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3. 고운사 등(2018년 11월 11일)-1

아름답지만~ 2018. 12. 3. 19:57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등운산(騰雲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681년(신문왕 1)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고운사(高雲寺)라 하였다.

그 후 최치원(崔致遠; 857~?)이 승려 여지(如智)·여사(如事)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여 최치원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헌강왕 때는 도선(道詵)이 약사여래석불과 석탑을 안치하였고, 948년

운주(雲住)가 중창하였다.

1018년(현종 9) 천우(天祐)가 대웅전·약사전·극락전·적묵당(寂默堂)·설선당(說禪堂)

·동별실(東別室)·서별실(西別室)·관음전·금당(金堂)·백련당(白蓮堂)·회운당(會雲堂)

·청풍당(淸風堂)·문수전(文殊殿)·양로당(養老堂)·백련암(白蓮庵) 등을 중창하였다.

극락전에 봉안한 관음상은 천해(天海)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

(大興山)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1482년(성종 13) 석가여래불상을 안동 갈라산(葛羅山) 낙타사(駱駝寺)에서 옮겨와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며, 1646년(인조 24) 소영(昭影)의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1668년

극성(克成)·승묵(勝默)·덕종(德宗)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고, 처순(處淳)이 천왕문

(天王門)을, 설행(雪行)이 봉황문을 신축하였다.

 

 

 

1670년(현종 11)숭해(崇海)·묘선(妙善)·성준(性峻)·인준(印峻) 등이 명부전을 신축하고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였으며, 종헌(宗憲)과 설휘(雪輝)는 영각(影閣)을 짓고 영정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다. 1681년(숙종 7) 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683년 관헌(灌憲)·인잠

(印岑)·선초(善初)가 팔상전(八相殿)을 신축하였으며, 1686년 4월 명부전을 중창하였다.

1695년 도청(道淸)과 선조(禪照)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이전의

관음상과 함께 삼존불상을 구비하였다. 행옥(幸玉)은 설선당을, 태운(泰運)은 적묵당을

중건하였고, 선특(禪特)과 성담(性談)은 동별실을, 성관(性觀)은 서별실을 중수하였다.

또, 태눌(泰訥)은 청풍당을 중건하였고, 승하(勝下)는 응향각(凝香閣)을, 의율(義律)과

의잠(義岑)은 백련당을 중수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법존(法存)·지훈(智勳) 등이 운수암(雲水庵)을 창건하였고, 1729년

신유한(申維翰)이 사적비를 세웠다. 1744년 어첩봉안각(御帖奉安閣)을 건립하였으며,

1797년 의암(義巖)이 백련암을 중창하였다. 1803년(순조 3) 4월 적묵당과 서별실이 화재로

불타 없어지자 1804년 2월 문찰(文察)이 중건하였고, 1812년 의암이 운수암을 중건하였다.

1835년(헌종 1) 2월 백련당·금당·관음전·군포고(軍布庫)·직사고(直舍庫)·영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타 없어지자, 나라에서 홍종호(洪鍾浩)에게 명하여 만송(晩松)·호암(虎巖)·수열

(守悅) 등과 함께 대웅전과 금당을 중건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운수암이 불타 없어지자

1838년 함홍(涵弘)이 중건하였고, 1868년 눌암(訥庵) 등이 만성제(晩惺齊)를, 해송(海松)이

우의당(禹儀堂)을 건립하였다.

1899년 포운(抱雲)·혜은(惠隱) 등이 가운루·우화루·동별실·적묵당·연지암(蓮池庵)·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901년 만선(滿船)과 추산(悉山)이 운수암의 해운루(海雲樓)를, 1902년 연수전

(延壽殿)을 건립하였으며, 1904년 포운 등은 금당을 중수하였다.

1906년 안동·예안·의성·지례·선산·금산·용궁·비안·군위·의흥·청송·진보·순흥·봉화·영천군

등에 있는 사찰에 대한 관리를 종무원(宗務院)에서 부여받았다. 1912년 30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으며, 1913년 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되면서 경상북도 내의 46개 사찰을 말사로 관장하였다.

1924년 주지 만우(萬愚)가 약사전을 중수하고 대정암(大定庵)을 창건하였으며, 1935년 주지

영호(泳鎬)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가운교(駕雲橋)를 만들었다. 1936년 명부전과 선열암을

중수하고 천왕문을 옮겨지었다. 또한, 1934년에는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안동 포교당

·와룡 포교당·의흥 포교당 등을 두었다.

30본산 당시 논 6만 3,664평, 밭 17만 9,634평, 대지 942평, 사사지(社寺地) 4,189평, 산림 260정

(町) 3반(反)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의성·안동·영주·봉화의 4개 시·군, 54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금강문·가운루·적묵당

·우화루·동별실·서별실·금당·회운당·고운대암(孤雲大庵)·고금당(古今堂) 등 총 25동이 있다.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46호인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인 고운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고운사 가운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70호인 의성 고운사 연수전, 사적비, 사보(寺寶)로 전해지고 있는

오동학촉대(烏銅鶴燭臺)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로 불타 없어진 후 중수된

가운루나 각각 18세기, 20세기에 세워진 사적비나 연수전과는 달리 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층석탑은 현재 나한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으며, 아래층 기단에는 희미한 안상(眼象) 무늬가 보이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약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치켜

올림이 크지 않고, 밑면에 1층은 4단, 2·3층은 3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돌),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뒤집혀진

앙화(仰花: 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등을 올린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가

많이 닳아 있고, 아래층 기단이 특히 심하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줄어든 규모나 지붕돌의 조각양식 등에서 시대가 조금 내려간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BY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운사 가운루(孤雲寺 駕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고려 정종(定宗) 3년(948) 현종(顯宗) 9년(1018)에 중창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

(四溟大師)가 승병의 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헌종(憲宗) 원년(1835) 소실되어 만송, 호암,

수월선사 등이 중창하였으나, 1970년대에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특히 중기 양식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형식이

각기 다른 시대의 수법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초익공(初翼工)계인데, 건물의 귀퉁이에 세원진 기둥만 이익공(二翼工)으로 꾸며진 것이 특이하다.

가운루는 길이가 `16.2m에 달하는 대규모 누각으로 세쌍의 가늘고 긴 기둥이 계곡 밑에서부터

이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고운사 연수전(孤雲寺 延壽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4호,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20년(1774)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1887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연수전의 구조는 만세문 현판이 걸린 솟을 대문에 사방 담을 쌓고 가구식 기단에 겹처마 형식의

팔작지붕이다. 또한 연수전은 평면 형태가 사찰의 여타 전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숭유억불 시대에 사찰 내에 배치된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고운사 석조석가여래 좌상(孤雲寺 石造釋迦如來 坐像)

보물 제246호,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이 불상은 높이 79cm이다. 불상 받침대인 대좌(臺座)와 불상 뒤 원광인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크지 않으며 코에 인중이 뚜렷하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다. 아랫입술 중앙이

오목하게 파이고 턱은 살이 붙어 이중으로 되어 있다. 양쪽 귀도 얼굴에 비해서 작은 편이고, 굵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치켜 올라간 어깨로 인해 목은 더욱 짧게 보이고 가슴은

잘 발달되어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밀집된 같은 간격의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불상은 솟아오른 살에 불분명한 머리, 짧은 두 귀, 네모진

상체에 나란히 흘러내린 옷주름선 등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〇둘러보기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지를 잠시 보고 가려고 우회전해 지붕이 설치된 화석지는 어찌된

사연인지 가림막으로 완전히 덮여 있다. 잠시 세우려다가 그대로 통과한다. 아쉽지만

예전의 기록으로 아쉬움을 대신하고 고운사로 달려갔다.

전에 다녀간 곳이기에 차를 일주문 안까지 가 일행은 사찰 내를 차근차근 돌아 보았으나

전보다 많이 퇴락한 모습으로 비쳤다. 많은 건물들을 보유하고는 있으나 그 옛날의

영화로움 보다는 쓸쓸함과 관리가 힘든 모습으로 비춰졌다. 가운루의 안으로 들어가

사찰의 범종을 담고 대웅보전에 들어가 예의를 갖춘 후 나와 좌측으로 만세문을 가진

연수전 등을 돌고 약사전에 모셔진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뵙고 삼성각이 보이는 곳까지

둘러서 무설전을 거치고 호랑이벽화를 둘러보고 떠났다.

 

 

위 세 장의 사진은 12년 3월에 봤던 사진을 대신 올립니다.

 

 

 

 

 

 

 

 

 

 

 

 

 

                                              2부로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