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 사적 제212호(1970.10.01),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상당산은 청주시 동북쪽 상당산(492m) 위를 두른 산성으로,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산성이라는 이름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인 서원소경이
신문왕 5년(685)에 청주에 설치되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하며, 경덕왕 16년(757)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어 상당산성의 구실로 더욱 커졌을 터인데, 산성 남문 밖에서 ‘사량부’라는
신라 6부의 하나가 적힌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통일신라 때 이곳에 관리와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상당산성은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원균이 충청병사로
있을 때 수축한 적이 있고(1592) 숙종 42년(1716)부터 4년에 걸쳐 석성으로 개축
되었다. 산성의 면적은 12.6ha(126,000㎡), 성 둘레 4,400m이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에 토사(土砂)를 쌓아 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동•서•남방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정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동문과 서문도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m,너비 2.8m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이 있고 동남방의 수문은 오래전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사라졌다. 성내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의 터가 있으며 1971년부터 성벽과
누문이 복원, 수리되었다. (by 두산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북 발췌)
같은 바위를 이동하면서 3장을 찍어봤다.
✍ 월요일인데 산성 안동네의 음식점은 자가용의 홍수를 이루었고, 음식점 가까이 차를
주차하지 못하고 저수지 아래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올라와 길가 두부집을 열고
들어서니 앉을 자리가 없는 초만원이다. 골목길 약간 오름에 위치한 ‘연송’에서도 쉽게
자리는 잡았으나 한참 후에야 따끈한 두부가 나오고 청국장이 나온다. 산성을 한바퀴 돌
예정이라 막걸리(산성막걸리는 청주에서는 유명세가 있다) 반되를 시켜서 5잔을
딸았는데도 남아 옆자리에 먹으시라 양보했다. 광교의 식단과 너무 대조가 되어서 증빙을
담았다. 얼근한 기분에 밖으로 나와 산성의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연송식당의 7천원 짜리 청국장과 산성막걸리, 게다가 찰밥을 조금주고 밥도 준다.
✾ 상당산성 보화정(上黨山城 輔和亭/동장대 東將臺) [조선시대 후기에 상당산성을 수축하여
충청도병마우후가 항상 주둔하여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지휘소인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어 서로 마주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이 건물과 관련된 1747년(영조 23)에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필구(李必垢)가 지은 보화정기
(輔和 亭記)의 글이 남아 전해온다. 동장대는 6칸 규모의 건물로 「상당산성도(上黨山城圖)」
에도 보화 정이 그려져 있고 건물 이름도 보화정이라 기록돼 있다.
동장대는 이미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발굴조사를 거쳐 당초 있었던 자리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던 주춧돌 사이의 간격이 포백척(布帛尺: 베의 길이 등을 재던 자)으로
환산되므로, 이 수치를 기준으로 복원하였다.
상당산성의 대대적인 수축 공사의 맨 마지막에 완성된 건물로 낙성과 관련된 기록이 남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 성벽으로 5분여 오르니 동장대인 보화정이다. 이곳은 다소 낮은 위치이지만 시야가
확 트여서 전쟁시 지휘를 하기에는 손색이 없었을 것 같았다. 동장대를 지나면서는
다소 오름이나 삼년산성이 작은 돌(마치 벽돌 같은)인데, 여기는 조선시대의 돌들로
쌓여진 석성이다. 오름을 오르니 동문격인 진동문이 깔끔히 단장한채 우리를 맞는다.
진동문에서 안내글을 보지못해 다른 분의 블로그를 뒤지니 설명문이 없다. 진동문
(鎭東門)을 지나니 산성 안에는 벚꽃이 화사하다. 산의 능선에 쌓은 석성은 휘어져
쌓았기에 따로 치성을 두지 않더라도 방비하는데는 좋았을 듯 했다. 진동문을 지나
15분여 동북암문에 닿는다.
✾ 상당산성 동북암문(上黨山城 東北暗門) [암문은 작게 만든 사잇문으로 적군에게 그 위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다.
상당산성에는 남문과 동문 및 서문의 세 대문이 있고, 서남암문과 이곳 동북암문이 있다.
상당산성의 북쪽에는 성문이 없고 동쪽 성벽에는 수문과 동문이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있다. 성의
안쪽과 바깥으로 통하는 능선이 남쪽으로 이어진 위치에 동북암문을 만들었다. 이 암문은 동북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드나드는 곳일 뿐만 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로
나가서 에워쌀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마련하였다.
규모는 정면의 너비 약 137cm, 높이 162cm이고, 안쪽에서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막는
구조이다. 특히 이 암문의 안쪽 옆면에 새겨진 면문에는 암문을 만든 책임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1728년(영조 4)의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李麟佐之亂)]때 성문을 열고
반란군에 가담했던 인물이 있어 사실을 실증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 한바퀴 돌 욕심에 암문에 새겨진 이름은 찾지 않고 진행하니 한남금북정맥
이정표가 있다. 동북암문을 통해서 상당산성자연휴양림도 갈 수 있는 곳이다.
산성은 마치 뱀이 기어가듯 능선을 이어가다가 상당산성 북쪽수구를 만난다.
✾ 상당산성(上黨山城) 북(北)쪽의 수구(水口)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거나 내보내는 시설을
수문(水門)이라 하고, 규모가 작은 것을 수구(水口)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排水)장치로 남문과 동문 사이에 수문이 설치되어 많은
성안의 물을 내보냈으나, 수문으로 몰려들지 않는 곳의 물을 내보내기 위해 서쪽 성벽 두 곳과
북쪽 성벽에 한 곳의 수구를 만들었다.
북쪽 성벽의 수구는 북쪽 성벽이 작은 계곡물을 모아 내보낼 위치에 성벽 중간을 통과하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성벽 안쪽으로 모여든 물이 모아져 나가는 배수로는 성벽 속으로 도랑을 낸것 이다.
바깥에서 보면 수구는 정면이 네모꼴이며 성벽 중간에 있다. 바깥의 낙수면 아래, 즉 성벽 바깥은
돌 다짐 위에 기단석을 두고 약 28cm 안쪽으로 들여서 성벽을 5층 약 120cm 높이까지 축조 하였다.
수구 바닥에는 너비 80cm, 두께 16cm의 넓은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너비 32cm 공간 을 두고 높이
34cm 크기로 수구를 둔 위쪽에 너비 75cm, 두께 18cm의 뚜껑돌을 얹었으며 그 위로는 다시 성벽을
쌓았다. 수구의 안쪽은 길이 200cm, 너비 34cm, 높이 35cm 크기의 배수로이다. 배수로 바닥 역시
판석을 깔고, 옆면은 좌우 한 층씩 벽석을 두고 위에 뚜껑돌을 얹어 밖 으로 약 15도의 경사를 이룬다.
이 배수구에 이어지는 안쪽에 너비 250cm, 길이 210cm 크기의 타원형 석축이 있어서 이곳에 모인
물이 나가도록 되어 있다.
위,아래 사진의 가장 낮은 곳에 검은 구멍 두 개씩 있는데 이것이 북쪽 수구이다.
✍ 수구의 설명을 담고 구멍을 들여다 보니 맨홀처럼 조그만 구멍도 막힌 채이다.
성 밖으로 흔적도 뚜렷치 않아 앞으로 진행하다가 흔적을 뒤돌아 담았다. 청주공항이
흐미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다소 높은 곳으로 10여 분을 휘어져 오르는 성벽을 따르니
포루터라는 곳이 나온다.
2부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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