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사찰(寺) 등의 여행-2

아름답지만~ 2012. 4. 8. 18:18

 

3) 3월29일: 피곤한가? 밤잠을 몇 번인가 일어나 뒤척이다가 기상(7시30분)-조식<시라구 된장국

12,000원>-출발( 8시45분)-34번국도-924번지방도-회령포전망대주차장(09시15분~11시/23km/

누계679km)

 

             장안사의 석불좌상터와 등산안내도

-장안사<시주5,000원>924번지방도<-용궁면->-34번국도-문경-3번국도-<가는 길을 놓치고>-68번지방도-우회전(913번지방도)-김천시-김천IC-1번고속도추풍령휴게소(12시55분~13 시27분/95km/누계774km/커피5,600원)-금강휴게소(13시51분~14시15분/36km/누계810km/중식 <어묵우동2,충무김밥1/12,500원>-1번고속도-동탄IC(통행료4,950원)-송천주유소<주유61,000원 /28.532ℓ>-집(16시25분/152km/누계962km)

             장안사 대웅전과 금강휴게소에서 본 금강유역

[2] 다닌 곳의 기록들

1) 은해사(銀海寺):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479 (Tel:054-335-3318)

신라41대 헌덕왕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사(海眼寺)로 창건, 조선 명종 원년(1546)에 천교(天 敎)화상이 중창하여 은해사라 하였다. 원효(元曉), 일연(一然), 지눌(知訥)스님 등 한국불교의 고 승들이 머물렀으며, 최근에는 일타(日陀)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면서 사격(寺格)을 일신하였으며,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아마타부처님이 상주하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은해사에는 아미타괘불(보물 제1270호), 금고(보물 제1604호)를 비롯하여, 산내암자인 거조암 영 산전(국보 제14호), 백흥암 극락전(보물 제790호)•수미단(보물 제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 물 제514호) 등 수많은 문화재가 1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말사가 50여개이며 암자가 8개가 있다. 경내에 성보박물관이 있어 불교유적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은해사의 극락보전과 입구의 보해루

※은해사 극락보전(極樂寶殿)<경북 문화재자료 제367호/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1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내 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부기둥에 의지해 불단을 만들었다. 다포식 건물은 내출목이 외출목보 다 2출목을 더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사찰 자리가 평지인 경우 건물 높이를 높이기 위해 사용 된 방식이다. 천장은 용 및 비천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대량(大樑)위에 걸친 충량(衝樑) 머리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후기 다포식 건축물로서 지녀야 할 특성 들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은해사의 뒤틀린 향나무와 지장전의 모습

※ 은해사 괘불탱(銀海寺 掛佛幀)<보물 제1270호/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이 그림은 조선 영조26년(1750)에 화원(畵圓), 처일(處一), 보총(普摠)에 의해 그려진 족자그 림으로, 규격은 10.56m☓4.74m이며 재질은 견본채색이다. 전체높이가 11.56m에 달하며, 독 존도 형식의 아미타여래상으로서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단아한 입상이다.

화면 중앙부 양쪽의 단화에 배치된 붉은 꽃과 상단 좌우에 배치한 극락조와 천개장식은 불세 계의 평화스러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괘불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또한 화면의 테두리를 녹색으로 구획지어 붉은 원안에 범자(梵字)를 써넣은 문양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도 이 괘불화의 특징이다. 이 그림은 상징적인 화면구성과 원만한 형태,

유려한 필선, 적절한 색의 조화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불화 가운데서 걸작으로 평가된다.

생명력의 위대함을 본다.

2) 중암암(中巖庵):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576 (Tel:054-335-3380)

은해사의 산내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은 은해사에서 4.8km 떨어진 중암이라 부르는 기암절벽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암자에 이르는 길은 마치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자 연바위를 거쳐야 한다. 이 바위 덕분에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절은 통일신라 때인 흥덕왕9년(834)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심지왕사는 팔공산 내의 동화사 를 창건한 분으로 진표와 영심을 이은 신라 범상종의 제3조이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으나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에 중 암암이 들어선 것 같다.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 아 있다. 또 주위에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1823년(순조23) 태여(太如)대사가 중수하였고 1834년(순조34) 우일(宇一)과 유엽(有曄)대사가 힘을 합쳐 중수하였다.

지금의 가람은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 다. 또한 2011년에 소운당(素雲堂)을 새로이 개축하였다.

중암암 삼층석탑과 삼인암 바위의 줌업

※ 삼인암(三印巖)의 전설

중암암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삼인암이다. 삼인암은 옛날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나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효험이 있는 약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으나 대를 잇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사정을 듣고 정성을 드리라고 하면서 삼인암의 장소를 알려 주었다. 부인은 여기에서 정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 다고 한다. 이외에도 어느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사람이 뜻하는 바가 있어 이곳에 와서 정 성을 드리고 힘써 정진하여 모두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전설도 있다.

만년송과 중암암에서 만년송 가는 바위틈새 길

※ 해우소(解遇所)

중암암 해우소의 깊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 멍 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 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에 계시는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 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라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때는 배를 띄워야 저을 수 있다.”고 하 며 절의 규모와 큰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 절 스님은 절의 규모등으로 자랑할 게 없자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 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암암 스님이 제일 큰 허풍으로 도반스님들 의 절 자랑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벼랑의 바위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설화이다.

삼인암 근처의 바위군상들과 운부암의 보화루 모습

※ 장군수(중암암 약수터)

천년을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17세쯤 되는 화랑시절 이곳 돌구멍 절(중암암)에서 심신을 단련할 때 즐겨 마신 물이라는 연유에서 약수 터 또는 장군수라고 예부터 전해지고 있다.

※ 건들바위

이 바위는 옛 어느날 밤부터 바위에서 울력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크게 놀란 당시의 주지스님 이 밖으로 나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위가 곧 암자를 덮칠 듯이 움직이고 있기에 부처 님께 기원하였더니 그 바위가 제 자리에서 훨씬 위쪽으로 옮겨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전 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곳의 가을 단풍이 가히 절경이다.

※ 만년송(萬年松)

중암암에서 서쪽으로 약200m쯤 가면 뿌리는 하늘을 향해 바위틈에 붙어있고 가지는 땅을 향 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만년송이란 소나무가 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일품이다.

※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332호/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5-1>

고려시대 초기의 삼층석탑으로 탑의 높이는 3m이고, 하층기단 갑석(甲石)의 폭은 1.46m이다. 다듬질한 긴돌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이층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강화되었고, 옥개석 낙 수면의 경사가 심해지는 등의 특징을 보여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벽 아래 터를 조성하고 남북선상으로 나직한 축대를 쌓아 마당을 2단으로 구성하고 서쪽에는 법당, 동 쪽은 석탑을 배치하였으며, 법당지에서는 법당 창건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 인 어골문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석탑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는 중암암(돌구멍 절)을 비롯하여 극락굴, 삼인암,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등이 있다.

음지에는 잔설이 남아서 있고 운부암의 서편의 대나무는 푸르름을 뽐내고

※ 극락굴(極樂窟)

신라의 원효스님이 화엄경론을 집필할 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이 굴에서 화엄경 약찬게 를 외우다 화강삼메에 들어 불빛을 발산하였는데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지고 그 소리에 의문 이 풀리어 화엄론을 완성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그후 조선말기 영파스님이 화엄강백으로 유명 했는데 이 굴에서 어느 여름날 정진하다가 삼메에 드는 바람에 학인들 강의시간도 놓치고, 밤 이 늦도록 스님이 오지않아 모두 찾아 나섰는데 스님이 이 굴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도인 큰스님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스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이 극락굴은 몸이 아무리 굵다고 해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하며 세 번을 돌아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운부암 뒤편의 고목과 아내, 운부암 서편의 석불 동자상

3) 운부암(雲浮庵):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479 (Tel:054-335-9236)

신라 성덕왕10년(71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창건당시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났다고 하여

운부암이라 했으며, 조계종의 여러 종정분들이 이곳에서 수행, 기거했던 곳이다.

※ 은해사 운부암(蕓浮庵) 청동보살좌상<보물 제514호/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555>

이 청동보살좌상은 크기라든가 형태, 장식면에서 경북지방에 전해오는 조선 태조4년(1395)의

장륙사 건칠보살좌상이나 15세기 후반기작으로 추정하는 대승사와 갑장사 금동보살좌상 등과

유사하다. 즉 아담한 크기의 안정된 자세로 긴 꼬리가 올라간 갸름한 얼굴, 가슴, 어깨, 배, 무릎등 전신의 장엄하고 화려한 영락장식 등은 고려말의 전통적인 보살상 양식을 잘 보여주 고 있다. 반면 띠주름식의 삼도-W자의 가슴아래 띠로 묶은 내의 표현-양다리에 대칭으로 흘 러내린 옷주름 등은 장륙사(莊陸寺)상(像)보다는 진전되고 대승사나 갑장사의 보살상 보다는 고식이 나타난 조선초기의 화려하고 단엄한 보살상이다.

고목과 아내,운부암의 보화루 그리고 아래는 내려오다가 본 원통전 모습

 

다시 3편에서 계속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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