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화성(華城) 당성(唐城)

아름답지만~ 2024. 3. 1. 18:20

대부도를 가다가 나타나는 당성, 궁평항을 가다가도 지나고 해 시간 내어 들려 보았다.

방문자센터에 들려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을 듣고 세터에 있는 모형도도 담고~

화성 당성(唐城)

당성은 화성 상안리의 구봉산(해발 159m)정상부와 서해를 내려다보는 서쪽 능선에 쌓은 1차 성과 구봉산 정상부와 동쪽의 능선 및 계곡을 둘러 쌓은 2차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성이 자리 잡은 곳은 원래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는데,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가, 6세기 중반 신라가 점령하게 되었다. 신라는 당성을 거점으로 하여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당나라와 정치, 외교, 군사, 문물의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당성은 고려 초까지 대중국 교역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1차 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반에 쌓은 성으로 고려 초까지 사용되었다. 평면은 동서로 긴 네모꼴에 가깝고 성벽의 모서리 부분은 돌출된 모습이다. 성의 둘레는 약 610m, 내부 면적은 약 14,300이며, 원래 성벽의 최대 높이는 약 5~6m로 추정된다. 성벽은 암반을 ‘L’자로 깍아낸 후 네모꼴의 돌을 다듬어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으며, 그 안쪽은 돌로 채워 넣었다. 1차성 안에서는 여러 건물지와 집수지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성의 이름을 나타내는 한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 다수의 명문 기와, 토기와 도기, 중국산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2차성은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쌓았으며 조선시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당시 2차성은 통일신라와 중국 사이에 교류가 증가하면서 협소해진 1차성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성의 평면은 네모 꼴에 가깝고 그 둘레는 약 1,170m, 내부 면적은 약 72,600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3m 정도이다. 최초 성벽은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후 중심부에 돌을 일정하게 깔고 그 위로 흙을 다져 쌓은 후 그 안과 밖에 다시금 흙을 다져 덧붙였다. 성벽은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초 성벽의 일부를 잘라내고 돌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새롭게 쌓았다. 2차성에서는 서문지, 북문지, 동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성 안에서는 여러 건물지와 집수지, 연못지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속하는 다수의 기와와 도기가 있으며 중국계 자기 등이 일부 있다. 당성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핵심적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고,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기착지라는 점 에서 대단히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집수지(集水址)와 연못지()

집수지와 연못지는 성 안에서 물을 이용하는데/ 쓰는 데 꼭 필요한 시설이다. 평면 형태는 네모꼴이며 돌을 쌓아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건물터, 철기 생산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집수지의 크기는 914m이다. 남동쪽 모서리에는 물이 빠져 나가는 출수구(出水口)가 있다. 연못지는 집수지의 북쪽에 있는데 크기는 4.54.5m이다.

집수지와 연못지 안에서는 도기류, 자기류, 기와류, 석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송대 지방요 자기편이 확인되어 당시의 대외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유물은 고려시대의 것이 많은 편인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2차 성이 오랫동안 쓰였음을 보여준다.

북문지(北門址)

북문지의 현존 길이는 840cm, 폭은 260cm이다. 흙으로 다져 만든 성벽 가운데에 문지를 만들었으며, 좌우 측면은 돌로 마감하였다. 문지 내부에는 성문을 여닫는 시설인 문지공석(門址孔石)2개 확인된다. 문지공석 상면에는 지름 13cm, 깊이 8cm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철제 암확쇠를 끼우고, 성문의 회전축 하단부에는 수확쇠를 장착하였다. 그러므로 성문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목재로 결구된 시설과 문루(門樓)가 있었을 것으로추정된다

망해루 추정지(望海樓 推定址)

화성 당성 망해루 추정지는 당성에서도 가장 높은 지점에 있으며, 기단석렬을 만든 방식이나 초석의 위치 등을 볼 때, 삼국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성의 장대지로 사용하였다가 고려 시대에 누각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남서쪽 기단석렬 외곽으로 단을 이루고 있으며, 단의 남서족으로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을 통해 중앙부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제사와 관련이 있는 흙으로 만든 말(토제마) 17개가 확인 되었는데, 형식이 다양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바께도 명문 기와, 도기류, 토기류 등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 초기까지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색의 <남양부 망해루기>에 따르면, 탁 트인 전경을 갖추어 빈객과 사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누대를 고을의 치소에 세우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망해라 이름 지었다. 한편 남양초등학교의 부근을 고려 후기의 남양부의 치소로 추정하기도 한다.                                                        누대: 누각과 대사와 같이 높은 건물

망해루지(望海樓址)

당성의 가장 높은 부분에 위치하는 망해루는 평면은 정면 3, 측면 3칸의 건축물이다. 그 크기는 장축 640m, 단축 630m로 네모난 형태이며, 남서편으로는 계단시설이 확인된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6면이 다듬어진 초석(礎石)이 자리잡고 있으며, 외곽에는 바깥쪽과 안쪽으로 돌의 면을 맞추어 쌓은 너비 80~90cm 정도의 기단시설이 있다. 초석은 기단시설의 안쪽열 사이에 위치하는데, 초석산 거리는 약 210~220cm이다.

위 사진을 내 디카로 추정해 찍어본게 아래의 두 장이다.

위 보이는 곳 설명과 비슷하게 잡아본 풍경이나 시야가 희뿌여서 대조하기가 미안하네~

팔각건물지(八角建物址)와 주변 건물지(周邊 建物址)

팔각건물지를 포함한 8기의 건물지 흔적이 확인되었다. 팔각건물지의 원래 크기는 지름 약 7m 내외로 추정되는데, 건물 안쪽에는 원형의 석렬이 배치되어 있고, 그 외곽으로는 초석(礎石)을 올려놓기 위한 3개의 적심석(積心石)이 있다. 적심석의 위치를 감안할 때 건물의 평면 형태는 팔각형으로 보여진다. 팔각 건물지 이외의 건물은 파괴가 심하여 그 형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보수준공기념(補修竣工記念) () 당성사적보존회(唐城史蹟保存會) 서기(西紀) 20171130

상임고문(常任顧問) 홍기헌(洪基憲), 이사장(理事長) 홍재구(洪在九),

상임이사(常任理事) 홍성한(洪性漢), 감사(監事) 홍명근(洪明根)

사적비는 순 한문이다. 보수준공비를 보면서 남양에선 洪氏가 아니면 명함 내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자그마한 산에 여유있게 걸어도 1시간 조금 넘을 듯한 가벼운 역사의 한 곳이다. 대중교통은 당성 앞으로 지나기 때문에

이용하기에 큰 무리 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