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기봉사(奇峰祠: 최영장군 사당) 위치: 홍성군 홍북면 최영장군길 57(대인리 산39-7)
고려시대 무신인 최영장군의 사당이다. 최영장군은 1316년 고려 충숙왕 때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나 16세 때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을 교훈 삼아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고려의 건국 이상인 옛 고구려땅 만주 벌판을 되찾는데 노력하였으며
홍건적을 격파하고 1360년 남쪽 지방을 괴롭히는 왜구를 섬멸하고 1375년 홍산대첩
(鴻山大捷)등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우왕은 장군에게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벼슬을 주고 전토와 노비를 상으로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73세(1388) 고령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맡았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우리의 북쪽 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기의 땅이라고 하자,
장군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옛 고구려 땅인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거 체포되어 고봉(고양),
합포 7월에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12월에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되었다. 민중들은
최영을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인식해 무 속에서는 장군신으로 모셔지고, 고려 말 조선 초
관료를 지낸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다음과 같이 최영에 대한 시를 남겼다.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하노라 살쩍이 하얗고 奞威匡國薲星星(순위광국빈성성)
말 배우는 거리의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 學語街童盡識名(학어가동진식명)
한 조각 장한 마음만은 응당 죽지 않았으리 一片壯心應不死(이편장심응불사)
천추에 길이 대자산과 함께 우뚝하다 千秋永與太山橫(천추영여태산횡)」
by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고양군 능묘조 최영묘
또 고려 말 조선 초 문인 원천석(元天錫: 1330~?)도 최영을 기리는 시가 있다.
「거울이 빛을 잃고 주석이 무너지니 水鏡埋光柱石頹(수경매광주석퇴)
사방의 백성이 모두 슬퍼하네 四方民俗盡悲哀(사방민속진비애)
빛나는 공업은 끝내 썻는다하더라도 赫然功業終歸朽(혁연공업종귀후)
꿋꿋한 충성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으리 確爾忠誠死不灰(확이충성사불회)
by <성호사설> 권20, 경사문[崔瑩攻遼(최영공요)]
※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으나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해 현재는 풀이 무성하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며,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에 있다.
최영장군의 묘소는 다른 분 카페에서 차입해 사용했다.
7) 성삼문유허지(成三問遺墟址)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 114-1 외
이곳은 성삼문(1418~1456)선생의 유허지이다. 성삼문 선생의 외할아버지 고택
(古宅)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선생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 번 물은 일에 있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성삼문 선생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로 자(字)는 근보(謹甫),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다.
1445년(세종 27)에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웠고, 1447년 신숙주,최항,박팽년,
이개,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다.
위는 유허비와 비각, 아래는 노은단에서 내려다 본 사당과 인근 풍경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성삼문은 죽기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를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낙장송(落落長松)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 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위는 노은단, 아래는 충절문의 안쪽 모습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다.
1676년(숙종 2)에 이량(李湸)이 선생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택의 아래에 노은사(魯隱祠)라는 사우(祠宇)를 세웠다. 1692년 녹운서원
(綠雲書院)으로 사액되었고, 1709년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 헐리게 되니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고택의 위에
묻고 노은단(魯恩壇)을 세웠다. 매년 10월 20일에 제향(祭享)을 지내고 있다.
위는 논산시 가야곡면에 직접 찍은 것이고, 아래 노량진 사육신묘의 것은 타인 것 차입
8) 에필로그: 홍성 하면 1900년대는 양계업의 집산지이고, 지금은 양돈업의 집산지로
변한 축산으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어쩌면 아주 순박한 사람들로 구성된
삶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의 고향일 것이다.
역사적인 공부로 방문 계획을 세우고 찾아본 홍성은 의외로 역사적 인물이 많은 곳이다.
불운한 시대를 살다가 가신 분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영장군, 성삼문선생, 김좌진장군 모두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가신 분들이며
한용운선생이나 미술가 이응로선생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 평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가셨으니 우리의 삶을 그 분들과 접목시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생매장터 인근 홍성천의 철새인 청동오리떼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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