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조암(居祖庵)영산전(靈山殿):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622 (Tel:054-335-1369)
거조암은 원래 거조사라 하여 신라 효성왕2년(738) 원참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고, 경덕왕(景德王)때 건립되었다고도 한다. 근래에 와서 거조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거조암 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거조암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 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전은 거조암의 본전이며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禑王)원년(1375)
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고 한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으로 정면 7칸, 측면3칸, 5량 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포, 보의 단면, 솟을 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다. 형태 및 구성 기법에 있어서는 백제계 고려 건축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일반적 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고쳐 지으면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 526분의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유럽에 한국의 혼을 행사시 나들이 나갔던 두 분 나한 상도 전시되며, 꼬리표로 표시를 하고 있었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루와 인각사의 국사전
5) 인각사(麟角寺):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612 (Tel:054-383-1161)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동화사의 말사이며, 신라 선덕여왕12년(64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에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말년에 머물다가 입적한 곳이다.
※ 국사전(國師殿)은 극락전이 발굴로 인해 해체된 후 2001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중심법당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 명부전(冥府殿)은 인각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건물이다. 조선 숙종 연간에 건립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건축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면3칸, 측면3칸의 장방형 건물이 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이 봉안되어 있다.
※ 산령각(山靈閣)은 절 북동쪽에 치우쳐 있으며, 정면1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1963년 에 건립되었다. 안에는 호랑이를 옆에 둔 산신탱이 있다.
보수중인 인각사의 극락전 보수중과 보각국사정조탑
인각사 석불좌상과 일연찬가비
※ 보각국사 정조지탑(普覺國師 靜照之塔)<보물 제428호>
일연스님의 부도로 일제시대 때 도굴되어 절에서 약2km 떨어진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에 흩 어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인각사로 옮겨 복원하였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형태는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型)이다. 거의 자연석에 가깝게 슬쩍 다듬은 듯한 네모난 지대석 위에 팔각형의 하 대석이 놓여있다. 하대석에는 모두 16개의 연판이 희미한 선각으로 새겨졌고 8각형의 중대석 에는 우주(隅柱)로 구분된 각 면마다 동물이 새겨져 있다. 둔탁한 느낌의 상대석에는 각 면마 다 복판연화문을 두고, 그 사이에 다시 홑겹의 연잎을 새겼다. 몸돌 정면에는 두 줄로 ‘보각국 사 정조지탑’이라 쓰고, 뒷면에는 문비를 조각했다. 나머지 여섯 면에는 사천왕과 보살입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추녀마다 귀꽃을 두었는데 마멸이 심한 편이 다. 상륜부에는 앙화와 보륜,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모양의 무늬 속에 보주를 표현하였다. 전체 적으로 형태가 둔하고 비례도 엉성한 편이며, 조각 솜씨도 평면적이다. 국난에 시달려 피폐해 진 당시의 어려운 정세와 시기적으로 양식적인 퇴화를 짐작할 수 있다.
※ 인각사 석불좌상(麟角寺 石佛坐像)<경북 유형문화재 제339호>
일연스님 부도 옆에 있는 석불좌상은 원래 인각사 인근 괴산1리(동정마을 아랫골)에서 옮겨온 것으로 재질은 사암이며, 한 매의 돌에 두터운 돋을 새김으로 좌상과 광배를 조각했다. 전체 높이는 1.5m이다. 불상의 머리는 육계와 나발의 표현이 뚜렷하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다.
넓은 안상에 입술은 두툼한 편이며, 목에는 굵은 삼도가 있다. 불상의 수인은 석가모니가 성 도하던 순간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내려오는 통견의 의습 선도 두껍게 표현되었다. 복부에 매듭이 있고 군의(裙衣)는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 는데, 군의의 주름으로 인해 다리의 표현은 생략되었다. 광배는 훼손이 심해 문양은 알아볼 수 없고 형태로 보아 보주형으로 짐작된다. 상호나 의습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불 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일연찬가(一然讚歌) 글 고은(高銀)
오라 華山기슭 麟角寺로 오라 하늘아래 두갈래 세 갈래 찢어진 겨레 아니라 오직 한겨레임을
옛 朝鮮 檀君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한나라였음을 우리 子孫萬代에 消息 傳한 그이
普覺國師 一然禪師를 만나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살 그이 촛불 밝혀 한字 한字 새겨간 그 璨爛한 魂 만나뵈러 여기 麟角寺로 오라
오라 渭川 냇물 麟角寺로 오라 痛哭의 때 이 나라 온통 짓밟혀 어디나 죽음이었을 때
다시 삶의 길 열어 푸르른 내일로 가는 길 열어 情든 땅 坊坊曲曲에 한 송이 연꽃
들어 올린 그이 普覺國尊 一然禪師를 가슴에 품고 여기 麟角寺로 오라
아 여든살 그이 촛불 밝혀 한字 한字 새겨간 그 찬란한 魂 만나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佛紀2546 壬午年 七月七夕 大吉日
慶州后人 鶴天 李相明奉 謹書
인각사의 도로(908번 지방도) 건너의 모습들(병풍암 등)
6) 아미산(峨嵋山/737.3m): 경북 군위군 고로면 양지리•가암리
908번지방도를 달리다보면 길가에 성난 뿔처럼 생긴 바위가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산이며, 다양 한 산행코스가 있으나 대략 4시간30분은 주차장-앵기랑바위-무시봉(667m)-아미산(737m)-병풍암-대곡지-주차장이다.
아미산 등산로의 모습들
7) 한밤마을
8) 제2석굴암(第二石窟庵/軍威三尊石窟):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산15 (Tel:054-380-6062)
신라 제19대 눌지왕때 아도화상께서 수도전법 하시던 곳으로, 화상께서 처음 절을 짓고 그후 원 효대사께서 절벽동굴에 미타삼존(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조성 봉안하였다.
팔공산의 북쪽 계곡 학소대(鶴巢臺)의 천연 절벽 자연 동굴안에 모셔졌으며, 이 석굴사원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조성연대가 1세기 앞선 것으로 석굴사원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석굴은 둥근 입구와는 달리 바닥은 평면의 2단으로 되어있고 천장은 입구의 높이보다 더 파 들어간 유선형 모양이다. 깊이4.3m, 폭3.8m, 높이4.25m의 굴 전면에는 간단한 석축을 쌓아 의식장소를 마련했 고, 안쪽으로 턱을 만들고 그 앞에는 별도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의 대좌를 놓고 그 위에 본존상 을 봉안했으며 좌우에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모셨다. 본존불은 높이2.88m로 머리에 무 수히 가늘고 얕은 음각의 선들이 나타나 있으며 정상육계는 아주 크게 표현되어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입상으로 거의 같은 양식이다. 이 석불은 손의 모양이 항마촉지인을 하고있는 아미 타불로 7세기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한밤마을 관내도와 성안 송림숲 공원
동산천공원의 소나무들과 성안송림숲공원의 이 지역 출신 장군 추모비들
※ 군위삼존석굴 석조비로자나불좌상(軍威三尊石窟 石造毘盧遮那佛坐像)<경북 유형문화재258>
이 불상은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으로 광배(光背)는 없고 대좌(臺座)는 일부 파손되어 사찰(寺刹)에서 보존되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는 평평한 편이며 얼굴은 풍만하고 목에는 삼도를 표시하였으나 목은 짧은 편이다. 수인은 전형적인 비로자나 불상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각부의 모습은 양감을 느끼게 한다.
군위삼존석굴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제2석굴암의 모습
※군위삼존석굴 모전석탑(摸塼石塔)<경북 문화재자료 제214호>
이 모전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서 통일신라시대에 건 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부는 근래에 다시 축조되어 원형에서 변형되었으나 본래의 탑형을 유지하고 있다. 탑은 방형의 단층기단 위에 화강석재를 걸고 얇게 장방형으로 잘라 방형의 단 층 탑신부를 조성한 형태이다. 기단은 모서리 기둥과 각면 3개의 안기둥 및 기단덮개돌을 지 니고 있으며 1층 탑신부에는 약20여단의 일정치 않는 장방형 판석을 쌓았다. 1층 지붕돌의 층급은 3단이며 지붕돌 상면에도 다시 여러단의 층급을 놓아 점차 체감되게 하였고 다시 그 상부 중앙에 노반 및 보주를 배치하였다. 본래 3층탑이었으나 도괴된 것을 1949년 현 모습대 로 복원하였다. 현재 기단부가 매몰되어 완전한 탑형을 알기엔 곤란하나 전형석탑의 기단부를 형성한 것이 주목된다.
각종 탱크들과 6.25때의 쌕쌕이와 아내
9) 다부동 전적기념관(多富洞戰跡記念館):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292 (Tel:054-973-6313)
이곳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6.25의 참극으로 인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 을 때, 한•미연합군이 피로써 막아 낸 다부동 혈전의 현장이다.
1950년 8월초 북한군은 제3, 13, 15사단 등 5개 사단병력을 왜관, 다부동 전선에 집중투입, 8.15까지 대구를 침공할 기세로 발악적인 총 공세를 가해 왔다. 이때 국군 제1사단과 8사단이 주축이 되어 미 제1기병사단 장병들과 함께 싸워 밀고 밀리기를 수 십차례, 아군은 최후의 일각까지 고귀한 생명을 바쳐 처절한 혈투 끝에 적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그 후에도 북한군은 9월초에 또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최후의 공세를 재개했으나, 아군은 우세한 화력과 과감한 반격으로 9월중순경에 적의 주력부대를 섬멸하여 끝내 대구-다부동 선을 고수, 반격의 보루를 확보하였다. 이 혈전에서 아군은 적 전차13대 파괴, 적 사상17,500여명 의 대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10,000여명의 인적 손실을 입었다.
경찰 또한 낙동강 방어전투에 15,000여명이 참전하여 그 중 전사자 기록에 있는 197명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이 고귀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나라를 구한 “경찰의 대구사수정신”은 6.25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곳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그때 그 현장의 교훈을 알리는 전쟁의 산 교육장으로 하기 위해 1981 년11월30일 국방부에서 건립하여 본 군이 관리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의 비행기와 호크(HAWK)미사일과 기념비의 부조물
다음날(3월28일)의 글은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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