하소연에 냉이는 고사하고 화장실 찾기에

급급했으나 선창가 화장실은 굳게 잠겨있어 부리나케 네비를 신두사구로 하고 되돌아

나가며 좌측 능선에 소근진성이 보이나 차를 세우지 못하고 신두해수욕장 못미쳐

화장실을 만나 한동안 후에 나왔는데도 깔끔치 못하단다. 시두사구를 대충 본 후

되돌려 아까의 화장실을 들려서 또 한동안을 기다리며 소화제를 사왔다. 그리고

이동하면서 드링크 소화제를 먹고 독립운동선언서의 33인 중 한분을 찾으러 갔다.

 

 

 

2. 이종일선생생가지(李鍾一先生生家址)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반계리)

이 가옥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였던 이종일(李鍾一; 1858~1925)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1882년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이래 7개 학교장을 지내면서 2 세 교육에 힘썻고,

1910년까지는 10여 년간 <황성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 언론계에서 개화와 계몽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이때 체포되어 2년 6개 월간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이 가옥은 1986년 선생의 생가터애 복원한 것인데, 동향(東向)을 한 6칸 겹집의 ‘ᄂ’자형

평면을 가진 초가집이며, 서쪽에는 1990년에 완공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by 안내글 인용

 

 

 

 

 

 

 

 

※ 옥파추모사업기념비

한 평생을 나라사랑에 몸바친 옥파 이종일 선생의 거룩한 뜻을 현창하는 기념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본면 관내 각 초등학교 및 중학교 학생들의 정성어린 성금, 평양조씨

대사헌공파 상리종중과 성주이씨 대종회의 희사금, 그리고 각계 유지들의 본 사업회

임원 및 이사들의 출연 등으로 인해 옥파추모사업의 기틀인 생가지 매입과 생가복원

등에 기여한 공로가 많으므로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1996년 8월31일 옥파추노사업회 세움

 

 

 

3. 충령사

충령사는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자유와 민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전투 중 산화하신

전몰 군경과 국토방위를 위하여 헌신하신 순직군경 등 호국영령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1997년 태안군에서 건립하였다.

건평 9.5평 규모의 아담한 사당으로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이곳에서 기관 단체장,

보훈가족, 주민 등이 모여 추념행사를 거행한다.

 

 

 

 

 

※ 자유수호 충혼비

이 비는 순국선열들의 살신성인 하신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본군 자유총연맹

지부와 유가족이 주관 태안군의 예산을 지원받아 영령들의 위안과 추모제를 봉행하고자

자유수호충혼비라 이름하여 이 곳에 세우다. 자유총연맹 태안군지부, 태안군, 6•25 반공호국지사 유족

 

 

 

 

 

❀ 나라를 위하는 독립운동은 나 하나만의 고생이 아니고 집안이 풍지박살 나는 일이다.

이종일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넘어 독립운동으로 복역하신 후에는 제 2의

3.1운동도 실패로 끝났다고 하며, 집안이 가난하였던 그는 삼순 구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중 1925년 8월31일 경성부 죽첨정정목 31번지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by 위키백과)

늦었으나마 고인의 생가를 복원하고 사당을 건립한 것은 나라의 살림이 여유가 생겨서 할 수

있었던 일일 것이다. 아내는 여기서도 화장실을 먼저 들리고 본인은 사당의 문을 열고

선생의 영정 앞에서 엄숙히 예를 갖췄다. 바로 옆에 위치한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산화한

 전몰장병들을 위한 시설도 고인들이 섭섭하지 않도록 신경 써 준 곳이었다. 1시간 여

아내의 배탈로 허비했고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해 무리하지만 귀가를 서둘러

마트를 들려서 수원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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