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문을 지나 오름길 돌탑 사이를 지나며 영흥정(靈興井)이란 지하수가 있으나 결빙으로 단수되어 있으며, 그 뒤로 케이블카 타는 곳이다. 좌편으로 계단을 오르면 해운사지만 그대로 통과해 도선굴 삼거리(↖정상2.2km,폭포0.1km,↗도선굴0.2km,↓채미정)에서 도선굴을 다녀 오려고 우측으로 방향을 돌린다. 조금 오른 곳이 다소 미끄럽게 결빙지역이라 조심하며 우측 오름바위를 올라서니 좁다란 바윗길에 굵직한 철 봉대를 설치했으나 아주 조심스레 올라 다시 턱진 바위를 밧불에 의지해 오르니 구미시와 금오랜드, 조금 더 진행하니 해운사 전경과 상가지역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도선굴 옆 세류폭포가 긴 고드름을 드리우고 있다.
금오산성 안내도와 안에서 본 대혜문
21개의 돌탑 중이며, 영흥정은 사람이 다가가면 자동으로 흐르나 빙판을 우려해 꺼놓음
해월사 입구의 모습과 도선굴 갈림이정표
※도선굴(道詵窟): 이 굴은 천연 동굴이며 암벽에 뚫린 큰 구멍이기에 대혈(大穴)이라고도 했으나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선사가 득도(得道)했다해서 도선굴이라 한다. 고려 충신 야은(冶隱)길재(吉再)선생이 대혈사(大穴寺)와 이 굴 아래를 소요(逍遙)하며 도학(道學)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 향인(鄕人)이 난(亂)을 피해 암벽의 틈에 기어 오르는 칡덩굴을 부여잡고 이 굴에 들어와 세류폭포(細流瀑布)의 물을 긴막대로 받아 먹으며 피난 했으니 그 연인원이 100여명에 달했다하며, 현재의 통로는 1937년경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며 굴 내부는 길이 7.2m, 높이 4.5m, 너비 4.8m 정도된다.
짧은 거리지만 바위벽에 아슬아슬하게 설치한 도선굴 가는길, 도선굴 옆에 흐르는 세류폭포가 얼어 붙었다.
도선굴에서 내려다 본 해월사 전경과 도선굴 내부의 석판 아마 길을 개통한 석판인듯 순 한문이다.
큰굴 내부에 작은 굴이 2개 있다. 아래는 윗부분 길이고 가운데 턱이진 비탈이 존재한다.
윗턱에서 조심해 아래턱으로 내려서는 짝쿵과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본 도선굴 옆 세류폭포
되돌아 삼거리에서 몇발자국 옮기니 대혜폭포의 얼음벽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고 주변 쉼터는 얼음판이다. 이후는 지그재그로 놓인 계단길(507개)을 10여분 오르니 할딱고개다.
※대혜폭포(大惠瀑布)와 욕담(浴潭): 해발 400m지점에 위치한 수직 27m 높이의 이 폭포는 대혜폭포 또는 대혜비폭(大惠飛暴)이라 하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는 별명도 있다. 금오산 정상부근의 분지에서 발원하여 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이 고장 관개(灌漑)의 유일한 수자원이 되니 큰 은혜의 골이라 하여 대혜골이라 했고 주변의 경관은 경북8경 또는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또한 물이 떨어지는 일대의 움푹 패인 연못이 있어 욕담(浴潭)이라 하니 선녀들이 폭포의 물보라가 이는 날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주변 경관과 옥같이 맑은 물에 탐하여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잠시 전망대(15계단)에서 주변을 둘러본 후 바위등 같은 등로를 오르는데 차츰 얼어붙은 곳이 많아 아이젠을 착용한 후 정상을 향하는 좌측의 바위가 시선을 자꾸 끌게한다. 바짝 치켜세운 산을 지그재그로 등로가 열려 있고 또다른 폭포가 얼어붙은체 나타나고 얼마후 삼거리(↖마애석불0.6km,↗정상•약사암0.9km,성안0.8km)에 이르러 마애석불은 통행금지구역으로 우측으로 산허리를 돌아 몇분 후 삼거리(←정상0.8km,→폭포1.3km,↑성안0.7km)를 지나니 금오산성 안내판과 내성의 일부분인 듯한 곳을 지난다.
※금오산성(金烏山城): 금오산성은 조선조 초에 인동의 천생산성과 같이 낙동강을 낀 영남지방의 전략요충지로써 3,500여명의 군병으로 선산, 개령, 김천, 지례등 4군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에는 정기룡(鄭起龍)장군이 왜적을 맞아 이 산성을 지켰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산성의 축성과 규모는 1410년(태종10)과 1595년(선조28)에 축성하였으나 그 규모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1639년(인조17)에 수축한 내성은 둘레 7,644척(2,316m) 높이 7척(2.1m) 자연절벽이 661보 이며 외성은 둘레 4,135척(1,253m) 높이 14척(4.2m)이고 성안에는 못 7개소 샘 8개, 1개의 걸(개천)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후 1868년(고종5)11월에 산성을 보수 정비하였으며 이때 세웠던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성내에 현존하고 있다.
3분여 후 삼거리(←정상•약사암0.3km,→폭포1.8km,↑성안0.9km)를 지나며 오름길은 가파라지고 돌들을 밟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며 10여분 만에 정상에 오르고, 다시 조금 내려서 우측으로 동국제일문이란 약사암 일주문을 통과해 아느한 곳에서 간식을 먹고 떠난다. 약사암에서 마애석불 가는길을 보니 그곳도 통행금지 표지를 달아 그곳을 들려 볼 마음을 포기하고 올라왔던 길로 하산을 하며 오를 때 보지 못했을 풍경을 찾으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얹혀진 곳을 지나 삼거리(←정상0.8km,→폭포1.3km,↑성안0.7km)를 지나 조금후는 급격한 경사로 지그재그인 등로를 따라 20여분을 조심하니 할딱고개이다. 대혜폭포를 지나고 금오동학을 지나 20여분 후에는 채미정에 들려 내부를 다녀서 나온다.
지그재그로 마지막 오름길은 미끄럽고, 약사암 일주문은 동국제일문으로 붙었다,
약사암은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이 큰 법당, 가분수의 바위가 올라 앉은 모습
급경사 하산길이 지그재그로 열려 있고 오전에 이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구미 채미정(龜尾 採薇亭) <명승 제52호,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249>
이 건물은 야은(冶隱)길재(吉再,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英祖)44년(1768)에 건립된 정자이다. 길재는 고려시대인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善山)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伯夷)•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채미정은 흥기문(興起門))을 지나 우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肅宗)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유허비각(遺墟碑閣)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상가지역에서 금오산호텔까지는 메타세콰이어 길이고, 채미정의 관리숙소였던 구인재
채미정과 경모각
금오산의 기록을 2편으로 완결하고 다음 편에는 금ㅁ오지와 박대통령 생가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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