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 다녀왔어도 시내에서의 자투리 시간을 내어 돌아본 건 처음이다. 그래서 새벽의
시간을 더욱 알차 보려고 했으나 용두암 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가보지 못하고
마무리했다. 본 순서대로 정리해 보고져 한다.
1) 제주성지(濟州城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호, 소재지: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제주성은 제주시내의 중심지를 빙 둘러 축조되었다. 언제 처음 쌓아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411년(태종 11) 정월 제주성을 정비토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성은 1411년 이전에는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성곽의 둘레가 4,394척, 높이는 11척이라 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 사이에 축성된 규모를 말하며, 지금 성곽의 기초가 되고 있다.
1565년(명종 20) 목사 곽흘(郭屹)이 을묘왜변(乙卯倭變)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성곽의 규모를 확대하고, 격대와 타첩을 갖추었다.
1599년(선조 32)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성벽의 높이를 더 높이는 등 지금 성벽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어 1780년(정조 4) 목사 김영수(金永綏)가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에 피해가
많자 이를 대비하여 간성(間城)을 축조하는 등 지속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면서 제주성의 옛 자취는 대부분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있는
성벽은 조상들의 축성법(築城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설명문)
☉현무암으로 반듯하게 쌓은 성벽 둘레로는 도로가 개설되었고, 성은 가운데 도로로 제이각이
있는 곳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오현단과 오현비가 있고 그 옆에 귤림서원,
장수당 및 향현사가 있었다.
제이각(制夷閣)은 왜적을 제압하기 위한 누각이다. 1599년(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 文)이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읍성 남문 동측 치성 위에 건립하였다. 지형적으로 매우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의 높은 언덕이어서 제주읍성을 내려다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그리고
해안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유사시에 왜적을
무찌르기 위한 장대(將臺)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제이각은 남쪽으로 凸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남쪽은 적루(敵樓)이고 북쪽은 장대(將臺)의 구조로 되어 있다. 남쪽은 높고 북 쪽은 낮아
이층구조로 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누대이다. 1555년(명종 10) 6월 을묘 왜변으로
제주읍상이 포위 당하는 등 위협을 느끼자,
방어책으로 1565년(명종 20) 12월 제주목사 곽흘(郭屹)은 제주읍성의 동성(東城)을 동쪽으로 옮겨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1599년(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은 성곽을 높이고 격대(擊臺)와
포루(砲壘)를 설치하였으며 남성(南城)의 제일 높은 곳에 제이각을 세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제주목도성지도(濟州牧都城地圖)에는 청풍대 (淸風臺)로 기록되어 있어, 1850년 전후의 평화로운
시대에는 관리와 선비들이 경승을 감상하기 위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오현단(五賢壇)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현길 61(이도일동)
5현단(五賢壇)은 조선시대 제주에 이바지한 5현(五賢)을 배향한 귤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이다.
5현(五賢)은 1520년(중종 15)에 제주에 유배왔던 충암 김정(冲庵 金淨), 1534년(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1601년(선조 34)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614년(광해군 6)에 제주에 유배왔던 동계 정온(桐溪 鄭蘊),
1689년(숙종 15)에 제주에 유배왔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등 다섯 사람을 이른다.
1871년(고종 8)에 귤림서원이 헐린 뒤에 1892년(고종 29)에 김의정(金義正)을 중심으로 한
제주 유림이 귤림서원의 자리에 제 단을 조성했다. 지금은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
5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제단은 1578년 (선조 11)에 제주목 판관 조인후(趙仁後)가 가라쿳물
동쪽으로 충암묘(冲庵廟)를 지은 것이 시초 인데, 1667년(현종 8)에 충암묘를 현
오현단(五賢壇)으로 옮겨 와 사당으로 삼았다. 1659년(효종 10)에 목사 이괴(李襘)가 이곳의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바꾸어 귤림서원이라 했다. 1682년(숙 종 8)에 사액(賜額)을 받고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 등 네 사람을 모셨다가 1695년에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다섯
현인(五賢)을 배향하게 됐다.
귤림서원(橘林書院)은 1578년(선조 11)에 제주판관 조인후가 기묘사화로 1520년(중종 15) 6월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를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0년(현종 1)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장수당을 건립하였고, 1667 년(현종 8)에는
제주판관 최진남(崔鎭南)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사(祠)로
하고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현액하였다. 1682년(숙종 8)
신경윤(愼景尹)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安建之)를 제주도에 파견 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6년(숙종 22)에 이익태(李益泰)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뒤 1850년(철종 1) 제주목사 장인식이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초기의 재생(齋生)은 20명이었으나, 뒤에 15인을 늘려 35인이 되었다.
장수당(藏修堂)은 1660년(현종 1)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진사(進士) 김진용(金晉鎔)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高得宗)의 옛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 이괴 목사의 장수
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맡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충암사(김정의 사묘)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진 이후 명실상부한 서원인 귤림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귤림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875년(고종 12) 봄에는 제주목사 이희충(李熙忠)이 장수당
옛 터에 경신재(敬信齋)를 세워서 선비의 자제들이 학업을 닦을 수 있도록 하였다.
향현사(鄕賢祠)는 1843년(현종 9)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조선조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 고득종(靈谷 高得宗)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831년(순조 31) 제주목사 이예연
(李禮延)이 김진용(金晉鎔)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하였다가, 1849년(현종 15)에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이 김진용을 향현사로 옮겨 병향(竝享)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사우(書院• 祠宇) 대동철폐령에 의하여 철사된 후 제주 유생들이 고득종과 김진용의 덕행과
공적이 후세에 깊 이 묻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오현단 내에 향현사 유허비를 세우고 제향하였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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