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어 야외로 나가면 웬지모를 힐링에 젖어드는 분위기이다. 운영진은 사람을 모으는 일,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 등 모든게 운영진의 몫이 된다. 나의 경우 여기서는 편히 참석해 찬조를
하면 하루를 즐기다가 올 수 있는 모임이다. 2011년에 9‘11모임에서의 추억으로 이곳을
정했다는데, 진입로와 주변 환경이 천지개벽을 해 놨다. 다음으로는 필경사란 심훈의 체취를
살린 곳을 다녀왔다.
1) 찾아간 날: 2017년 4월30일 일요일
2) 찾아간 여정: NH농협은행 수원북문지점(08시56분;22명)-정조로-43국도-한독병원 앞
(09시01분;4명)-1국도(경수대로)-봉영로-서오산TG09시14분)-171•17•40•15고속도-
행담도휴게소(10시12분~10시40분)-15고속도-송악TG(10시43분)-38•29국도-황금산 로타리
(11시26분)[회원: 19명, 어부인: 7명, 합: 26명]
행담도 상행선 주차구역과 황금산 앞 29번국도 끝 로타리
3) 산행: 주어진 시간은 1시간20분, 그간 맣은 변화를 준 황금산 산행길, 새로 계단길 데크도
만들어졌고 안부에 오른 네 사람은 이정표(←황금산 정상 0.27km,↓주차장 0.75km,→
감시초소 0.13km,↖금굴 0.39km/코끼리바위 0.37km)에서 감시초소를 향했는데 이후로
새로운 길이 개통되어 있다. 몇 발자국 옮긴 곳의 이정표(↖코끼리바위 0.37km/금굴 0.39km,
↗헬기장 0.57km)를 지나며 대산석유화학단지를 내려다보니 전보다 많이 확장되었으나
가동율은 그렇지 못한 기분이 들어 씁쓸했다.
새로이 개발된 봉우리가 계단길도 보이는게 어서 오라는 듯 헬기장도 있고 돌탑도 있다.
(11시58분) 그 이상의 시설은 없어 되돌아 오다가 전의 종점이었던 곳에서 황금산 정상을
담고 이정표(←황금산 정상 0.39km/주차장 0.9km,↑바닷가(금굴) 0.27km)에서 ↖코끼리바위로
서둘러 내려섰다.(12시19분)
다녀온 새로 개발된 북봉과 항금산 정상
몇 컷 증명을 담고 새로히 생긴 하산길을 서둘러 내려서지만 시간은 흘러 5분 지연을
전화로 알리고 모두가 기다리는 버스에 오른다.(12시48분) 버스가 출발해 곧 식당에
다다른다. 눈에 익은 식당, 덕수네가리비는 2011년 우리가 먹었던 집, 이번에는
자연네가리비다. 가격대비 먹거리는 웬지 부족했는데 운영진이 답사와 옛 추억을
담기에는 부족해 걱정하던대로 였다. 술병은 제법 많이 비우고 일어선다.(14시11분)
새로운 등산로와 다시 주차장에 돌아오고
4) 되돌아 온길: 29•38국도(14시11분)-한진교차로(급우회전;필경사 1km)-상록수길-
당진 필경사(14시53분~15시16분)-38•34국도-삽교호관광지(15시34분~16시20분)-
38국도-송악TG(16시31분)-15•40•17•171고속도-북오산TG-1국도-인계사거리(좌회전)
-(우회전)-명성갈비(17시53분~18시05분)-각자 집으로~
5)필경사: “그 날이 오면” 심훈(沈熏)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前)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붐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 자리에 꺽구러져도 원(願)이 없겠소이다. -1930년 3월 1일-」
심훈은 항일 민족문학의 영원한 청년이다. 그의 체취를 느껴 보도록 시설을 복원하고
실물대비 인물상도 복원해 놓았다. 기념관은 심훈의 성장 이야기를 하는 심훈의 일생,
3.1운동 참여와 수감, 좌절과 극복, 희망의 빛, 언론인 심훈, 희망의 빛, 문학인 그리고
영화인, 당진농촌에서 희망을 찾다, 상록수의 시간 속으로, 그날이 오면, 상록수 정신을
잇다, 문예창작실, 심훈생애 종합영상 상영실 및 수장고가 있었다.
당진 필경사(唐津 筆耕舍)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 필경사(筆耕舍)는 심훈(沈熏; 1901~1936)선생이 1932년 서울에서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다. ‘필경’은 심훈선생의 1930년 7월 작품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을 일구듯 표현하고자하는 심훈의 의지와 함께 자신의 집을 필경사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필경산는 대지 661㎡에 건평 62㎡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이며, “一”자형 초가지붕 아래 목조기둥으로 세워져 있으며 벽체는 황토를 짓이겨 바른 예전 농촌의 전형적인 초가이다. 필경사 내부에는 심훈선생이 읽었던 책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고 등불과 옷가지, 부엌의 아궁이, 화장실까지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 심훈선생은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집필했다. (by 안내글 인용) |
(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1917년 결혼, 1919년 3.1운동에 가담 투옥, 퇴학 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 1923년 귀국해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 1924년 이해영과 이혼, 동년 동아일보사 입사,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 1931년 경성방송국으로 옮겼으나 사상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당진으로 낙향해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했으나 다시 낙향해 1935년 농촌계몽 장편소설인 「상록수」로 동아일보에 당선되어
상금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였다. 1936년 1월 단편소설 「황공의 최후」를 신동아에 발표,
동년 8월 「오오, 조선의 남이여!」를 발표했으며, 동년 9월 장티푸스로 인해 36세로
사망하였다. 2000년 8월15일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6) 삽교호 관광지: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삽교호 준공기념식에 참석후 귀경해 술 한잔의
회포를 풀려다가 김재규의 총에 운명을 달리해 더욱 유명해 졌던 곳이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는 관광지들로 다소 쇠락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참가한 회원들에게 선물할 건어물을 구입하기 위해서 들렸으며, 회원들
개별적으로 구입할 물건을 구입하기도 한 곳이다.
7) 명성갈비: 연회가 가능한 넓은 홀이 있어서 다른 모임에서도 자주 이용되는 곳,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해 저녁으로 갈비탕을 먹고 헤어진 집이다.
8) 소회: 옛 추억을 못잊어 찾았던 황금산 인근의 가리비도 추억을 곱씹는 우리네는 실망한
곳이었고, 상록수로 이름을 날린 심훈의 흔적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운명과 함께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했던 일생을 훑어볼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헤어진 버스 속에서 가방과 선물 및
웃옷은 저녁에 통화로 인계하고, 선물과 옷은 이튿날 나의 영농장에서 인계할 수 있었었다.
잘 놀다가 오고 즐거웠던 하루였다.
끝까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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