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산청 구형왕릉(山淸 仇衡王陵) 사적 제214호/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가락국(駕洛國:金官伽倻)10대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특이한 석조물(石造物)이다. 동쪽으로 경사면에 피라밋 모양으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을 줄여가며 모나게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느데, 전체 높이는 7.1m이다. 각 단 앞부분의 양쪽에는 모서리가 분명하지만, 뒤쪽은 경사면에 붙여 돌을 쌓아 모서리가 없다. 네 번째 단에는 가로40㎝, 세로40㎝, 깊이68㎝의 감실(龕室)과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은 신주(神主)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여기에서의 용도는 알 수 없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긴 비석이 있고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다. 문무인석(文武人石), 석수(石獸),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등도 배치되어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구형왕릉이라는 명칭은 확증은 없고 그렇게 전해진다는 뜻으로 부쳐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아래쪽에 있는 암자 부근에 왕산사(王山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었고, 지역의 전승에는 약200년 전에 왕산사에서 활, 칼 등과 함께 왕릉에 대한 기록도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을 다 내려 간 입구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시는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덕양전 경내에는 홍살문, 영정각, 안향각, 정숙당, 추모재 등의 건축물과 연못이 있으며, 해마다 음력3월16일과 9월16일에 제향(祭享)이 올려지고 있다.
⒜왕산사지(王山寺祉) 경상남도 기념물 제164호/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에서 약1㎞ 떨어진 산 중턱에 왕산사라고 전하는 절터가 있다. 왕산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연혁을 알 수 없다. 다만 탄영(坦瑛)이라는 스님이 쓴 「왕산사기」(王山寺記)에 의하면 이 절터가 가락국의 구형왕(521~532재위)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산양현(山陽縣)의 서쪽 모퉁이, 방문산(方文山)의 동쪽산록에 산이 있는데, 왕산이라고 부른다. 산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기 때문에 왕산이라고 한다. 능묘를 수호하였기 때문에 왕사(王寺)라고 하였는데, 절은 원래 왕산의 정궁이었다. 능은 곧 가락국 10대왕인 구형왕이 자리잡았던 현궁(玄宮)이었다.”라고 한다.
절터 안에는 현재 4개소의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초석을 비롯하여 돌담, 축대, 우물, 비를 세웠던 받침돌, 부도 등이 남아있다. 많은 양의 기와 조각 및 그릇 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컸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왕산사지는 묵어서 잡초밭이고 뒤늦은 꽃 하나만을 담고는 내려왔다.
⒝류의태 약수터 유래
류의태 선생은 1516년(중종11)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옛지명:山陰縣丁台)에서 출생하여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선생의 스승으로 당대(조선중기) 최고의 신의로 알려져 있으며, 선생의 몸을 제자 허준에게 시술토록 하여 해부의학(解剖醫學)의 효시를 이룬 살신성인의 의술가이시다. 류의태 선생은 산청군(당시 산음현) 금서면 화계지구에서 의술활동을 하였으며, 왕산의 자생약초에 본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조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류의태 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을 “천인수(千蚓水)”(혹은 萬蚓水라고도 함)를 마셔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 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느데 물을 가려써야 한다며 물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 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로 감히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눈이 내린 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본 약수는 돌너덜 아래의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고 있다.
(註: “천년 두골<千年 頭骨>에 천인수<千蚓水>”는 천년묵은 사람의 해골에 담긴 천년된 물을 이루며, 만년된 물을 만인수<萬蚓水>라 함)
⑤한반도 최고의 기가 흐르는 동의전 마당
엑스포장에서 가장 높은 곳, 앞에 보이는 건축물은 지리산 기운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은 동의전(東醫殿)입니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은 왕산(923m)으로 이름이 왕자로 시작되는 유일한 산인데, 532년 구형왕을 끝으로 멸망한 가락국의 마지막 흔적을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필봉산(848m)은 전국에 있는 문필봉(산의 모양이 붓끝처럼 뾰죽할 때 불리는 지명)중 가장 잘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동의전 주변으로는 세 개의 바위(복석정,귀감석,석경)가 있다. 산청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있어 한반도에서 가장 기가 세다고 전해 와 오른쪽 너럭바위는 복석정(福石鼎)으로 바위주변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동의전 뒤 거북바위(龜鑑石)에서는 온 몸으로 기를 받고, 그 위에 있는 돌거울(石鏡)에서는 이마로 기를 받으며, 기천문(氣天門)은 기가 하늘로 통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위의 뾰죽한 산은 문필봉으로 동의전 뒷산인 왕산과 연계산행을 할 수 있다.
⒜삼석의 기를 받은 사람들
한국관광공사 이참 사장 등(귀감이 되는 글자를 새긴 바위,귀감석)
2009년 5월,문화관광부에서 동의보감촌 삼석의 좋은 기를 받고자 산청에 방문합니다. 여기에 한 국관광공사 이참 사장이 함께 했는데, 당시에는 한국관광공사와는 관계가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 나 방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추천 받은 일화가 있습니다.또한 공직 입문, 입시 합격, 소망 성취의 사례가 수없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삼석의 기운을 받은 덕분이라며 감사의 뜻으로 재방문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건강해진 사람들(돌로 만들어진 거울,석경)
석경은 자신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석경의 기운은 자신을 돌아보고 나쁜 기운을 내보내며, 재생하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가까운 예로 허리가 많이 아팠던 산청군의 문화관광 해설사는 직업으로 석경에 자주 방문하면서 점차 호전되어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치유 받고 싶을 때, 석경을 방문하시면 신비로 운 기운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좋은 기운으로 이겨낸 불임(복을 담아내는 그릇,복석정)
삼석의 기운과 관련한 이야기들 중 가장 많은 이야기가 바로 임신입니다. 7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부산의 한 공무원은 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위해 산청에 파견된 지 일주일 만에 아이를 가졌습니 다. 양산에서는 10년동안 불임이었던 여성이 삼석(석경,귀감석,복석정)의 기운을 받고 임신했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불임을 치료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만큼 우리 몸에 좋은 기 운이 듬뿍 흐른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위: 동의전 구역배치도, 아래: 동의전 (아래에서 본 건물은 커다란 사찰로 오인)
위: 미륵전의 한문이 무슨 체인지?, 아래: 석경의 후면에 새겨진 글씨가 무슨 뜻인지?
석경의 모습과 이마를 대고 기를 받으면 원하는 바를 이룰수 있다고?
위: 엑스포 기간 중의 그늘막 통로, 아래: 위 통로를 거쳐 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동의보감촌
위: 산청에서 보이는 산을 나열했으나 잘 모르겠고, 아래: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선생 동상
아래는 입구쪽에서 올려다 본 동의전 일대
⑥대성산 정취암 연혁(大聖山 淨趣庵 沿革)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927-2번지
절암현정취(絶巖懸淨趣)<기암절벽에 매달린 정취암은>
산천일망통(山川一望通)<산천이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만학백운기(萬壑白雲起)<골짜기에 흰 구름 펴오르는 곳>
구문담진적(扣門淡塵跡)<문을 두드리면 세상에서 찌든 마음 맑게 씻긴다.>
정취암(淨趣庵)은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방향 약10㎞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의 기암절벽(奇巖絶壁) 사이에 자리한 절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金剛)에 버금한다 하여 예부터 소금강(素琴剛)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6년(丙戌,
686년)에 동해에서 장육금신(丈六金身: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瑞光)을 발하니 한줄기는 금강산(金剛山)을 비추고 또 한줄기는 대성산(大聖山)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께서 관(觀)해 보시고 두 줄기 서광(瑞光)을 쫓아 금성산에는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淨趣寺)를 창건(創建)하였다. 정취암에 계시던 의상스님께서는 도리천(忉利天)의 길상천녀(吉祥天女)가 올리는 공양을 드셨는데, 어느 날 원효대사께서 방문하신 후부터 천공(天供)드시는 것을 그만두셨다고 전한다. 당시 정취사와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고 계시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께서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 수행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정취암은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중기 기록에는 정취사(淨趣寺)로 기록되어 있는데,조선후기에서 구한말(舊韓末) 사이에 조성된 불화(佛畵)에는 정취암(淨趣庵)으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취암은 정취관음보살을 본전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 유일의 사찰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이같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정취보살상(淨趣菩薩像)을 우리나라에 처음 모신 것은 신라 헌강왕(憲康王)2년(戊寅,858년) 굴산(屈山)범일선사(梵日禪師)가 낙산사에 봉안, 고려 고종41년(甲寅,1254년)에 명주성(溟洲城)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10인(夜別抄10人)과 사노(寺奴)인 걸승(乞升)이 정취보살상을 땅속에 묻어 난을 누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후 기림사주지 각유선사(覺猷禪師)가 이 정취보살은 국가의 신보(神寶)이니 어부(御府: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부(御府)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3년에 화경, 경신(華敬,景信) 두 거사(居士)가 정취사를 중건한 후 어부(御府:궁궐)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이운(移運)하여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또 이 무렵 설화로 전해지는 문가학과 정취암에 얼킨 구미호 설화와 문가학의 역모사건은 당시 원나라를 추종하던 보수세력과 공민왕을 따르던 개혁세력간의 갈등관계가 설화로 각색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같은 사건들은 정취사가 당시 공민왕의 개혁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로 부터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개혁세력의 주요한 거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취암은 창건 이래 고승납자(高僧衲子)들의 요결처(了結處)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고암대종사(古巖大宗師)께서도 한때 주석(主席)하시며 정진(精進)하였다. 또한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정취관음보살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보문속질행해탈(普聞速疾行解脫)을 성취하였으며, 정취보살께서 나투시는 최고의 성지이다. 그러나 조선 효종(孝宗)3년4월26일(壬辰:1652年) 화마로 모든 전각이 전소하였으며, 이때 정취보살상도 함께 소실되어 창건 이래 가장 큰 비운을 맞았다.
당시 정취암에서 정진하시던 봉성당(鳳城堂)치헌선사(致憲禪師)께서 효종4년(癸巳,1653)에서 9년(戊戌,1658) 사이에 화주를 구하고 사재를 내어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彫觀音菩薩坐像,정취관음보살상)은 효종5년(甲午,1654)에 소실된 정취보살상을 재현,조성하였다고 전한다. 봉선당 치헌선사는 정취암의 중창조(重創祖)로 이후 평생을 정취암에 주석하시면서 큰 법력으로 중생들을 안위(安爲)케 하였으며, 그의 생몰년대는 전하지 않으나 입적기일(入寂忌日)은 음력11월20일이다.
⒜산청 정취암 목조관음보살좌상(山淸 淨趣庵 木彫觀音菩薩坐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14호/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정취암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연꽃무늬 대좌 위에 있는 관음보살상이다.이 불상은 불신(佛身)과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낮은 대좌가 하나의 목재로 조성되었으며 등을 세우고 머리부분을 약간 앞으로 내민 가부좌를 하고있는 모습이다.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 중앙에 큰 화불(化佛)과 앞뒤로 불꽃무늬 장식이 달려 있으나 후대에 따로 만들어 부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네모 반듯하며 턱이 둥근 형태이고 가늘고 긴눈, 완만한 콧등, 입술 양 끝에 양감을 주어 미소를 머금은 모습등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를 얕게 표현하였다. 옷 주름선은 대체적으로 간략한데, 반가부좌하여 드러난 오른발 밑으로 보이는 군의자락을 종아리와 평행하게 드리운 것이 특징적이다.규모는 50㎝정도의 크기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산청 정취암 산신탱화(山淸 淨趣庵 山神幀畵)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
이 그림은 1833년(純祖3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기 150㎝크기의 불화(佛畵)이다. 불화라고 하지만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행차하는 것을 협시동자(挾侍童子)가 받들고 있는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의 주제는 불교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토속신앙과 불교의 혼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⑦겁외사(劫外寺)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0
“상대유한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를 지녔고 2001년 3월30일 불필스님과 당국의 협조로 창건되었다. 큰스님의 생가를 복원하여 선친의 호를 따라 율은고거(栗隱古居)라 이름하였는데, 전시관인 포영당(泡影堂),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齋), 안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 부분은 대웅전(大雄殿), 누각 벽해루(碧海樓), 심검당(尋劍堂), 요사채로 구성되었다. 마당 중앙에 성철스님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성철대종사(性徹大宗師)
1912년 4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엄부 이상언님과 자모 강상봉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영주(英柱)이고 법호는 퇴옹(退翁)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을 배우면서 한문문리를 터득한 후 다른 이에게 더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하동산(河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 하였다. 1939년 도를 깨친 이후 파계사 선정암에서 행한 10여년의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동구불출(洞口不出)이 세간에 회자되다.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 7대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라는 법어를 내려 온 국민의 불심을 일깨웠다. 1993년11월 4일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에게 “참선 잘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세수82세 법랍58년의 세연으로 열반에 드셨다.
생가로 들어서는 혜근문과 생가를 복원한 율은고거
전시관인 포영당과 사랑채인 율은재
끝까지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눈팅은 사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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