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홍천의 기미독립만세 공원과 세미원-1

아름답지만~ 2019. 4. 15. 20:46

홍천의 선배가 홀연히 떠난 이후 마음의 부담을 줄이고자 연락도 하지 않고 떠난 길에서

잠시 들려본 기미만세공원과 절터, 그리고 연락드리니 길이 엇갈려 통화로만 인사를

나누고 두물머리의 세미원을 들렸다가 돌아온 과정을 정리해 본다.

 

 

 

 

 

 

 

 

 

위는 두물머리 종점의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모습,

 

 

 

 

 

 

열대수련정원의 백자분수와 청룡분수

 

엄마의 정원 물에 잇는 괴석 뭔 동물이 습지에 앉은 듯, 아래는 빅토리아연못의 조형물과 전경

 

 

세계수련관의 수선과 꽃은 연꽃과 비슷하지만 이름을 모르니 답답!

 

 

 

1. 다녀온 날: 2019년 4월 11일 목요일

2. ① 기미만세공원과 6•25 전사자 발굴지

동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김덕원 의사를 중심으로 3,000여 군중이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무차별 총격으로 8명이

순국하고 수백 명이 부상한 만세운동이다.

물걸리가 역사적으로 물류 운송이 용이한 내촌천이 인접해 옛날에는 번화했던 곳인 듯했으며,

현재의 한적한 동창로의 모습과는 판이했던 듯하다. 만세공원에는 6• 25전사자 안내의 글도

붙어 있는데 상당히 격전지였던 듯하다. 많은 군인들이 조 국을 수호하기 위해 산화한

곳임도 상기할 일이다.

물걸리 삼일운동 기념비의 내용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의 맑고 밝은 우리 민족의 넋이 일천구백십구년 사월삼일 강원도 홍천에서

삼일운동을 이어받아 뼈세게는 일어났었나니그 주모자이시며 또 이곳 동학 혁명의 참가자이셨던

김덕원의사님을 비롯해서 그 부주모자인 전성열의사님과 일본 헌병들의 흉탄에 숨 넘어가신

팔 열사님들과 또 총상을 입고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른들의 넋 앞에또 이보다 더앞서서

순국하신 동학 혁명의 이 곳 열사님들의 넋 앞에 단군 할아버지의 뜻을가장 잘 이어받아 지키신

님들의 넋 앞에 나는 깊이 머리 숙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노라

                          예술원 원로회원 서 정 주 짓고, 원광대학교미술대학 서예과 교수 조 용 선 쓰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

위치: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산 282-2번지,

전투명: 내촌면 지역전투(중공군 5월 공세), 참전부대: 국군 제 5사단, 제 7사단

이곳 물걸리 일대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국군 5사단과

중공군 27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당시 중동부 지역의 중공군 총 공세로 국군 5사단과

7사단은 지휘체계가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우리 군은 소부대 단위로 퇴각을 실시했고, 현 지점인

물걸리 일대에는 5사단 35연대 1개 대대가 장평리와 어론리 전방 3km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군의

화력지원하에 중공군 27사단 1개 연대의 공격을 저지했습니다.

치열한 근접전투로 적군과 아군이 혼재된 이 전투는 수많은 국군잔병들이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구국의

현장입니다. 국방부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무한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이곳 물걸리 일대에서 「6•25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실시한 결과」 전사자

유해 182구와 유품 1,107점을 발굴하여 조국의 품인 국립현충원에 모셨습니 다. 이 곳을 찾는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 사랑과 고귀한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국방부•제11기계화 보병사단•홍천군

물걸리 기미만세운동기념비

민중이 그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싶거든 홍천군 물걸리에 와서 보아라. 삼일운동 때 민중이

어떤 일을 했던가를 알고 싶거든 홍천군의 동창 마을인 물걸리에 와서 물어 보아라.

물걸리는 내륙지방과 동해안의 물화를 교역하는 상인과 나그네가 묵어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홍천군의 조운을 담당한 동창(東倉)이 있었고 내촌면소도 여기에 있었다. 오가는 사람과 우마가득

실거리고 주막과 마방과 객주집까지 즐비하게 들어선 큰 마을이었다.

그렇게 번성하던 물걸리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물걸리 만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망해가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안으로 봉건적인 습을 타파하여 근대화를 달성하고

밖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쳐 자주화하기 위하여 1694년에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 홍천군의 동학농민군이 농민전쟁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물걸리에 주둔한 홍천군 동학 접주 차기석(車箕錫)이 1천(一千)여 명의 농민군을 지휘하여 그해 12월

장평리에서 싸우고 풍암리 자작고개에서 마지막으로 결전할 새 수삼일간 혈전 끝에 8백여 명이

장렬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전사하였다. 그래도 농민들은 패배감에 빠져 실의하거나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용약재기하여 항일의병을 일으켰는가 하면 동학교(東學敎)를 새롭게 키우고 또

발전시켰다. 의로운 역사는 의로운 희생 위에서 꽃핀다는 교훈을 보여준 장한 모습인 것이다.

그 장한 모습이 1919년 물걸리 삼일운동을 만들어 낸 힘이 되었던 것이다. 삼일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때 홍천군에서는 기독교인 중심으로 홍천읍 시위운동을 추진했고

유림(儒林)들은 동면 속초리 운동을 추진했는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인들은 물걸리 운동을 추진했다.

천도교인들은 상처투성이의 풍암리 전투를 회상하며 비장한 각오로 물걸리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때 전영균(全榮均) 약방에 모여 김덕원(金德元) 장두와 전성열(全性烈) 부장두의 지휘 아래 시위를

계획하고 약방의 다락에서 태극기를 만들었고 전우균(全祐均) 이문순(李文淳)은 밤낮으로 산넘고

물건너 이마을 저마을로 연락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 내촌면,화촌면,서석면,내면 그리고 인제군

기린면의 농민까지 수천 군중이 물걸리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전성열(全性烈)의 사회로 김덕원

(金德元) 장두의 연설이 끝나자 이문순(李文淳)의 선창으로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골목마다 언덕마다 만세꾼이 가득

찾는가하면 담 위에도 지붕 위에도 그리고 내촌면 다리 위에도 만세인파가 넘실거렸으니 남녀노소가

한마음이 되어 두팔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일본제국주의여 물러가라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쌓이고 쌓였던 겨레의 울분이 폭발한

4월 3일이었다. 정의의 함성이 봇물처럼 터져나온 동창마을이었다.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하늘까지

사무치는 민중의 우렁찬 만세소리가 아니더냐 바로 그 시각에 일본헌병과 그의 앞잡이들이 출동하여

총을 쏘았다. 맨손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았다. 양심만으로 살아 온

물걸리 백성들을 향해 이리떼 헌병들이 총을 쏜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극(李順克),전영균(全榮均),

이기선(李基先),김자희(金自喜),연의진(延義鎭),이여선(李麗先)),김기홍(金基弘),양도준(梁道俊)이

즉사하고 함춘선(咸春先),승만수(承萬壽)등 20여 명이 부상 하였다. 그리고 김덕원(金德元),전영균

(全榮均)의 집을 불태우고 최공직의 가게집은 부수고 박살냈다. 이어 무고한 사람까지 잡아가 태형을

주고 고문하여 불구의 몸이 된 사람이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더욱 놀랍고 무서웠던 것은 부상자들에게

약을 주고 뒷돈을 주며 간교하게도 순박한 주민들을 꾀우며 이간질하고 팔열사(八烈士)의 거룩한

죽음을 헛되다고 선전선동한 것이다. 그것을 일본 제국주의의 회유 분열정책이라 한다.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이나라 민중이 또다시 농락을 당하고야 만 것이다. 결국 이곳 물걸리는

폐허의 마을로 변하고 마방집 거리의 흥청거리던 영광은 옛이야기로 사라져갔다.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노리는 바였다. 그러나 그렇게 물러설 수는 없다.

1919년 4월 3일 물걸리에서 울려퍼진 만세소리는 민족청사에서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오 열사

(烈士)들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형형하게 빛날것이다. 그 함성 그 죽음의 힘으로 이 나라가 광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불탄 잿더미와 피무덤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거늘

집들이 불타고 팔열사(八烈士)가 순국하고 식민지하에 겪어야했던 온갖 고초를 어찌 헛되다고 말하리오

어찌 마음까지 빼앗기겠는가 몸은 죽어도 마음은 살아야 죽음속에서 살아나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선열들의 정의감과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가꾸면 그 가치가 물걸리에 쏟아지게 된다. 그래야 물걸리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옛 영광을 되살리기 위하여 함께 힘을 모으자 여기를 지나는

길손들도 발을 멈추고 물걸리의 꽃다운 역사를 찬미하자 위대한 역사에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고개를 숙이자

서기 1998년 4월 3일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문학박사 조동걸(趙東杰) 삼가 짓고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黃在國) 삼가 쓰다. (기획: 광복 50주년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후원: 국가보훈처,대한광복회,3'1운동기념사업회,순국선렬유족회)

 

② 물걸리 사지

기미만세공원 바로 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터가 있으나 차로 찾았는데 보호각은

대수선 중이라 삼층석탑만을 보고 아쉬움을 달래야 해 다른 분의 블로그를 뒤져 전각 내의

보물들을 보는 기회를 만들고, 홍천읍을 향하여 국도와 지붕도를 달려 선배의 아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들렸다가 전화만 통화하고 홍천을 떠나 IC로 향했다.

 

홍천(洪川) 물걸리(物傑里)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545호

2중 기단 위에 삼층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일반형 석탑이다.

상•하층 기단의 면석에는 각각 1주의 버팀기둥(탱주,撑柱)과 모서리기둥(우주,隅柱)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를 이루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에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고, 1층이 2층과 3층에 비해 높게 조성되었다. 3층 몸돌의 상면에는 사리를 봉안했던 사리공이

남아 있다. 지붕돌의 하면 받침은 1층과 2층이 5단이고,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한데,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끝에서 살짝 올려졌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며

윗 면에는 찰주(擦柱)를 꽂았던 원형 구멍이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약 4.2m이다.

기단에 새겨진 기둥의 수가 각각 1주씩이고, 지붕돌의 받침이 5단과 4단으로 조성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과 탑신부가 조화를 이루며 당당함과 안정감을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홍천(洪川) 물걸리(物傑里) 사지(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47호, 소재지: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이 사지는 절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말에, 홍양사(洪陽寺)터라 한다. 1967년 4월 통일

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조각,청자편,수막새와 암막새 기와,암키와와 조각,

청자 조각,토기 조각,조선시대까지 절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541호),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542호),불대좌(보물 543호),불대좌

및 광배(보물 544호),3층석탑(보물 545호)등 보물 5점이 보관되어 있어, 강원도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유적지이다.

1982년 현재의 보호각을 새로 짓고 불상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절터에서 주춧돌,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 길게 놓은 돌],불상대좌 등 여러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특히 불상대좌의

사자상은 매우 정교하고 거대하다.

하나의 절에 4구의 대형 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호각이 대수선 중이라 접근 자체가 안되어 보물 중 삼층석탑만 보았을 뿐이다.

다른 분의 사진을 인용했는데 보물이 모두 보이고 있다.

③ 세미원

두물머리는 젊은 아베크족들이 많이 모이는 곳, 적당한 먹거리를 찾아 이곳까지 와

연잎밭을 먹으며 길 건너 세미원의 입구를 기웃거려 찾아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지불 후

각 시설물을 돌아 배다리를 건넜다가 되돌아 와 세한정을 들리고 세계수련 관을 들리고

입구에서 연잎빵을 산 후 귀로에 올랐다.

 

 

 

위는 국사원이란 이름 붙여진 곳의 조형물, 아래는 장독대분수공원, 박정희 전대통령 친필휘호가 보인다.

 

 

페리기념연못(세계적 연꽃 연구가 페리가 가족과 함께 직접 심어주신 연꽃 피는 연못)과 세심로

 

사랑의 연못과 연못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들

                                                     2부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