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홍주읍성(洪州邑城) 지정별: 사적 제231호, 지정년월일: 1972년 10월 14일
최초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 7년(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금봉 3천냥과 원납금, 지세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축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曲城),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 (虹霓門)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文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
(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철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하면서 동문 마져 훼철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읍성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 만이 남아 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홍주읍성의 옛모습[1.동문,2.서문,3.남문,4.북문,5.동헌,6.내아,7.책실,8.급창방,9,사령청,
10.관청,11.공고,12.내삼문,13.외삼문,14.전영동헌,15.전영내아,16,전영내삼문,17.전영문루,
18.향청,19.작청,20.장청,21.관노청,22.토표청,23.집사청,24.장관청,25.사창고,26.도청,
27.군기청,28.군기고,29.옥,30.객사,31.남관,32.사달정,33.여하정,34.홍주역사관,35.민속마당,
36.홍상,37.수로,38.연지,39.전통민속마을,40.수성비,41.관리사무소,Ⓟ주차장,화장실]
홍성군에서는 홍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홍주읍성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홍주읍성 주요문화재
[1.홍화문(洪化門;南門),2.홍주성수성비(洪州城修城碑),3.병오항일의병기념비(丙午抗日義兵記念碑),
4.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5.우물터(井址),6.옥사(獄舍),7.홍주아문(洪州衙門),8,안회당(安懷堂),
9.여하정(余何亭),10.오관리느티나무]」
[1.홍화문(洪化門;南門),2.홍주성수성비(洪州城修城碑),3.병오항일의병기 념비(丙午抗日義兵記念碑),
4.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5.우물터(井址),6.옥사(獄舍),7.홍주아문 (洪州衙門),8,안회당(安懷堂),
9.여하정(余何亭),10.오관리느티나무]
4) 순교성지(殉敎聖地)
홍주성지순례길[①동헌-②감옥터-③진영-④저잣거리-⑤참수터-⑥생매장터]로 읍내에
이곳 저것으로 정돈되어 괄호의 번호와 같이 다녀온 곳을 기록한다.
② 감옥: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의 (마지막) 신앙고백이다.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얼려 죽인것이다. 이곳 홍주감옥은 천주교 박해기간
동안(1791~1869)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113명으로 최고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다.
이곳에서 교수형이 제일 많이 자행되었다. 순교자들의 옥중 생활은 너무나 비참 했다.
최고의 고통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그리고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생명을 단축시켰다.
특히 이곳은 프랑스 선교사로 첫 번째,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뎅
신부가 1839년도 기해박해 때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다. 또한 한국교회사
집필에 최고의 공로자인 성 다블뤼 주교와 그 일행인 성 위랠 신부, 성 오매트르 신부와
성 황석두루까, 6명의 성인들이 머물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③ 진영: 이곳은 조선시대에 홍주 진영의 동헌(경사당)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당시 진영을 관장하던 진영장(정3품)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토포사의 직임을
겸하고 있었다.
천주교 박해 후기에는 이곳으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다리뼈가 부서졌으며,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들은 형리들에게 튀어나갔고,
부서진 등뼈는 가죽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살(죽을 때까지
때리는 형벌), 집단구타와 백지사(창호지로 질식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 진다.
이곳은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다. “배교한다는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는 유혹이 순교자들의 신앙을 위협하였으나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은 “죽음을 당할지언정 제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④ 저잣거리: 이곳은 조선시대 홍주성 안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고 번화했던
저잣거리이다. 특히 장이 서는 날이면 이 일대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그러나 옛 저잣거리(장터)는 천주교 신자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시대 때 각처에서 체포된 신앙 선조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 목사나 진영장의
동헌으로 끌려갔고, 혹은 옥살이를 하러 가야만 했다. 때때로 신자들은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저 놈이 천주학쟁이다’라고 소리치 며 욕설을 하면서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곤 하였다.
순교자들에게로 쏟아지는 무수한 조롱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어리석음이었다. 순교자들이 묵묵히 나아가는 하느님 대전의 진정한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홍주의 옛 저잣거리는 순교 선조들의 신앙과 애환이 깊게 베어 있는 곳이다.
⑥ 생매장터: 이곳은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들이 너무
많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인들을 생매장한 곳이다.
이곳은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가장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처리하기에 적합하였다. 천주교 박해시대 때 홍주(옛 홍성의 지명)에서는
생매장을 당해 순교의 영광을 얻은 신자들이 탄생하였으니, 그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던 무진년(1868년)에 최법상(베 드로),
김조이(루치아), 김조이(마리아), 원아나타시아 등이 바로 이 형벌로 순교 하신 분들이다.
이들 네 분의 순교자들은 모두 홍주 원머리(현재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출신으로, 한날
한시에 체포되어 홍주성으로 끌려왔다.
이들 순교자들은 혹독한 문초와 형벌에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하나의 구덩이에 들어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덩이를 받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
박해시대 홍주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이들의 시신도 생매장 터 인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379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항일구국운동 가운데 제일 규모가
크고 가장 치열한 항전을 벌였던 홍주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이다.
1906년 3월 이조참판을 지낸 민종식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은 홍주읍성을 공격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해 5월 9일 홍산(현 부여군 내산면)에서 다시 일어나 서천, 비인,
남포, 결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홍주 삼신당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기며, 20일 홍주읍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31일 새벽 동문에 이어 북문이 폭파되고,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홍주의병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홍주읍성에서 물러났다.
이때 홍주읍성과 홍성천 주변에 흩어져 있 던 의병들의 유해는 1949년 이후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현재의 홍주의사총에 봉안되었다. <홍양일기><홍양기사>등의 자료에 따르면,
홍주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는 최소 80여 명 이상, 최대 수백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성역화가 추진되어 지금은 중앙에 의사총을 중심으로 동쪽에 창의사, 북쪽에 숲길
(탐방로)과 홍주의병기념탑이 조성되어 있다.
의사총 배치도[❐관리사무소,①의사총묘역,②창의사,③창의문,④진충문,⑤홍주의병기념탑,❐화장실]
3부로 이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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