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풍수원 성당

아름답지만~ 2018. 4. 2. 21:10

성지봉 일원은 천주교와 깊은 인연이 있어 남쪽 기슭에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의 ‘풍수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신유박해(1801년),병인양요(1866년),신미양요(1871년) 등으로

탄압받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들었으며, 생계수단으로 옹기를 구워 팔았으며 아직도

옹기 가마터가 밤골에 1기가 남아있다.

신미박해(辛未迫害)는 1801년(순조1년)에 발생한 조선의 천주교회 박해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66년(고종3년)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삼아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고종8년)에 미국함대가 조선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용두리에서 횡성으로 이어지는 6번국도에서 도덕고개<옛날 도둑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를

넘어 도로변에서 가깝고 때를 안탄 산이다. (2007.09.02. 산행기 중에서) 

 

횡성 풍수원성당(橫城 豊水院聖堂)

풍수원마을이 형성된 연유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1803년 혹은 1803년경 경기도 용인에서

신 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400여명의 신자들이 8 일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메다가 정착하게된

것이 그 유래로써 80여 년 동안 신자들은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1888년 프랑스 성직자

르메르 신부가 풍수원에 파견되어 본당을 창설, 초대신부로 임명되었고, 본당의 관할구역은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는 12개군 20 공소로서 신자수는 2,000명에 이르렀다.

르메르 신부가 본당의 터전을 닦은 후 예수 성심학교 출신으로 첫 사제로 서품된 정규하(아우구 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여 1943년 81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평생을 풍수원 본당 신부로 사목 하였고, 정규하

신부는 1906년 자신의 돈과 교우들의 헌금으로 중국인 인부들을 고용, 당시 초가 성당을 대신해 높이

5m, 건평 120평의 연와조 성당 건립을 착수하여 1년만인 1907년 준공 봉헌 하였다.

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으로,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으로 최고성과 역사적 의미가 있는 성당 건축물인 풍수원 성당은 1982년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횡성 풍수원 천주교회(橫城 豊水院 天主敎會)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이 교회는 도(道)에서 처음으로 세운 고딕양식의 천주교당(天主敎堂)이다.

본래 이곳은 조선 순조(朝鮮 純祖) 원년(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고종(高宗) 3년(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으로 탄압받던 신도들이 피난온 곳으로 고종 27년(1890년) 프랑스인 르메르

이신부(李神父)가 초가(草家) 사랑방에 초대신부(初代神父)로 부임한 한국의 네 번째 천주교회로

출발한 곳이다.

지금의 교회는 제 2대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띠노; 1863~1943) 신부가 설계하여 고종 광무

(高宗 光武) 10년(1906년) 착공, 이듬해(1907년)에 완공하였는데, 중국인(中國人) 기술자와 전신도

(全神道)들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횡성 풍수원성당 구사제관 등록문화재 제163호(2005.04.15),건립년도: 1912년(1913년 완공)

“저희 집 사제관은 이제 준공되었습니다. 지금은 새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썩 잘 지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규하 신부 서한에서(1913.10.01-

칭칭나무로 우거진 골짜기를 배경으로 산 언저리에 위치한 사제관은 붉은 벽돌로 세워진 2층

건물이다.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에 지어졌지만, 원형이 잘 남겨진 벽돌조 사제관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당시 사용된 벽돌은 가까운 피미기마을에서 구워 나른 것으로

추정되며, 정규하 신부가 건립 진행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소한 모습 속에서도 현관•창호•처마 주위의 벽돌쌓기장식이 돋보인다. 1•2층 내부에서 거실을

사이에 둔 방 배치와 서재를 보면 당시 사재의 주거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2층 창문을 열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떨어진 주막거리가 보이는 높은 위치에 있어

마을의 분위기를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신부는 사제관에서 성당 준비실까지 가려면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예배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면서 성당으로 향했을 것이다. 

 

풍수원성당은 이런 산골에 성스러운 건물이 있다는데 관심이 갖었고, 새로히 증설된

유현문화관광단지는 불편한 다리로는 딱히 돌아볼 만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아내는 11시에 미사가 있다고 해 맞추려 했으나 계속 길을 잘못 선택해 11시10분경

도착했는데, 어느 자매분이 성당에서 나오는데 미사가 없다고 했다. 십자가의 길 초입의

그리스도상은 인자해 보였며 아래의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 성심께 천하 만민을 바치는 기도 지극히 어지신 구세주 예수여 주의 제단 앞에 겸손되어

꿇어 경배하오니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우리는 이미 주의 백성이오니 언제나 주께 속하여 있기를

바라나이다. 주께 더욱 완전히 결합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오늘 주의 성심께 정성되이 봉헌

하나이다 주를 일찍이 알아 모시지 못한 사람도 많고 주를 알고도 주의 계명을 저버리고 떠난

사람도 많사오니 지극히 인자하신 예수여 이런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시어 주의 성심께로 이끌어

들이소서 주는 임금이시니 주는 도무지 떠나지 않은 교우들뿐 아니라 이미 주를 떠난 랑아들도

다스리시며 그들을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어 고통과 기아에 죽지않게 하소서

임금이시니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이나 불목하여 갈린 사람들도 다스리시며 그들을 도로

교회로 부르시어 오래지 아니하여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한 우리에서 한 목자 밑에 살게 하소서

주여 성교 회를 평화로이 선양하시고 천하만국에 참된 평화를 주시어 온세상 어디서나 입을 모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천주 성삼께 세세에 영원히 찬미와 영광과 흥숭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예수 성심이여 이세상에 주의 나라를 세우소서

성당을 둘러보는 동안 군장갑차가 굉음을 내며 한동안 지나간다. 이곳이 전방지대라는

실감을 주는 듯 했다. 한동안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그 옛날 성지봉 다녀오던 때의 쉼터를

생각하고 횡성읍 방향으로 조금 더 달려보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때의 쉼터는

도로를 확장하고 편하게 정비해 진가민가해 되돌려 용인시의 모현면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