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의 정리는 상당히 늦게 되었다. 꽃피는 시절 각종 모임에서 연속되는 여행이 글을 쓸
시간을 얻을 수가 없었다.
심곡서원은 조광조와 연관된 서원이며, 심온은 태종의 아들에게로 실권이 넘어간 이후의
정치적 부담을 제거한 희생양이며, 혜령군은 태종의 아들이며 직계 몇 분이 더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이제는 지하에서 조용히 쉬지 못하는 곳으로 변화한 개발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 되어버린 애석한 안택이 되고 말았다.
위는 4월 4일 삼형제와 사촌이 의정부 매제네서 담았던 사진들입니다.
1. 심곡서원(深谷書院) 사적 제530호, 조선 선조 38년(1605년),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상현동)
심곡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 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靜菴)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사림파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였으며, 효종은
‘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하여 심곡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사당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심곡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강당•내삼문•사우(사당)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강당 안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담긴 현판과 서원의 규약등이 걸려 있다.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문신, 조광조를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하였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심곡서원은 최초 사당을 중심으로 제향기능을 강조하여 지어졌으며, 이후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편에 제사를 두는 전당후재의 모습을 보였고, 심곡서원도가 그려진 시기에 앞서서
전재후당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음을 옛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 정암 조광조의 묘는 주차공간이 없어 서원이라도 방문해 보고자 들렸다. 종합편에서도
거론되었지만 적당한 크기의 주차장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면, 방문자는 편한 마음으로
방문과 예를 갖출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래의 사진은 화순의 유배지에서로 2010년 3월15일 방문햇던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2. 심온선생 묘(沈溫先生 墓) 경기도 기념물 제53호(1979.09.10), 경기도 수원시 이의동 13-10
심온(沈溫; 1375~1418)선생은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문신으로 자(字)는 중옥(仲玉)이며
세종(世宗)의 부원군이다.
고려말(高麗末) 11세 때에 진사(進士)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태조(太祖) 원년
(元年; 1392) 조선개국 후에는 병조•공조의랑(兵曹•工曹議郞)을 거쳐 태종(太宗) 11年
(1411)에 대사헌(大司憲), 동왕(同王) 14年(1414)에 호조(戶曹),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고, 조선 제4대 세종(世宗)의 장인[국구(國舅),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
으로 봉군되었으며, 1418년(세종원년) 즉위하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무술옥사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귀국도중 의주(義州)에서
피체(被逮)되고 수원(水原)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죄가 없음이 판명되어 1451년[문종(文宗): 1450~1451재위] 때 복권되었다.
시호(諡號)는 안효(安孝)이다.
묘역은 장대석을 이용해 상하 2단으로 구분하였는데, 위쪽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공의
외손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글씨를 쓴 묘표와 상석이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장명등이 있고, 좌우네 문인석 1쌍이 있다. 한편 묘역 입구의 비각에는
신도비가 안치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공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 조선시대 많은 부원군들이 세력의 중심에서 권력을 휘둘렀는데, 많은 정적을 죽였던
이방원으로서는 자식의 장래에 걸림돌이 되는 소헌왕후의 부친도 처단하여 세종이 정치를
올바르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식사랑의 소치는 아니었을까?
합장은 아닐지라도 안효심공온은 같은 묘역의 부인과 왕명으로 외손자 세조에 의해
그당시로는 먼 안성시 금광면으로 이장되어 있다. 무슨 연유는 분명 있으련만 어느 안내의
글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인근 무단출입자를 위해 자물쇠로 귿게 채워진 정문, 방문객에 대한 배려를 생각케 한다.
✺ 청송심씨 가문은 풍수지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조상을 명당에 모시기 위해 경상도 청송에서
전라도 함열로 조상(심연)을 모시는 등 효성과 정성이 대단하였으며, 좋은 기운을 고루 받기 위하여
부부를 합장한 묘가 거의 없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습니다. 명문은 이렇듯 효와 정성이 깃들어야
되는가 봅니다. by 한국참풍수지리학회
여기 3장의 사진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32-1의 사진(18.02.22.방문)
3. 혜령군 묘역
혜령군(惠寧君) 이지(李祉: 1407~1440)는 조선의 왕족으로 태종의 다섯째 아들 (서자)이며,
자는 선여(善餘), 호는 동계(同溪)입니다. 선빈안씨 소생으로, 세종의 이복동생으로 1427년
홍령군(弘寧君)에 봉해졌으며, 2년 후 혜령군(惠寧君)으로 개봉되었습니다. 홍령군은
종학에서 싸움을 벌이고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세종이 그의 출입을 엄금하고 정2품 직첩과
녹봉을 거두어 벌하였으며, 그 후에도 성절하례(聖節賀禮)에 불참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1438년(세종 20)에는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북경에 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아 돌아오는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34세에 칙서를 받아 돌아오는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34세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을 정지하고, 관곽과 쌀 콩 합하여 1백석과 베 40필,
저포 3필과 종이 2백권을 주고, 판승문원사(判 承文院事) 정척에게 호상(護喪)을 명하여
예로서 장사 지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혜령군에게 양회(襄懷)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세종이 친히 혜령군의 집에 가려 하였으나
더위 등을 이유로 신하들이 반대하여 중지되었습니다.
혜령군의 묘소는 처음엔 수원시 동문 안쪽에 위치했었는데, 3년 뒤 억울하게 죽은 장인
심온의 묘를 왕자의 묘와 함께 나라에서 관리하길 원했던 세종의 명으로, 영통구 이의동
산234번지 경좌로 옮겼었습니다.
지금의 묘소는 2008년 광교역사공원 조성을 위해 안효공 심온 묘소의 서쪽 능선 옆으로
묘를 이전한 것이며, 혜령군의 묘역은 부인 무송 윤씨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들
예천군과 손자 축산군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by 네이버 백과
양회 혜령군 묘역
양회 혜령군의 아들과 손자의 묘가 나란히 정리되어 있다.
❍ 조선왕자의 대우는 서자라도 매우 품위가 있다. 설사 이장된지가 얼마되지 않더라도
매우 품격을 갖추었고, 비석도 깨끗해서 이해가 빨랐으나 왕릉의 묘역이 차지하는
전국의 면적에는 좀 과하다는 생각인데 서자까지 왕손의 반열이라는데는 너무한 것은
아닐런지. 우리 세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제 한 줌의 재로 되어 조그마한
공간을 차지하는데 이제 우리의 다음세대는 부모를 모실만한 형편이 안되는 예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래도 될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위 예전의 묘비는 6.25의 탄흔이 어지간히 교전의 중심지였나 보다.
끝
'국내 여행기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성의 유적지(원곡,대덕,시내 및 보개면)(2018.04.05)-1 (0) | 2018.04.13 |
---|---|
초등교 동창들 내외의 나들이 (0) | 2018.04.12 |
포은정몽주선생 묘와 저헌이석형선생 묘 등-2 (0) | 2018.04.03 |
포은정몽주선생 묘와 저헌이석형선생 묘 등-1 (0) | 2018.04.03 |
풍수원 성당 (0) | 2018.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