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원주와 여주 신륵사- 2

아름답지만~ 2019. 5. 23. 18:05

③ 둘러보기

차를 도자기직판장 앞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가며 여주전통가마를 지나고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을 향하는데 승용차 여러 대가 옆을 스치고 지난다. 매표소를 들여 다보니 경로자는

그냥 가시면 된다고 한다.

 

여강길 4코스 5일 장터길 여주 5일장[5.10.15.20.25.30]

코스[신륵사-황포돛배 선착장-여주도서관-연인교-영월루-여주시청-5일장터길(여주 중앙로)-

대로사-세종산림욕장-효종대왕릉-세종대왕릉] 8km

황포돛배 운항(동절기 제외) 문의 031) 882-2406

일주문을 들어서고 우측 여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정자가 있으나 설명해 주는 표시가 없다.

정자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륵사가 시야에 들어오고 황포돛배가 보이지만 다층전탑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바위 위의 정자 옆 삼층석탑을 보고 여강(驪江)을 내려 본다.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驪州 神勒寺 三層石塔)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깍아 만든 삼층석탑으로, 신륵사 다층전탑 근처 강변의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의 기원한 것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중대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상중대석의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와 탱주⁺⁺를 새겼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갑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과 2층의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닳은 편이다. 그 위에는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데,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랬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이나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도 모두 없어졌다.

고려 말 나옴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우주(隅柱): 건물(建物)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 ⁺⁺ 탱주: 버팀 기둥

다층전탑을 한바퀴 돌며 고교 2년 시절을 회상해 보고 대장각기비가 있는 곳으로 가

전에는 기억도 없는 대장각기비를 안내한 글을 보았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신륵사에 대장각⁺을 만든 후 그 내력을 새긴 것이다.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 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고려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3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 제학이었던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 제학이었던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을 놓고, 그 위로 비의 몸체를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몸체의 양옆에 돌기둥이 몸체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이렇게 비의 양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양식이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1383년(고려 우왕9)이다. 통일 신라 시대 이래 유행했던 거북 모양의 비 받침과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 머리는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

되었는데, 이 비가 그러한 변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려 말 비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대장각: 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

신륵사 대장각비

가정(가정) 이곡(李穀)은 그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대장경(大藏經)을 발간하여 부모의

명복을 빌기로 소원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정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아버지가 소원한대로 장경을 간행하려 하였으나 관직에

얽메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71년에 다시 어머니 김씨(金氏)를 여의고 1374년에는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승하하였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셨던

신하이며 이색도 공민왕조에 과거급제하여 대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이색은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명복을 빌고 한편으로 그의 아버지의 못 이룬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장경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색은 나옹(懶翁)의 탑명(塔銘)을 지은 바 있다. 그는 장경을 발간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으로는 그 방대한 경비를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 나옹(懶翁)의 제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생각하여 그들과 상의하였다. 그 결과 승려인 무급(無及) 수봉(琇峯) 두 사람이 그의

문도인 종유(縱臾)를 데리고 우왕(禑王6년,1380)2월부터 모금에 나서서 각참(覺旵)은 순흥

(順興)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 도혜(道惠)는 청주(淸州), 해주(海珠)는 충주(忠州), 각운

(覺雲)은 평양(平壤), 범웅(梵雄)은 봉주(鳳州), 지보(志寶)는 아주(牙州)에서 종이를 뜨고 석환

(釋幻)은 먹을 제조하여 우왕 7년(1381) 4월에 경률론(經律論)을 찍어내고 9월에 표지를 입히고

10월에 각주(覺珠)가 제목을 쓰고 각구(覺口)가 책 보를 만들고 11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들었으며 국선리(國膳里)에 거주하는 묘안(妙安)이라는 노파는 아침 저녁으로 식량을 얻어다가

모든 참가자의 음식을 꾸준히 공급하였다.

우왕8년(1382) 1월에 화엄영통사(華嚴靈通寺)에서 “경 읽는 모임”의 의식을 마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 운반하였다 여기는 나옹(懶翁)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화산군

(花山君) 권희(權憘)가 돌아가신 그의 부모와 그의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금으로 만든 접시를

기부하고 다시 여러 유지들의 기부에 의하여 이 절에 있는 순공(順公)의 감독하에 절 남쪽에다

이층 건물을 짓고 각수(覺修)에 의하여 단청을 올리고 장경전부를 정리하여 넣었다 5월,9월,금년

1월에 “경을 읽는 모임”을 갖고 해마다 정례적으로 모임을 갖도록 규정하였다. 안에 모신 비로차나

(毘盧遮那)상은 화산군(花山君)이 기증하였고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당성군(唐城君) 홍의룡

(洪義龍)이 그 부모를 위하여 기증하였고, 문수보살(文殊菩薩)상은 순성옹주(順誠翁主) 왕씨

(王氏)와 강부인 (姜夫人)이 공동으로 기증한 것이다.

이색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계획했던 소원이 30여년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돌에

새기기 위하여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에게 부탁하여 이 글을 짓게 하였다.

원비 고려 우왕(禑王) 9년(1383)

글 판도판서예문관 제학 이숭인(版圖判書藝文館 提學 李崇仁)

글씨 진현관 제학 권주(進賢館 提學 權鑄)

19871년 12월 일 임창순 요역

내려서는 길에 송덕비가 있어 자료를 찾으니 철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판돈령 김병익의

송덕비이다. 철종9년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해 신륵사를 중수한 뒤에 세운 것이라 하는데

역시 안동 김씨가 크게 세력을 떨치던 시기와 마주친다. 

극락보전으로 향하다가 극락보전(極樂寶殿) 앞에 세워진 다층석탑을 거쳐 극락보전을

둘러보고 관음전 옆을 지나 여강길로 가면서 조포나루의 내력을 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4. 소회(素懷)

시간적 여유가 있어 문막휴게소에서 커피 한잔하는데 천안의 동기생 부부와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다가 뒤늦게 서둘러 떠나 5분여 늦게 도착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하루였다. ‘알츠하이머’ 라는게 그리도 빨리 폐인을 만드는가?

간병인이 주장하는 ‘요양원에는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소리가 자꾸 귓전을 울리며,

얼마나 많은 주사로 팔뚝은 시꺼멓게 물든 자국이 여러 군데였고 초점을 잃은 눈과 묻는

말에 겨우 ‘응’ 정도의 소리만을 듣는 심정은 새까맣게 멍들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다고 들린 강원감영은 주차장을 설치하지 않고는 둘러보기 고약한

원주 8경의 한 곳이다. 원주시청은 홍보와 편의가 병행치 못하는 홍보는 무익한 허세라는

걸 절실히 느낄 필요가 있겠다.

신륵사는 잠시 들린다는 고정 관념 때문에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고 대충 고교 시절 기억을

접목시키는데 열중하다가 보니 너무 가볍게 둘러보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어쩌면 신도 분들 주차장이 안쪽으로 더간 곳에 있는 반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사찰에는 일반 관광객들 보다 특권적인 의식과 신도를 우대 한다는 사찰측 배려가 맞아

떨어지는 결과겠지만 일반 내방객의 마음도 헤아렸으면 더 좋지 않을까?

입구 공원의 소류지에는 수련이 가득하다. 만개시 찾는다면 장관이리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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