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옥천군의 여행지-2

아름답지만~ 2018. 4. 25. 20:35

옥천을 대여섯 번 다녀갔어도 구읍은 생각조차 못하다가 육영수 여사의 생가와 정지용

시인의 생가 등 유적지를 둘러볼 계획을 세우고 점심전 잠시로 생각했으나 돌아볼 곳이

많아서 더욱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렴하고 간에도 좋은 건강식 올갱이국을

먹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이지당에서 네비를 켜니 매우 가까웠다.

 

 

 

 

 

1. 옥천(沃川) 육영수 생가(陸英修 生家)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 소재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

이 가옥은 육영수 여사가 1925년 태어나 1950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으며 흔히 ‘교동댁(校洞宅)’이라 불려졌던 옥천지역의 명문가이다.

1600년대부터 삼정승[김(金)정승, 송(宋)정승, 민(閔)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1894년에

전형적인 충청도지역 상류주택의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그 이후 1918년 육여사의

아버지 종관(鐘寬)씨가 매입하여 건물의 기단을 높여 개축하였는데 각기 독립된 아랫집,

큰집, 윗집, 사당 영역으로 구획하고 담장, 협문, 부속건물로 적절 히 배치하였다.

 

 

 

 

 

 

 

 

 

 

 

1969년 본래의 모습과 다른 현대식 한옥으로 개축하여 사용되어오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퇴락되었고 1999년 철거되었다. 2002년 4월26일 이 생가터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12월 안채 복원공사를 시작으로 수차례 의 발굴과 자문회의 등 고증을

거쳐 2010년 5월에 안채,사랑채,위채,사당 등 건물 13동과 부대시설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육영수 여사의 어린이를 위한 육영재단을 설립하였고 양지회(陽地會)등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자선봉사활동을 하였으며 대통령의 훌륭한 내조자이자 한국의 어머니로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범례 ①대문,곳간채,②창고,③사랑채,④중문채,⑤연당사당,⑥위채,⑦정자,⑧사당,⑨안채,⑩뒤주,

⑪연자방아,⑫아래채,⑬아래대문채 (by 안내글 복기) 

 

                                                    위는 사랑채, 아래는 연당사랑

 

                                                                  중문채와 위채

 

 

 

 

                                                               사당과 아래채

 

 

 

 

 

✐ 우리 부부는 몇 년전 구미의 박정희 생가를 방문했었고, 현충원의 내외분

묘소를 방문했으며 금년에는 안성의 영평사의 추모관을 부부, 동창들 두 번 도합

세 번이나 들렸는데 故박정희대통령과 연관있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4월 15일에야

방문한다는 미안함이 들어 되도록 엄숙하고 예를 갖춘 태도로 꽤 넓은 터를 모조리

돌아보았고 1974년 8월 15일 서거 이후의 애절한 그리움의 박정희 대통령의 시

몇 수를 보면서 우리가 처했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겨 본다.

 

 

우리 국민들은 나 부터도 좋은 점보다 나쁜점을 앞세우는 습성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 시대를 살기 위해서는 아주 저항하거나 미지근하게 연명하거나

협조적이면서 속내를 감추고 옳은 일에 많은 협조를 한 분들을 매도하는 사람들을

본다. 현재의 시국에서도 자신은 올바른 일만 한 사람인양 떠들다가 치부를 들키면

꼬리 내리는 지식인을 많이 봐 왔다. 모두가 저항했으면 일제치하 이후의

자유대한민국은 지금 있지도 않을 것이다. 왜정시대 잘 산다는게 죄악일 수는 없다.

뒤로 독립자금을 댄 분들이 친일파라는 잣대를 대는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런 잣대를 댄 분들은 그 당시 떳떳한 생활을 했을까? 그러한 조사에 앞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자금으로 쓰는게 옳은 일이 아닐까 한다.

육종관씨(육영수의 부친)를 친일파로 글을 쓴 분이 있어 묻고 싶은 마음에서 제가 아는

몇 분의 친일 뒤에 서민의 배를 채워준 분들을 알고 있어서 덫붙여본 이야기이다.

 

 

 

 

2. 옥천향교(沃川鄕校)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옥천군 옥천읍 향수 8길 8

①대성전(大成殿),②서무(西廡),③동무(東廡),④내삼문(內三門),⑤홍도당(紅箭門),

⑥명륜당(明倫堂),⑦사주문(四柱門),⑧창고(倉庫),⑨고직사(庫直舍)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향교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하여 앞에는 유교 교육을 위한 강당(講堂)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중간에는 내삼문(內三門)을 두었고,

그 뒤편에는 문묘(文廟)인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있어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실시되자 점차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문묘의 제사만 남아 오늘 에 이르고 있다.

옥천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다. 명륜당은 세종 22년(1440)에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여러 차례 수리하여 오다, 오늘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부속건물로 기숙사인 홍도당과 관리인의 거처인 고직사 등이 있다. (by 안내글복기)

 

✐육영수 여사의 생가와 바로 이웃한 홍살문을 지나서 명륜당이 앞에 있으나 출입문은

굳게 잠겨서 겉의 모습만을 둘러보고 나올 밖에 없었다. 아마 춘계석존대제를 지낸

이후의 마무리를 깔끔히 정리하지 못해서일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발길을 되돌렸다.

근자에 돌아본 향교가 열린 곳을 보지 못한 듯 했다. 이는 어찌보면 유교의 폐쇄성에서

나오는 소치는 아니었을까? 다음번의 고장에서도 향교를 들리면 이와같은 경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며, 옥천읍 구읍의 일부를 마무리 합니다.

 

                                                  3부에서 다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