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천 황금성당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학사대길 64(황금동 76-18)
김천 지역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되기 시작한 시기를 말해주는 기록은 사학징의(邪學懲義)이다. 사학징의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서울 형조에서 신문을 받거나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교한 이들에 대한 기록으로, 사학죄인 명단 등을 담고 있다.
1801년 박춘산이 '천주학’을 믿은 죄로 김산읍(金山邑, 김천의 옛 이름)에 유배되었으며, 같은 시기 동래 출신인 현계탁도 형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이유로 김산 고을 증산(甑山) 으로 유배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볼 때 김천지역의 천주교는 220년이 넘는 퍽 오래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여러 박해를 거치면서 때 충청도와 전라도, 타 경상도 지역의 신자들이 김천의 소백산맥 산악 지대로 피난하게 되면서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장자터, 장전리 선무터, 지좌동 마잠, 대항면 향천리 양지마, 봉산면 광천리 곤천, 남면 부상리 등지에 교우촌이 급격히 형성되었다. 병인박해 때 김천에 살던 유시몬 외 5인이 충주 포교에 잡혀 처형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병인박해 때 김천 지방의 순교자 유 시몬과 동료 순교자 4명의 거룩한 삶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이들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무덤도 알지 못한다.
황새바위(형구돌)
옛날 죄인들을 포박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다리를 묶는 것을 우리는 흔히 ‘족쇄(足鎖)’라고 하며 지금도 그 말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목을 묶거나 목에 큰 칼을 채우는 것을 ‘항쇄(項鎖)’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이 형구돌은 감옥에다 두껍게 벽을 칠 때 위에서 한 자 쯤 되는 곳에 끼워 넣어 담을 만들고 매를 맞아 기진한 천주교 신자들이 형장으로 옮겨가지 못할 만큼 되었을 때 그 구멍 사이로 올가미를 한 밧줄을 끼워 넣어 목에다 걸고 반대편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잡아 당겨 죽이는 방법으로 쓰이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항쇄돌 또는 항쇄바위라고 하였으며 이 말이 와전되어 흔히 ‘황새바위’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 대박해 때에 죄 없는 천주교신자들을 너무 많이 죽여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두려워한 대원군이 소리 소문 없이 죄인들을 처단하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명에 따라 생겨난 것이 이러한 모양의 형구돌입니다.
1896년 칠곡 가실본당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가 경부선 철도 부설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되는 교통의 요지인 김천 지역에 새 성당 건립이 필요하다고 판단, 조선교구 뮈텔주교에게 수차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1901년 4월 27일 김산군 김천면 자라 밭골(현 김천시 황금동 현 성당터)에 초가집 1동을 구입하고 같은 해 5월 27일 김천 성당의 설립과 동시에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계산 성당과 가실 성당에 이어 대구대교구의 세 번째 본당으로 경상도 서북부 지역의 전교와 신앙의 중심지였다.
이후 교세가 안정되자 1907년 그 자리에 기와집 4칸 한옥을 지어 성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중국 상해에서 주조한 안나의 종을 달아 삼종을 타종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4대 김승연 아오스딩 신부가 1934년 순수한 성당 자금 2만원으로 협소한 기와 성당을 허물고 붉은 벽돌 첨탑종각의 웅장한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여 봉헌하였다. 이 건물은 대구 계산동성당을 본뜬 서구식 건물로 당시 김천의 명물이 되었다. 대희년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00년, 최경환 사베리오 신부는 구 성당은 그대로 보전한 채 옛 기와 성당 터 바로 옆에 100주년 기념성전을 세웠다.
구주보혈 진리충만(救主寶血 眞理充滿) “구세주께서 흘리신 보혈 진리가 온 세상에 가득찼네”
위: 새로운 성전, 아래: 구 성당
구속된 예수상,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성상 조광호 作 2000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2018년은 교구 성모당 봉헌 100주년이 되는 해로 황금동 본당 경내에 교구 성모당과 같이 ‘루르드의 성모님’을 모신 성모당을 지었다. 신자들이 쉽게 성모님을 방문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누리도록 하고자함이었다.
제대 좌우에는 두 손이 잘린 목각 예수성심상과 성모 마리아 모자상이 있다. 두 손이 잘린 목각 예수성심상은 원래 본당 주보로 모셔 구성당 제대 정면에 안치했던 상이다. 세월 탓에 훼손 됐지만 '본당 공동체가 한 뜻으로 모여 이 시대 예수님의 손이 되어 드리자'는 뜻에서 복원하지 않고 새 성당 현관에 모신 것이다. 103년간 김천 지역 복음화의 텃밭이 된 전통을 잇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목각상이 서 있는 대좌에는 성 김대건, 성 모방, 성 앵베르, 성 샤스탕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성전 출입문에는 해와 달, 시작과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알파(A)와 오메가(Ω)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성당에 들어서며 세상의 창조주로 인간을 비추는 빛이신 구원자 예수를 새기라는 의미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해서 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이콘에 담긴 내용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지상에서 겪는 어려움에 영원한 도움으로 굳건히 계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그림의 숨은 뜻을 읽어 봅시다.
(1) 성화의 좌우 윗단에 있는 그리스어 머리글자: 하느님의 어머니
(2) 성모님의 머리 위에 그려진 별: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주시는 별임을 뜻한다.
(3) 오른쪽 천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못을 들고 있는 가브리엘 천사
(4) 왼쪽 천사: 창과 쓸개 담긴 그릇과 해면을 잡아 맨 막대기를 들고 있는 미카엘 대천사
(5) 예수님의 왼쪽 위에 있는 그리스어 머리글자: 예수그리스도라는 뜻
(6) 마리아의 오른 손과 왼손: 수난의 도구들을 보고 두려움에 달려와 품에 안기는 어린 예수의 두 손을 받쳐 들고 있는 오른 손은 은총의 전달자임을, 예수의 몸을 받쳐 들고 있는 왼 손은 위로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7) 성모님의 붉은 색옷: 팔레스티나 처녀들이 입던 옷. 붉은 색은 동정성을 의미
(8) 성모님의 감청색 망토: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의 어머니들이 입던 옷
(9) 황금색 배경: 천국과 영원을 상징
(10) 예수님의 벗겨진 신발: 신발이 벗겨질 정도로 황급히 달려와 어머니의 도움을 청하는 하느님 자녀들의 긴급한 상황을 말해준다.
광 부족에 디카 실력이 저조해 팔 잘린 예수상과 성모상도 어쩔 수 없이 삭제했습니다.
4) 군위축협 청정축산지원센터 대구 군위군 군위읍 군청로 49-33(군위읍 서부리153-25)
점심 먹으러 가 사람이 별로 없는 토요장터 구경하고, 불백 전골로 점심을 먹었다.
5) 김수환 추기경 생가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
이 초가는 2009년 2월16일 선종하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시던 곳이다.
추기경의 집안은 원래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 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이신 김요안(金要安) 공은 광산 김씨로 병인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 했고, 조모 강말손(姜末孫)여사는 남편의 순교 후에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갖은 고생에도 교우들의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였으며, 당시 유복자로 추기경의 부친이신 영석(永錫, 요셉)이 태어났다.
“하느님 안에 행복한 가족상”
순교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고된 옹기일을 하였지만 신앙공동체와 가족을 위해 살았던 아버지, 김영석 요셉. 옹기일과 행상을 하며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고 사제가 되기를 원했던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어머니의 말씀에 순명하며 사제의 길을 걸으며,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한 형님, 김동한 가를로.
이곳 옛집에서 행상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던 모습, 사람과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저 산 너머’를 향하고자 하는 막내, 김수환 스테파노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증 김연희 마리아, 작가 김종숙 요안나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김보록 신부(대구교구 설립자)의 일을 도왔으며, 동학난을 만나 칠곡 장자동 옹기굴로 피신하게 된다. 이때 뮈텔, 김보록 두 신부의 중매로 대구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달성 서씨 서용서(徐用瑞)회장의 딸 중하(仲夏,마르띠나)와 혼인을 하였다. 이 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이다.
그후 왜관 평장목, 김천 지대골의 옹기굴, 대구 남산동을 전전하던 추기경의 부모는 칠곡 신나무골과 선산을 거쳐 1922년 4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1922년 5월 8일(음력)에 낳은 막내가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추기경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종교간 화해와 화합을 추구한 김수환 추기경
종교의 울타리를 넘다.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등지며 살았던 1970~80년대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 언제나 한발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셨고 대화의 통로를 열었다.
1997년 길상사 개원식 때엔 이례적으로 축사를 해주기도 했다. 불교계는 김수환 추기경의 열린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2000년 김 추기경은 성균관 대학교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흔쾌히 받기도 했다. 김추기경은 유교의 예절에 따라 유교의 거봉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정숙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여 여섯 번이나 큰절을 하고 술까지 따랐다.
천주교는 1939년 제사 금령(禁令)을 철회한 후 제례를 허용하고 있으나 김추기경이 공식석상 에서 절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김추기경은 “선생은 스승과 같은 분으로 살아 계셨다면 마땅히 찾아 뵙고 인사드릴 어른인데, 돌아가신 분께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라는 뜻에서 큰 절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의 생각은 그처럼 늘 열려 있었다. ‘훌륭하신 분의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분의 종교가 유교건, 불교건 참배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리는 다를 지언정 구원의 진리는 하나다.
추기경이 8살 되던 해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옹기와 포망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 초가에서 공소를 열었다.
추기경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지금 대구가톨릭대의 전신인 성 유스티노신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 집에서 형인 동한(東漢,가롤로) 신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앙의 꿈을 키웠으며, 생전에 가끔 이 집을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상하셨다.
기도처 | 주상황 | 부연 설명과 기도명 |
제 1처 | 사형선고 받으심 |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제 2처 | 십자가 지심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
제 3처 | 첫 번째 넘어지심 |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제 4처 | 성모님을 만나심 | 예수님께서 성모님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
제 5처 | 시몬이 십자가 짐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
제 6처 | 예수님 얼굴을 닦아드림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
제 7처 | 두 번째 넘어지심 |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제 8처 | 예루살렘 부인을 위로 하심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 합시다. |
제 9처 | 세 번째 넘어지심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제10처 | 옷 벗김 당하심 |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
제11처 | 십자가에 못박히심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
제12처 |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제13처 | 십자가에서 내리심 |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내리심을 묵상 합시다. |
제14처 | 무덤에 묻히심 |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
6) 한티순교성지 경북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 1길 69
한티 순교성지는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해발 600m의 깊은 산중에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형성되었다. 을해박해 때 경상도에서, 정해박해 때는 전라도에서 수백 명의 신도가 수난을 당하였다. 신도들은 대구 인근의 산간벽지로 피해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한데 모여 살았는데, 이때 정착한 곳이 한티였다. 그러나 이곳에 정착한 후에도 몇 번이나 포졸들의 습격을 받고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되어 한티성지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한티 순교성지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와 피정의 집, 대신학교 영성관, 순례자 성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사와 순교성지순례, 피정의 집을 운영한다. 이 외에도 이곳을 기점으로 출발 하는 십자가의 길, 인내의 길, 겸손의 길이라는 세 가지 순례길이 있으며 각각 30분 정도 소요 되며, 사전 예약하면 성지 안내 해설도 들을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입석은 ‘한티마을 사람’이라 부른다.
세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마을이 존재했음을 뜻한다. 옛날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우곤 했는데, 박해(1868) 당시 불태워진 순교자의 마을이 대형 십자가 뒤쪽으로 자리하였다.
하나는 한티 순교자를 뜻한다. 크고 작은 입석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교한 한티의 남녀노소 순교자이며, 바닥의 둥근 돌은 칼날에 떨어진 순교자의 머리이다.
하나는 한티 순교자의 신앙과 삶을 따르려는 지금 나 자신을 뜻한다.
하느님 아버지, 자자손손 ‘한티마을 사람’을 축복하소서
2016. 3.11 사순 제4주 간 금요일
7) 원(초밥•회•물회)식당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금암3길6(금암리 231-42), ☏054-975-5708
저녁상은 회와 매운탕으로 술이 돌은 자리, 다음날 아침에는 고기찌개로 배를 채운 곳이다.
8) 유진모텔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금암1길11-1(금암리 231-82), ☏054-976-7100
하룻밤 많은 인원이라 침대방, 온동방, 다다미방이 섞였다고 했는데, 우린 침대방이었다.
대략 첫날의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식당의 아침밥상과 하룻밤 보낸 모텔도 붙였습니다.
빠진 부분은 동명성과 동명지를 18일 아침과 통합 정리해 3편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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