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신라의 왕릉들

아름답지만~ 2017. 2. 3. 21:45

여기서는 다녀온 왕릉을 년대별로 정리하고 일부 다른 장에서 다루었더라도 복습하는

의미로 다루고자 하며 개괄적으로는 11일과 13일에 방문한 기록들이다.

각 왕릉에 계시된 글은 괄호 안에 넣었으며, 기타의 기록은 가급적 백과사전에서, 일부

카페나 블로그의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약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골품제도라는게 있어서 성골은 가장 높은 신분으로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성골이 왕을

하게 되어 성골끼리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야 하므로 점차 그 숫자가 줄어들어, 이후는

진골(부모 중 한쪽은 왕족이고, 한쪽은 귀족일 때) 출신이 왕위를 이어갔다.

                                       위: 남산 칠불암에서 본 산자락, 아래: 정강왕릉 오르는 길

                108 탑림공원의 다보탑(이승만대통령 추모)과 충주 중원칠층탑(박정희대통령 추모)

                       경주 황성공원 김유신장군 동상으로 오르는 길과 여기서 본 석양

                                                               양동마을 풍경 중에서

                                                           양동마을의 향나무와 은행나무

1) 진흥왕릉(眞興王陵) 사적 제177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1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 모셔진 곳으로 선도산(仙桃山) 남쪽으로 뻗어 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봉분은 지름 약 20m, 높이 약 5m 되는 원형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왕은 신라 중흥의 군주로서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여 가야를 합병하고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며, 함흥평야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정치에 있어서도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진흥왕(534~576)의 성은 김(金 ),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立宗) 갈문왕(葛文王)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는 큰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진흥왕이 7세 때인 540년 법흥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라 541년까지는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그 이후 어머니 지소태후가 551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신라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개척한 왕으로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켰으며,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령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를 건립한 왕이다.

◐1월 13일 찾았으나 왕의 업적에 비해서는 다소 초라해 보이는 왕릉이었다.

                                         아래는 뒤에서 본 우측은 진흥왕릉 그 아래 진지왕릉

2) 진지왕릉(眞智王陵) 사적 제517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이 모셔진 곳으로 지름 약 20m, 높이 약 5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은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며, 무열왕(武烈王)은 진지왕의 손자이다.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진흥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지왕(재위 576~579, 金舍輪)은 진흥왕(24대)의 둘째 아들로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

죽었기에 즉위하여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어머니는 각간 영사(英史)의

딸 사도부인 박씨(思道夫人 朴氏)이며, 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知刀夫人)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政亂荒淫)을 이유로 화백회의

(和白會議)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사회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1월 13일 진흥왕릉 등과 함께 찾았다. 치적을 남긴 왕릉이나 화백회의에서 쫓겨난

왕릉이나 규모가 같았는데 태종무열왕의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3)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사적 제182호, 경주시 배반동 산 79-2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산등성이 중턱에 있다.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내가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도록 하 라’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진짜로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30여 년이 지난 문무왕(文武王) 19년(679)에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라고 한다.

우리 민족사 최초의 여왕으로 선덕여왕의 즉위는 골품제도라는 특이한 신분제도를

유지해 오던 신라왕실에 성골 출신의 남성이 자취를 감추면서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치세에 고구려와 백제의 연이은 침공, 당태종 이세민의 노골적인 무시, 상대등

비담의 난등 각종 내우외환으로 여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장녀인데,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32년 진평왕이 아들없이 죽자 국민들이 왕녀 덕만공주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즉위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카인 김춘추가 603년에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40대 중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평왕은 덕만공주,천명공주,선화공주 세 딸이 있었으며, 천명공주는 훗날 진골 최초의

국왕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였고,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의 로맨스로

<서동요>라는 노래를 빚어낸 인물이다.

당 태종이 붉은 빛깔,자주 빛깔,흰 빛깔로 그려진 모란꽃 그림과 모란 씨앗 석되를 보내며

조롱했는데, 여왕이 시종에게 뜰에 심게 하면서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모란이 활짝 피었는데 향기가 나지 않았다. 시종이 탄복하면서 연유를

묻자 “그림에 꽃이 있지만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나지 않으니 이는 내가 혼자 지내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636년(인평 3년)5월, 영묘사의 옥문지(玉門池)에서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들어 사나흘

동안 시끄럽게 울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왕은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정병 2천 명을 주어

서쪽 교외의 여근곡(女根谷)으로 급파해 부산(富山) 밑에 있는 여근곡에 숨은 백제군

500명을 전멸, 지원군 1,200명까지 전멸시켰다. 국민들이 여왕의 혜안에 탄복하며 묻자

“개구리가 성낸 모습을 하고 있으니 군사의 모습이요,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빛은 희니 곧 서방(西方)이므로 서쪽에 있음을 짐작했다. 또 남자의 음경은

여자의 옥문에 들어가면 반드시 시드는 법이니 적을 쉽게 이길 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왕으로서 주변국의 침공 등으로 불교에 의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 1월 11일 오후 택시로 찾아 다니던 중 방문한 곳으로 사천왕사지 옆으로 소로길로 철교

밑을 통과해 다시 좌측 낭산의 산자락을 올라가 석비와 수많은 고분군을 지나고 다시

30여 m쯤 오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4)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사적 제20호, 경주시 서악동 842

이 능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을 모신 곳으로 선도산

(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끝에 위치해 있다.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金春秋)로,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고, 내정 개혁을 주도하여 김유신

(金庾信)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654년에 진골(眞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아울렀으나

삼국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무열이며, 신라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태종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았다.

능은 밑 둘레 112m, 높이 약 8.5m로 비교적 큰 편이다. 서쪽으로는 서악동 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과 머릿돌이 자리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썼다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김춘추(604~661)는 김용춘(金龍春;진지왕의 아들)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덕여왕(善德女王)•진덕여왕(眞德女王)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김춘추의 비(妃)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湌) 김서현(金舒玄)의 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이다.

선덕여왕 11년(642) 8월 신라 대야성(경남 합천)을 백제가 공격 함락하였다. 이때 성주였던

이찬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古陀炤)의 남편으로 함락시 처자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는데 이 소식에 몹시 고충이 커, 이후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다짐을 하였다는

것이다.

◐ 1월 13일 방문한 곳으로 서악동의 많은 왕릉을 본 후 방문한 곳이다.

5) 신문왕릉(神文王陵)   사적 제181호, 경주시 배반동 453-1

이 능은 신라 제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경주 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으로 밑 둘레 약 92m,지름 약 30m,높이 약 8m이다. 봉분 아래쪽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아 호석(護石)을 구성하였으며, 그 위로는 갑석(甲石)을 얹었다. 호석(護石) 주변으로는 사다리 꼴로 다듬은 44개의 받침석을 받쳐 놓았으며, 봉분의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床石)을 두었다.

신문왕은 문무왕(文武王)의 맏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으며, 국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녹읍을 폐지하여 관료전을 지급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은 김정명(金政明),김명지(金明之)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왕비는 김씨로 소판 흠돌(蘇判 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일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아들을

못 낳은 데다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년(신문왕 3)에 다시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 1월 11일 원성왕릉을 다녀오면서 이 왕릉을 방문하였다.

                                                      2부에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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