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의 역사
「배다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때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다양한 사료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전국 곳곳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전해지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선조들이 세운 교량 가운데 배다리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789년, 정조께서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로서 설치 규모의 웅장함과
화려함, 교량의 설치 기법 등에서 단연 세계 최고로 꼽힌다.
정조께서 양주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로 이전하고 능호를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매년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여 현륭원을 참배하였는데 이를 위해 다산
정약용 선생 등이 참여하는 주교사(舟橋司)를 설립토록하여 배다리를 건설하고 관리하였다.
여기 세미원에 정조시대의 배다리를 재현하여 민족 고유의 문화 유산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자 했던 정조의 효행과 설계에 참여했던 정약용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한다.
세한정기(歲寒庭記)
본 사업은 국보 180호인 추사 김정희선생(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기본으로 하여
세미원의 한 부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소재로 정원을 조성하고 그 이름을 세한정(歲寒庭)이라
명명하였다. 그림 속에 담긴 송백의 늘 푸르른 정신과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었던 변치않는
공경과 사랑과 신뢰의 장모상망(長母相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인성 함양의 장을 만들고자 한다.
나아가, 오늘의 세한도가 있기까지 150여년의 다사다난했던 역정(歷程)을 살필 수 있도록 하여
우리 문화재들의 수난과 그를 지켜내려는 선조들의 노력도 함께 살필수 있는 역사의
산 학습장을 조성하였다. ‘약속의 정원’은 청공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쓰고 세한정(歲寒庭)과
송백헌(松柏軒)은 추사 선생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주최: 경기도, 양평군, 주관: (재)세미원, (사)우리문화가꾸기회
세한도의 긴 여정 [세한도가 오늘에 있기까지]
세한도는 200여년 동안 이리저리 유랑의 길을 걸어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유배 생활 중이던 1839년, 세한도를 완성하여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다. 제자 이상적은 스스이 보내준 세한도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의 학자들에게 보여주고
제영을 받아 다시 제주도의 스승께 보여 드린다. 그후 세한도는 일제시대 때,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 국대학의 일본인 후지츠카 교수의 손에 넘어가고 후지츠카 교수는 세한도를 일본
동경으로 가져 간다.
이에 서예가 손재형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후지츠카 교수에게 두 달여간의 끈질긴 설득 끝에
1944년,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찾아 온다. 공교롭게도 그 해 후지츠카 교수의 집이 폭격을 맞아
많은 추사의 자료가 불타 버린다.
‘세한도의 긴 여정’은 세한도가 이렇듯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있기까지의 과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려 전하고자 제작되었다.
어린 시절
1. 명문의 집안에서 귀하게 태어나다 1786년(정조 10년, 1세)
추사는 1786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던 이름 난 명문 가문인 경주 김씨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영조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가 증조모로 왕실의 훈척(勳戚)이었다.
어린 시절
2. 어릴 적부터 글씨를 잘 써 세상을 놀라게 하다. 1792년(정조 16년, 7세)
어릴 적부터 글씨를 잘 써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당시 73세였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추사가 쓴 입춘첩을 보고 글씨로 이름날 것을 예언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8세 때는 절손(絶孫)이
된 큰아버지 댁으로 양자를 가게된 후 어린 나이에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문안 편지를 남겨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중국의 학문
3. 중국에서 학문의 세계를 넓히다. 1809년(순조 9년, 24세)
24세 젊은 나이로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 평소에 만나고 싶던 대학자들을
찾아 뵙고 학문을 토론하여 중국 학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중국의 원로학자인 옹방강(78세)과
학계의 떠오르는 학자인 완원(47세)은 추사에게 실학 고증학 등의 핵심을 알려주며 추사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
학문의 세계
4. 조선의 금석학을 발전시켰다. 1816년(순조 16년, 31세)
추사의 학문 세계는 유교는 물론 불교,노장,실학 그리고 금석학,고증학에까지 다방면에 일가견을
이루어갔다. 31세에 북한산에 있는 이름 모르는 오래돤 고비(古碑)가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처음 밝혔다.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하기 위해 여러 차례나 북한산 비봉에 올랐으며
우리나라의 옛 비문들을 연구하여 조선 금석학을 독리된 학문분야로 발전시켰다.
화려한 출세
5.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다. 1819년(순조 19년, 34세)
성균관 유생에게 치르는 시험에서 제술(製述; 글짓기)로 수석을 차지하였고 이듬해 4월 25일
문과(文科)에서 병과(丙科) 8위로 급제하였다. 드디어 관직에 올라 정치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세자를 보좌하였으나 이로 인해 소인배들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추사의 귀양
7. 누명을 쓰고 제주도에 유배되다. 1840년(헌종 6년, 55세)
경주 김씨 가문 중에 특히 안동 김씨의 집중적인 모함을 받은 추사는,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귀양 가는 뱃길 중간쯤 갑자기 풍랑이 심하게 일어
모든 사람들이 죽었구나 하고 체념을 했지만 추사는 뱃전에 홀로 앉아 배의 방향을 정확히
알려주어 아침에 출발한 배가 저녁에 무사히 제주에 도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우선의 선물
8. 우선이 중국에서 책을 구해준다. 1843년(헌종 9년, 58세)
추사의 타는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모금의 시원한 냉수가 있었으니 바로 제자 이상적
(李尙迪; 1804~1865)의 책 선물이었다. 스승의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선 이상적은
대대로 통역관이었다. 사행(使行)으로 중국 북경에 갈 때마다 새로 발간되는 명서들을 구해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북경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말에 실리고 배에 실리고 등짐에 지워져
스승 추사에게 전달되었다.
외로운 추사
9. 외롭고 쓸쓸하게 귀양살이하다. 1843년(헌종 9년, 58세)
제주도 남쪽 끝 바닷가의 조그마한 집 탱자나무 울타리, 감옥 아닌 감옥속에서 허름한 잠자리
보잘 것 없는 시골음식,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로움은 겹겹이 몰려오는 모진 파도와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괴로움보다 더 모진 고통이 있었으니 손에 들고 읽을 마음의 양식인 책이 없다는
것이다. 독서에 대한 갈급함이 지식인으로서 가장 견디지 못할 고문이었다.
세한도의 여정
11. 조선 최고의 문인화가 탄생하다. 1844년(헌종 10년, 59세)
세한도를 완성한 후 추사는 무언가 허전하였다. 심심 파적으로 돌 하나 집어 들어 칼을 대기
시작했다. 장무상망(長母相忘),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새긴 네 글자의 인장을 세한도의
한 귀퉁이에 찍으면서 추사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여보게 우선! 우리 영원히
잊지마세! 정말 고맙네!” 추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세한도의 여정
12. 중국의 지성들이 감동받다. 1845년 (헌종 11년, 60세)
우선은 세한도를 가지고 중국 연경에 가서 추사와 교분이 있거나 홍보하던 중국 학자들을 모아
세한도를 펼쳐 보였다. 중국 학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깊은 신음소리 같은 탄사가 여기저기
쏟아졌다. “추사 선생도 훌륭하고 이상적 당신도 훌륭하오. 이 세한도 또한 세상에 없는 놀라운
보물이오!” 단번에 13명의 학자들이 제영(題詠)을 앞다퉈 썼다. 참여하지 못한 학자들의 제영도
후에 함께 하게되어 16명의 제영이 세한도의 뒤를 장식했다.
참애국 1.
13. 손재형 나라의 보물을 되찾아오다. 1944년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지 80여년 후 우여곡절과 갖은 풍상을 거치며 세한도는 흘러흘러 후지즈카
경성제국대학교수(1879~1948)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전세가 불리해 짐을 깨닫고 고향인
동경으로 들어가면서 추사 선생의 모든 자료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 소식을 접하고 가장 놀란 사람은
서예가로 명망 높은 손재형(1903~1981)이었다. 추사 자료의 해외 반출이 안타까웠다.
참애국 2.
14. 민족의 보물이 불타버릴 뻔하다. 1944년
“돌려 주십시오.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작품입니다. 돈은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세한도 하나
만이라도 돌려 주십시오.” 두 달여 무릎 꿇고 끈질기게 간구한 손재형의 손에 드디어 세한도
작품이 들려졌다. “좋소, 당신의 열정이면 이 세한도를 잘 보전하리라 믿소. 조심해서 가지고
가시오. 세상이 온통 포화 속이오!” 세한도를 받아든 손재형은 벅찬 가슴을 누르고 귀국했다.
우연일까? 얼마후 후지즈카 교수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추사의 많은 자료들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세한도의 귀환
15. 잘했구나! 잘했어 1949년
손재형은 상당 기간 세한도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과 그리고 좌우의 분열과
혼란 등이 이유였으리라.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1949년 애국심이
남다르고 학문의 세계가 당대 최고였던 정인보,이시형,오세창 선생을 찾아가 세한도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발문을 받았다. “자네 같은 사람의 애국심 덕택에 우리가 해방되고 독립이 된 것이네.
잘했구나! 잘했어!
엄마의 정원을 만들며
세미원이라는 공간은 저에게 참 소중한 곳입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엄마와 조금씩 화해 할
무렵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엄마께 죄송한 마음에 바람도 쐴 겸하여 세미원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그 무렵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나에 대한 안도감과 모처럼 나누는 차분한 대화, 예쁜 연꽃을 보시며
참 좋은 곳이라고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엄마와 나의 추억이 있는 이곳에서 한해 한해 늙어가는 엄마를 보는 안타까움을 젊은 날의
엄마와 아기였던 나, 그리고 내가 커서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며 느꼈던 기쁨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고 고민하며 엄마와 아이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한 작업을 전시 하고 싶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이곳에서 세 번의 전시를 하여보니 많은 분들이 눈물로 웃음으로 그리고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 주시며 공감해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는 비슷한 추억과 아픔이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 소중한 공간을
점유한건 아닌지, 혹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고민과 어려움을 가지고 한점 한점 만들어 가며 아름다운 이 공간에 조심스럽게 제 아이들을
선보입니다. 제 작품을 통하여 위안 받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작업을 하는 저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겨레의 우리에겐 조국(祖國)이 있다. 내사랑 받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에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江山)을 노래부르자
끝노래 신유년(辛酉年) 취하(翠夏) 죽사(竹史) 박충식(朴忠植)
대대(代代)로 물려받은 조국강산(祖國江山)을 언제나 잊지말고 노래 부르자
높은산 맑은물이 우리 복지(福地)다 어느곳 가서든지 노래부르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선생(先生)의 조국강산(祖國江山) 첫노래
3. 소회
준비되지 않은 여행길은 헛수고로 마무리되고 홍천의 유적지 몇 곳을 작정했으나
점심시간이 어중간하고 오후는 집과 원만한 거리에 있고픈 마음 때문에 다소 늦은
점심이지만 ‘육콩이네’(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로 102, ☏031-773-6733)서 먹은
연잎밥은 나름 괜찮았고, 세미원은 철이 이르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고 들리지
않았으나 세미정에서 한 편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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