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경주여행에서 빠진 기록들-1

아름답지만~ 2017. 2. 6. 16:52

우리들 사는 세상은 늘 건강하고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느끼고 살았다. 헌데 오늘 대한문을

다녀온 기분은 우리가 과연 믿을만한 매체를 접하며 살았는가 의심스럽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광경을 방송 매체는 아주 조금 비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참에 언론과 방송매체를 보이콧 하는 행사를 벌여야 할 것 같다. 은근히 화가 치미러

오르고 불공평에 끌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경주여행에서 빠트린 이야기를 정리하며

마무리를 짓고져 한다.

우리 부부가 여행했던 날은 그동안 춥지 않던 기온에서 급강하한 날이었다. 그래도 단련된

부부의 여행길은 감히 그 누가 막지 못할 날이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재방문에 낯설지

않은 지리, 마치 아는 집을 찾듯 첫날 숙소를 잡았고 첫밤을 무사히 보내며, 첫날의 계획을

짜고 홀로 새벽잠을 깨어 산보가 이루어졌다.

1) 노서동 석불입상(老西洞 石佛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 경주시 노서동 156-8

새벽운동을 하러 나온 주차장 근처는 새벽부터 분주하기만 했고, 수많은 버스들이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동을 켜고 엔진온도를 올리려 노력 중이다. 그 어둠 속에서

흐미하게 보이는 건물 그게 석불입상을 모셔 논 정자이다.

이 불상은 다리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으며 얼굴은 파손되어 모양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광배(光背)는 머리 둘레의 두광(頭光)과 몸 둘레의 신광(身光)이 각각 2중선으로 표현되었으나 신광은 완전히 파괴되고 두광도 많이 망가져 자세히 알 수 없다.

몸은 비교적 세련되고 허리 위가 길게 표현되었다. 당당한 어깨에서 가슴 일부까지 마모되어 있어서 옷은 어떻게 걸쳐졌는지 알 수 없고, 가슴부터 아래로는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면서 층단을 이루어 촘촘하게 표현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삼랑사터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삼랑사(三郞寺) 남쪽에 남항사(南巷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남항사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항사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삼랑사 경흥(憬興)스님의 병을 고친 11면관음보살 전설이 있는 곳이다.

◐ 1월11일의 새벽운동과 13일 양동마을 때문에 들렸던 곳으로 어찌보면 초라하다.

2) 경주 남산동 동•서삼층석탑(慶州 南山洞 東•西三層石塔)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염불사지를 거치며 그동안 신라유물을 끊임없이 발굴조사하여

새로운 유적지를 발굴하고 복원하여, 과거의 유적지 탑방에서는 낯설은 곳이다.

주 남산동 동•서삼층석탑(慶州 南山洞 東•西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통일신라 9세기

이 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동탑은 3층인데,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을 얹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 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서탑은 이중(二重)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적인 형태로 윗 기단의 몸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돋을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須彌山)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 1월 11일 남산의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보고 내려와 염불사지 다음으로 만났던

불사지이나 남산동 동서삼층석탑으로만 기록되고 있다.

3) 통일전

염불사지와 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지나면 만나는 서출지, 이곳 옆에는 꽤 넓은

터에 통일전이 위치한다. 혁명정부 시절 조성된 통일전은 우리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조성한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으로 이룩된 성역이다.

이곳 남산(南山)은 화랑(花郞)들이 몸(身)과 마음(心)을 닦던(修鍊) 신라(新羅)의 성산(聖山)이다. 골골(谷谷)이 남아(散在)있는 석불(石佛),석탑(石塔),사지등(寺址等)은 천년(千年) 서라벌(徐羅伐)의 찬연(燦然)한 문화(文化)를 꿈처럼 간직(保存)하고 있다.

신라(新羅)는 서기 660년(年) 백제(百濟)를 병합(倂合)하고, 668년(年) 고구려(高句麗)를 통합(統合)하여 통일신라문화(統一新羅文化)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열었던 것이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 분부(吩咐)를 받들어 1977년 이 곳에 통일전(統一殿)을 조성(造成)한 것은 역사적(歷史的) 과업(課業)을 완수(完遂)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문무왕(文武王),김유신 장군(金庾信 將軍)의 업적(業績)을 길이 찬양하고 화랑(花郞)의 옛 정신(精神)을 오늘(今日)에 이어 받아(繼承) 발전(發 展)하는 조국(祖國)의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로 삼고자 함이다.

통일전(統一殿)에는 太宗武烈王),문무왕(文武王),김유신 장군(金庾信 將軍)의 영정(影幀)이 봉안(奉安)되어 있고 회랑(廻廊)에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기록화(記錄畵)가 전시(展示)되었다. 경역(境域)에는 삼국통일기념비(三國統一記念碑)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문무왕(文武王),김유신 장군(金庾信 將軍)의 사적비(事績碑)가 서(設立)있다.

우리는 신라 삼국통일(新羅 三國統一)의 정신(精神)을 오늘(今日)에 이어 받아(繼承) 민족중흥(民族中興)의 역사적 과업(歷史的 課業)을 기어이 완수(完遂)하여 조국(祖國)의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이룩(成就)해야 하겠다.

◐ 1월 11일 안에는 참배하지 않고 지나간 성역이다.

동남산 가는길 명소

월정교(사적 제457호)[월정교는 「삼국사기」‘경덕왕조에 경덕왕 19년 2월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월정 두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서 전하는 교량으로 신라왕경의 주요 교통로였다.]

남산탑곡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높이9m나 되는

커다란 바위에 황룡사9층목탑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으며, 여러 불상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하 였다.]

춘양교지(사적 제457호)[월정교와 함께 신라왕경의 주요 교통로로 사용된 춘양교가 있던 터이다.]

보리사마애석불(도유형문화재 제193호)[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로서는 드물게 보는 온화한 얼굴표

정과 단정한 자세에 의해 명상에 잠긴 부처의 자비심을 표현한 마애불이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부처의 얼굴이 온화한 할머니를 닮았다하여 할매부처,

혹은 감실부처로 불리며 남산의 불상중 연대가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남산미륵곡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불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산림을 학술적,역사적으로 보존하고 일반인에게 수목,야생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화랑교육원[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한 빛난 얼을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체득시켜

새로운 화랑을 육성하기 위하여 1973년에 건립하였다.]

헌강왕릉(사적 제187호)[신라 제49대 헌강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로 유명한 경문왕의 첫째

아들이다. 재위중 처용무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경주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신라는 점차 쇠퇴기에 접어 들었다.]

정강왕릉(사적 제186호)[신라 제50대왕인 정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헌강왕(憲 康王)에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으며, 자식이 없어

누이 동생 ‘만’이 신라 51대 진성여왕이 되었다.

통일전[역사적 성업을 완수한 태종무열왕,문무왕,김유신 장군의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 받아 발전하는 조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이곳에 통일전을 조성하였다.]

남산동동•서삼층석탑(보물 제124호)[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 동서 두탑은 각각 양식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흔치 않은 모습이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마주 서 있다.]

서출지(사적 제138호)[이 못에서 글이 나와 신라 소지왕을 죽이려는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부르고 7월말에서 8월 중순까지 백일홍과 어우러진 연꽃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사적 제311호)[삼국유사에 나오는 염불사에 있는 석탑으로 스님의 염불소리가

한결같이 낭랑한 목소리로 들렸다고 해서 염불사로 불린다.]

인용사지(도문화재자료 제240호)[이곳은 신라 문무왕때 김인문(金仁問;629~694)을 위하여

세웠던 인용사(仁容寺)터이다.]

상서장(도기념물 제46호)[신라 명필가 최치원이 머무르며 왕에게 상소를 올렸던 곳이다.]

4) 화랑교육원

화랑교육원[설립목적: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민족 문화를 창조한 화랑의 빛난 얼을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체득하게 하여 민족 주체성이 강한 참된 새화랑을 육성함/1970년 거립확정]

화랑교육원 건물배치[1.화랑문(정문), 2.화랑관, 3.남산정사(연구동), 4.국선당(사무동), 5.화랑의 집(본관), 6.금오정사, 7.화백당, 8.실외화장실, 9.연못, 10.화랑정(국궁장), 11.육덕장(씨름장), 12.운동장, 13.테니스장]

◐ 1월 11일 정강왕릉과 헌강왕릉을 거쳐 화랑정(국궁장)의 옆으로 지나가며 몇

건물만 보며 지나친 곳이다.

5)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사적 제8호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염원이 깃든 사찰로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발원하여 세웠다. 지금은 금당터,목탑터,중문터,회랑터,익랑터(翼廊址) 등과 당간지주(幢竿支柱),머리 부분이 없어진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2기등이 남아 있으며 강당터 등 유적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철로를 내면서 파괴되었다.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루어졌으며, 신라 최고의 조각가 양지(良志)가 만든 힘차고 사실적인 소상(塑像)인 녹유사천왕상전(綠柚四天王像塼)이 출토되었다. 2006년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학술발굴조사가 7년 동안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녹유사천왕상전의 도상(圖像)이 완전하게 복원되었고 가람배치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또한 비각지,석교,비편 등이 추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 석교는 불국의 정토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미학적인 면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 1월 11일 선덕여왕릉을 보고난 후 들렸으나 덩그런히 빈터만 보였다.

6) 경주 방내리 고분군1호 돌방무덤(慶州 芳內里 古墳群 1號 石室墳)

삼국시대(신라,7세기경)

경주 방내리 고분군은 단석산 동쪽 끝자락인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 산20-2번지 일원의 구릉에 위치한 삼국시대 고분유적이다. 경부고속철도 건설공사를 위해 2005년11월15일부터 2007년10월8일까지 (재)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하여 삼국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墓) 34기, 돌방무덤(石室墳) 23기, 고려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墳) 1기 등을 확인하였다.

이곳에 이전복원 된 1호 돌방무덤은 널방(玄室),널길(羨道),호석(護石),봉토(封墳)를 잘 갖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이다. 널방은 남북방향의 긴네모꼴(長方形)이며, 규모는 길이 189cm, 너비 120cm, 높이 145cm이다. 널방의 축조방법은 판돌과 깬돌을 사용하여 7~8단 정도 쌓아 올린 후, 긴 모양의 판돌 3매를 덮개돌(蓋石)로 사용하였다. 널방 남쪽으로 이어지는 널길은 길이 14cm, 너비 75cm이며 판돌 3~4매를 덮개돌로 사용하였다. 널방에서 널길쪽으로 60cm되는 곳에는 막음돌(閉塞石)을 두었으며, 바닥에는 배수로(排水路)를 설치하였다. 봉토는 둥근꼴이며, 규모는 호석이 설치되어 있는 지점을 기준으로 지름 8~9m, 높이 190cm이다. 유물은 굽다리단지(臺附壼) 1점과 토제가락바퀴(紡錘車) 1점이 널방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방내리고분군은 1호 돌방무덤을 비롯한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의 구조와 축조방법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1월 12일 단석산을 찾기위해 신경주역에서 담은 돌방무덤이다.

7) 108탑림공원

◐ 1월 12일 단석산을 올랐다가 큰 길을 향하며 스쳐간 곳으로 다보탑과 충주 중원 7층석탑을 만들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한 곳이다.

위대한 한민족 평화통일 발원 108 탑림공원 [특 1호탑 다보탑(건국의 탑),

건국 초대(제1,2,3대) 이승만 대통령 추모탑]후원자:대한민국 건국절 제정 추진연합회 최성규 상임대표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이 심 회장

위대한 한민족 평화통일 발원 108 탑림공원 [특 2호탑 충주 중원 7층탑(중흥의 탑),

민족 중흥 박정희(제5,6,7대) 대통령 추모탑]후원자: 경주이씨 중앙 화수회

(주) 동일그룹 이필우 회장

                              위: 오덕선원 대웅전 뒤로 108탑림공원 탑이 보이고, 아래는 요사채

                                      위: 오덕선원 쪽에서, 아래: 아래 쪽에서 오르는 쪽으로

8) 황성공원(皇城公園)

경주시 황성공원 안내도

☺공원의 유래[옛날 경주(동경)는 숲의 도시 였으며, 그 중심에 위치한 고양수(高陽藪)라 불리던 곳이 지금의 황성공원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동경의 불길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숲을 조성하였고, 동경의 영원한 영화를 누리기 위한 유서깊은 황성공원은 우리 시민의 자랑스런 휴식 공간입니다. 다같이 아끼고 가꾸어서 오래도록 잘 보존합시다.]

☺공원 현황[위치: 경주시 황성동 산1-1번지, 면적: 895,373㎡, 관리청: 경주시,

공원조성: 1975. 2.17, 생육수목: 소나무 외 58종 11,773본]

☺주요시설[문화시설: 경주예술의 전당, 체육시설: 시민운동장(13,000명 수용), 실내체육관(8,200명 수용), 씨름장(5,000명 수용), 체육공원(운동시설 20종), 축구공원(천연잔디 3면, 인조잔디 3면), 궁도장, 풋살구장, 테니스장, 게이트볼구장, 로울러스케이트장, 편의시설: 주차장, 화장실(5동), 기타시설: 충혼탑,김유신장군 동상, 최시형선생 동상, 6.25참전용사 무공선양비, 임란의사 추모비, 청소년수련관, 시립도서관 ]

◐ 1월 12일 소금강산을 들려서 도보로 방문해 둘러본 시설이다.

                                                    2부로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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