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세가족 1박 2일 <류희윤, 박형식, 박해병 6명>-2

아름답지만~ 2013. 11. 20. 08:59

 

둘째 날의 움직임은 너무도 모두가 빠르게 움직여 식사후 도착한 구형왕릉은 우리가 선발대인 줄 알았으나 두 번째로 밀리었다. 구형왕릉을 둘러본 후 류의태 약수터(약1.72km)를 반 등산으로 오르고 망경대(1.1km)를 약10여분 오르다가 되돌아 왕산사터를 보고 생리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홀로 빠르게 내려왔다. 시원함에 출발하지만 망경루와 덕양전은 지나쳐서 동의보감촌으로 향했다.

                                   위: 구형왕릉에 있는 왕산,필봉산 등산안내도, 아래: 구형왕릉 비각<판독을 못할 정도>

                                                              위: 태대각간 김유신 비, 아래: 구형왕릉

                                               위: 능을 관리하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 아래: 왕산사터 인근에 있는 부도군

                                  위: 류의태 약수터 풍경, 아래: 동의보감촌 둘레길<류의태 약수터 오르는 임도길

동의보감촌은 엑스포 행사가 끝난 뒤라 간이천막을 철거하느라 어수선하다. 간단히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산청각의 사장이 설명을 해 주는데 더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필봉산과 왕산을 끼고 앉은 동의보감촌의 최정상에 꾸며진 동의전과 한반도의 기가 흐른다는 세 개의 바위(복석전,귀감석,석경)를 둘러보고 동의보감박물관을 들린 후 이른 점심을 삼청각<주:노관섭-전화 055-973-9966>에서 먹은 후 출발했다.

                                위는  구형왕릉 이정표(주차장1.1km,약수터0.99km 등이다), 아래: 동의보감촌 엑스포 주제관                                 

 

                                   12지 신상과 곰의 머리 모형, 아래의 산이 왕산으로 동의보감촌의 뒷산? 

                                                                        조형물에 선 일행들 

                                                위: 동의보감촌 전경 안내판, 아래: 동의전 입구의 복석정 

                                                  위는 석경, 아래는 귀감석으로 전신으로 기를 받고 있다. 

3국도에서 60지방도 입구를 지나쳐 한참을 지나서야 되돌아 60지방도로 들어서니 길은 계속 오르막이고 고개마루에 동리가 꽤 여러채의 농가주택이 있다. 자료를 뒤져보니 해발380여m인 척지(尺旨)마을이다. 이곳을 지나서 우측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서는 사행길의 굴곡이 매우 심해서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정취암이 보이고도 사행길은 계속 이어져 정상에 이르며 우측으로 휘어져 정취암을 가리키고 조금 들어서서 대형주차장에 정차, 정취암에서 사행길의 모습과 신등면 일대의 풍경 등을 보았고 신라고찰이 이런 기암절벽에 걸친 것을 뜻깊게 보고 나왔다.

                                 위: 대형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취암으로 향하다가, 아래: 정취암 못미쳐서 본 사행길

                                                        위: 절벽에 걸린 정취암, 아래 바위 밑의 부처님

                                              위: 산신탱화와 세심대의 산신령, 아래: 자리를 옮긴 곳에서의 사행길

다시 들어오던 길을 되돌아 나오고 신등면•신안면을 거쳐 단성면으로 들어 성철스님의 생가지에 들어선 겁외사에 들려 스님의 검소했던 체취를 느끼고 되돌아 나와 렌트카 사장과 동승해 원지까지 가서 렌트카를 인계하고 함양의 상림을 구경하고 옥연가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수원행 마지막 버스를 타기로 계획했으나 쏟아지는 빗줄기에 계획을 수정, 예매표를 당겨서 16시50분으로 바꾸고 기다리는 동안(1시간20여분)에 중국집에서 한잔을 걸치고 버스에 올랐다. 35고속도(대전~통영간) 충청도에 들어서니 차량으로 밀리고, 이 지체는 남이분기점까지 이어지다가 해소되더니 천안을 지나며 버스전용차선도 밀려서 거의 다블시간을 소비하고 수원버스터미널에 도착 간단히 우동류를 먹고 헤어지는 시간조차 21시가 넘었다.

                            위는 사행길로 내려 오다가 잠시 정차후 찍은 정취암, 아래는 겁외사 중앙의 성철대종사,뒤로 생가지 

 

                                          성철대종사의 생가지 전경과 생가지에서 본 겁외사의 동상과 벽해루<이층누각> 

                                                                   동의보감촌의 약용식물들<위: 소국, 아래:갯국> 

 

                                                     동의보감촌의 약용식물들<위: 레몬타임, 아래: 산국> 

7. 자료들 요약: ①산청남사리 최씨고가(山淸南沙里 崔氏古家)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5-2

이 고택은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으로, 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익랑채가 □자형(字形)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채의 좌우에는 중문이 두 곳 설치되어 있다.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은 ㄱ자 담으로 차단되어 안채와 익랑채가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따라 남녀의 생활상의 공간 분화를 분명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고,들보 5량(樑)으로 조성된 높은 팔작지붕 건물이다. 뒤 툇간은 폭이 넓어 수장기능의 벽장이 설치되거나 방으로 분할되고 있으며, 겹집형식으로 변모되고 있다. 건물의 사용 자재들은 견실하고 이 중 방문의 조각 장식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들보 5량(樑)으로 조성된 팔작지붕으로 안채처럼 겹집형식이다.

②남명조식유적(南冥曺植遺蹟) 사적305호/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사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대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의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호는 남명이다. 선생은 1501년 현재의 합천군 상가에서 태어나고, 30세가 되던 해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신어산(神魚山)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였고, 48세부터 상가에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선생에게 단성현감(丹城縣監)등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직언으로 상소하는 등 나라와 백성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로 일생을 마쳤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남명 조식은 조선유학의 종사(宗師)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과 병칭되기도 하지만 학풍과 출처가 자못 달랐다. 선생의 학문은 당시 주자학 일변도였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주자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음양(陰陽), 지리(地理), 의약(醫藥), 도류(道流), 관방(關防)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돈이(周敦頣), 소웅(邵雄), 장재(張載),정이(程頣)등의 학문을 두루 연구한뒤 원시학문으로 돌아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의 고풍(高風)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던 선생의 경의정신(敬義精神)과 실천유학은 우리 지성상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져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사대사화(四大士禍)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대를 살았다. 이같은 시대를 맞아 선생은 흩어진 사림의 원기를 다시 찾으려 하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림의 역할을 통감하면서, 직설적 언어로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백성들의 심각한 고충, 이를 외면하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횡포, 조정대신들의 무능함, 제대로 마음을 닦지않는 군왕 등 선생의 비판정신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선생이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나 무진봉사(戊辰封事)등은 그 언어가 절실하고 명쾌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림의 원기는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풍(士風)을 크게 진작시킨 선생의 명망과 은연 중에 형성된 재야세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선생을 벼슬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사림처사(士林處事)로 자처하면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평가하듯이 선생은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으로 만품(萬品)을 굽어보고,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위엄으로 천지간에 우뚝하였다.

여기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산천재,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묘소, 신도비(神道碑), 여재실(如在室)등의 사적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마루 위 벽에는 밭가는 그림 등 벽화 3점이 남아있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9)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609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이 서원 안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柌)가 있어 봄•가을로 향사를 올리며, 매년 가을에는 선생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명재(南冥祭)가 열린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으며,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자리 잡은 곳이다.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우암 宋時烈)이 비문을 지었으며, 남명기념관 경내에 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로 별묘(別廟)라고 일컫기도 한다. 남명선생의 문집책판(文集冊版)은 여러차례 변천을 겪었는데,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인조반정(仁祖反正)이전에 간행된 갑진본(甲辰本)계통, 이후 처음 간행을 주도했던 정인홍(鄭仁弘)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한 이정본(이正本)계통이 있으며, 고종 연간에 내용을 대폭 수정한 중간본(重刊本)계통이 있다. 문집은 처음 1602년(선조35) 해인사에서 간행하였으나 판각이 불에 타 1604년(선조37)에 다시 간행, 이후 이정본에서는 편년(編年)등이 추가되고 「학기유편」(學記類編)과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까지 포함한 이정집합본이 간행되었다. 현재의 목판은 중간본 계통의 최후 간행본으로 185매로 된 6책이 보존되어 있다.

③지리산 대원사 일원(智異山 大源寺 一圓)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대원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진흥왕(무진 서기548년)<혹은 585년/진흥왕9>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초기 평원사(平原寺), 대원암으로 불리다가 고종 경인년에 구봉혜흔선사(九峰慧昕禪師)가 지금의 대원사라 개칭했다. 이 절은 임진왜란(1592)과 여순사건(1948)때 화재로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혹은 1959>에 법일(法一)스님이 다시 세웠다.

이 절은 양산의 석남사(石南寺) 및 충남 수덕사(修德寺)의 견성암(見性庵)과 더불어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參禪)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세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구층석탑과 대웅전 및 여러 건물과 부도 등이 있다.

 

 

 

 

이 절을 둘러싼 경관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절에서 조금 올라가면 용이 100년간 살았다는 용소(龍沼)가 있는데, 바위가 뚫려서 굴처럼 된 것으로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다. 깊이는 약5m정도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밖에도 대원사 주위에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과 관련된 지명이 이곳저곳에 남아있다. 그가 소와 말의 먹이를 먹였다는 소막골, 그가 넘었다고 하는 왕산과 말을 보았다는 망덕재, 군량미를 저장하였다는 토장굴 등이 오늘날까지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3편으로 이어서 정리하겠습니다. 끝까지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