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효소왕릉(孝昭王陵) 사적 제184호,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을 모신 곳으로 토함산(吐含山)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 구릉 끝자락에 있다. 능은 밑 둘레 약 67m, 지름 약20m, 높이 약 4.5m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호석(護石)을 돌렸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동쪽 가까운 곳에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이 있다.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발전이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시장에 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두어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 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다. |
신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리홍(理洪)인데 후에 리공(理恭)이라고 개명했다.
6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했다. 재위 9년이던 700년
신목왕후가 죽고, 2년 뒤에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한 효소왕이 16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효소왕 때의 치적은 대부분 신목왕후의 섭정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학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하고 의학박사를 두어 중국의 의서인 본초경(本草經),
침경(針經),맥경(脈經) 등을 가르치게 했다. 694년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고구려
영토 지역에 송악성(松岳城; 지금의 개성)과 우잠성(牛岑城)을 쌓았다.
◐ 1월 11일 택시로 입구를 들어서니 철길이 막혀 철로를 횡단해 들어가 성덕왕릉과 함께
효소왕릉을 방문했었다.
7) 성덕왕릉(聖德王陵) 사적 제28호,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金興光)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 둘레 46m,지름 14.5m,높이 5m이다. 판석 사이에는 탱석(撐石)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동촌(東村)의 남쪽 양장곡(楊長谷) 혹은 이거사(利車寺) 남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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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 귀부(聖德王陵 龜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이 귀부는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 받침돌이다. 거북머리는 깨어져 없어졌지만, 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귀부의 가운데에는 비신(碑身)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있다. 여기에 세워진 거북 등무늬나 당초문은 8세기 전반 신라왕릉에 건립된 귀부의 제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신과 머릿돌은 없어졌지만 경덕왕(景德王)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릉과 서악동 귀부와는 같은 양식을 하고 있으나 창림사지(蒼林寺址 ) 귀부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7세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귀부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성덕왕릉은 신라 최초의 완비된 형식을 갖춘 능묘로 둘레돌(護石)의 제도가 크게
발전했고, 능 모퉁이 네 곳에 돌사자, 앞쪽에 돌사람을 문인석 2구, 무인석 2구를 좌우에
배치했으며, 앞쪽 왼편에 능비를 세워 놓았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효소왕 사후 귀족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704년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성정왕후(成貞王后) 또는 엄정왕후(嚴貞王后)]을
비(妃)로 맞았으나 713年에 내보냈고, 720年 이찬(伊湌)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
소덕왕후(炤德王后)로 삼았다. 724年에 계비 소덕왕후가 죽자 성덕왕은 세상을 떠날때까지
홀로 살았다.
성덕왕 때는 자연재해와 흉년이 잦아서 항상 백성들의 생활과 궁핍을 염려했다. 특히
722년에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여 생산성을 높인 왕이다.
◐ 효소왕릉과 함께 철길을 넘어가 다녀온 곳이다.
8) 원성왕릉(元聖王陵) 사적 제26호, 경주시 외동읍 신계입실길 139(외동읍 괘릉리)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김경신)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70m,지름 21.9m,높이 7.7m로 능의 둘레 싼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좌우에 화표석(華表石),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돌사자(石獅子)를 마주 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십이지신상•난간석•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으매 1등공신이던 김주원이 즉위식날 궁성으로 들어와야
하건만 큰 비로 하천이 범람하여 가지 못하게 되고, 신하들은 김주원이 하늘의 뜻이라
하여 2등 공신인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김주원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쳐
올까 두려워 정치계에서 물러나 강릉으로 올라갔다 한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慶州 元聖王陵 石像 石柱一括) 보물 제1427호, 통일신라시대 8세기말 원성왕릉 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각 1쌍과 돌사 자(石獅子) 4마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이 중 무인석은 박진감이 넘치며 그 얼굴에 서역인(西域人)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통일신라가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석조물들은 8세기 말 신라인의 사실적이며 예술적인 감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
원성왕이 왕위에 오른 후 가뭄에 시달리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으나 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해 풍요롭게 지냈다. 이에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 1월 11일 늦은 점심을 먹고 교동 최씨고택을 둘러본 후 큰 길로 나와 택시로 처음 들른
곳으로 허겁지겁 돌았다.
9) 문성왕릉(文聖王陵) 사적 제518호, 경주시 서악4길 80-100
이 능은 신라 제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모셔진 곳으로 선도산(仙桃山)의 남쪽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에는 둘레돌이나 상석(床石)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름은 약 18m, 높이는 약 4m이다. 왕은 신무왕(神武王)의 아들로 쇠퇴기에 재위하였으나 청해진(淸海鎭)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穴口鎭, 현재 강화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臨海殿)을 크게 보수하였다. |
문성왕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계부인
(貞繼夫人) 또는 정종태후(定宗太后), 정종태후(貞從太后)이다. 할아버지는 원성왕
(元聖王)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이고,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이다.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朴氏)가 있었고 뒤에 위흔
(魏昕)의 딸을 비로 삼았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해 즉위했지만 6개월도 못되어 사망했다. 그래서 왕위쟁탈
과정에서의 모순이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연이은
반란[841년 홍필(弘弼)의 모반,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 847년 양순(良順)과 흥종
(興宗)의 반란, 849년 김식(金式)과 대흔(大昕)의 반란]으로 국정은 어지러웠다. 한편
문성왕은 불교진흥에 관심을 가졌다.
857년 문성왕이 숙부 의정(誼靖,議正)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를
내리고 사망했다.
◐ 1월 13일 서악동 고분군을 찾았을 때 방문한 곳이다.
10) 헌안왕릉(憲安王陵) 사적 제179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이 모셔진 곳으로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봉분은 지름 약 15m, 높이 약 4m이며, 자연석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封土)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왕은 신무왕(神武王)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文聖王)의 뒤를 이었으며,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
헌안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의정(誼靖) 혹은 우정(祐靖)이며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이고, 어머니는 충공(忠恭)의 딸 조명부인
(照明夫人,昕明夫人) 김씨이며, 할아버지는 예영(禮英)으로 원성왕(元聖王)의 아들이다.
헌안왕은 불교세력을 통하여 지방세력의 불만을 회유•통제하고자 하였다. 즉 성주사의
낭혜화상을 통하여 웅천주(熊川州)지방의 김주원계(金周元系)를 통제하고, 가지산사의
체징을 통하여 무진주(武珍州)지역의 불만세력을 회유하였던 것이다.
궁예(弓裔)가 헌안왕의 서자로 알려졌으며,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지 오래되어
왕위를 사위인 응렴(膺廉: 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 달 29일 죽었다.
◐ 1월 13일 서악동 고분군 답사시 찾은 곳이다.
11) 헌강왕릉(憲康王陵) 사적 제187호, 경주시 남산동 산 55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약4m, 지름 약15m로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내부는 연도(羡道)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는 구조로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동서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천장으로 갈수록 둥글게 모아지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문지방,폐쇠석,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cm, 너비 128~9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屍床石)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만들어졌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에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
헌강왕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景文王)[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임금]이고, 어머니는 헌안왕(憲安王)의 큰딸 영화부인(寧花夫人)김씨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경문왕이 죽어 12~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초기에는
숙부 김위홍(金魏弘)이 섭정했고, 879년부터 직접 치세하기 시작했다.
지배층의 분란과 달리 전란과 재해가 없어 수도였던 서라벌은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지방의 하층민들과 지배층과의 괴리가
깊어졌던 시기라고 분석되고 있다.
불교와 국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불교의 힘으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국학을
통해 신진 사대부를 육성하여 지지세력을 확보하려 했다.
◐ 1월 11일 남산을 다녀와 서출지와 통일전을 지나서 정강왕릉을 들렸다가 지름길로
헌강왕릉을 다녀왔다.
12) 정강왕릉(定康王陵) 사적 제186호, 경주시 남산동 산 53
이 능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7)이 모셔진 곳이다. 북쪽으로는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인접해 있다. 봉분 높이는 약 4m, 지름은 약 15.5m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護石)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향의 깬돌(割石)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床石)이 있고, 상석 앞으로는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憲康王)의 아우로 886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성은 김씨(金氏)이며 이름은 황(晃)이다. 재위기간이
짧아 치적이 없으면서도 무덤의 외형이 선왕인 헌강왕릉과 같은 것은 태평성세의
여세에 따라 그의 형의 왕릉형식을 따른 듯 하다.
정강왕이 죽자 그의 누이동생 만(曼)이 그 다음 왕인 진성여왕(眞聖女王)에 올랐다.
13) 소회(所懷)
오랜 역사를 이끌어 온 신라가 후대로 내려오며 왕권의 강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듯 하며
귀족들의 횡포와 백성들의 불만이 차츰 확대된 듯하다.
헌강왕 시기에는 농민군들이 차츰 일어 진성여왕 때는 견훤의 세력이 일취월장하여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뒤에 신라 귀족출신이라는 궁예가 나타나 통일신라의 영토는
삼등분되어 이를 후삼국시대라 배우지 않았는가.
뒤늦은 역사 공부에서 보이는 성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친간 교배가 이뤄질 수 밖에 없고
이는 유전학적으로 좋은 혈통 보다는 나쁜 혈통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아마 진골로 바뀐
중•후기 왕들의 재임기간이 들쑥날쑥한 것도 잡종강세를 이용치 못한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 왕위를 쟁탈하기 위한 싸움, 귀족들의 반란 등 후기에는 수많은 반란들이
있고, 미약한 왕권은 차츰 국력이 약해져 감을 왕릉을 공부하면서도 인지할 수 있었다.
정신없는 개나리 꽃도 보고, 108탑림공원의 정성도 보았다.
서악동 구멍바위와 용지골의 주상절리
아래는 서악동 고분군을 태종무열왕릉의 후면에 위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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