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죽주산성 나에게는 의사의 지시를 어기는 행군이었다.
7.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기념물 제69호, 고려시대,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6
죽주는 고려시대 죽산지역의 지명으로 이곳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길 교통의
요지이다. 이 성은 죽주성 또는 매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인데,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여 몽고 침략 때와 임진왜란 때 다시 쌓았다. 성벽은
내성,중성,외성의 3중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외성만이 원래의 성벽이 남아 있고 내성과
중성은 많은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중성 역시 성벽의 하부구조는 아직도 삼국시대
모습이 상당 부분 남아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성을 모방하여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쪽 성벽의 동쪽과 서쪽 끝의 치성(雉城) 부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바깥에는 도랑(마른 해자,외환)의 흔적이 있으며,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고군이 이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강요하면서
공격하였으나 송문주(宋文冑)장군이 막아냈다. 이때 성을 지킨 죽주방호 별감
(竹州防護別監) 송문주 장군은 일찍이 구주성(龜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 법을
알고 대비하였기에 이길수 있었고, 이에 백성들은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성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宋將軍廟碑銘)에는,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 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평탄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집수시설 2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죽주산성이 예로부터 물이 풍부한 성이었으며 이러한 기록이 진실임을 밝혀주는
증거가 된다. by 안내글 인용
아래는 죽산연을 지나는 도로의 송장군 동상
❐ 산성은 높은 곳이다. 실제로는 300m도 안되지만 차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1단의
저속으로 오르다가 보니 성은사 입구의 주차장 이후는 걸어야 했다. 천천히 걸어도
곧바로 허리가 아퍼서 아주 천천히 걸어서 중성남문지에 다다랐고, 다른때 같으면
우측길을 돌아서 산성을 한바퀴 돌았으련만 힘에 겨워서 중성의 서남치성 을 조금 지난
자리까지 가서 중성의 서쪽 성벽만을 둘러보니 공사차량이 있다. 조심히 내려와
중성내의 발굴 현장의 질퍽이는 땅을 쳐다보고 허리가 좋아지면 다시 오리라는
마음만을 가진채 조심스럽게 하산하여 다음 목적지인 매산리의 석불입상과 미륵당
오층석탑으로 향했다.
죽주산성 조감도(죽주산성 테마역사공원 조성사업) 공사안내[죽주산성테마역사공원 수변공원 등 조성사업 공사로 인하여 통행 및관람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모두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합시다.] 공사개요[✲공사기간: 2017.07.05~2018.04.30/ ✲공사명: 죽주산성 테마역사공원 수변공원 등 조성사업/ ✲시행처: 안성시청/ ✲감리자: 종합건축사사무소 대연건축/ ✲공사감독관: 문화관광과 문화재팀 김용연(031-678-2502)/ ✲현장대리인: 문화재수리기술자 보수 제748호 고상준(010-3311-6272)/ ✲시공기능인: 문화재수리기능자 한식 석공 제7278호 이호] |
8.매산리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7호,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미륵불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미륵불은 높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높은 보개(寶蓋) 는
고려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를 통해서 이 불상이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는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두 귀는 볼에
밀착시키며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고, 굵은 목에는 번뇌•업(業)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法衣)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아래서 내려오면서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오른 손 모양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수법과 부조화,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등은 충남
논산의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과 비슷하여 고려 초기 석불양식을 잘 보여준다.
※보개(寶蓋): 불상을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머리 위에 설치하는 것
※미륵부처: 미륵보살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에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3번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상의 도솔천이라는 곳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by 안내글 인용
9. 미륵당오층석탑(彌勒堂五層石塔) 향토유적 제20호,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
미륵당내의 매산리 석불입상 앞에 건립되어 있는 화강암 재료의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가 각출되어
기단을 떠받들고 있다.단층기단은 네 귀에 우주를 새겼으며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1석으로 조성된 갑석은 아랫면에 반전부분이 있고, 윗면에는 불룩한 낮은
각 형의 3단 괴임대를 각출했다.
옥신과 옥개는 각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현재의 1층 옥신에는 양우주의 선각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2~4층의 옥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옥개석은 4층의 것이
결실되었고, 5층은 옥신•옥개석이 동일석이다. 옥개석은 낙수홈이 있고 그 밑에
원호경사가 있으며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옥산괴임은 낮은 1단이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년대는 993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by 안내글 인용
❐네비를 이용해 찾은 곳은 좁은 골목에 위치해 있고 먼저온 차량이 버티고 있는 뒤에다가
차를 세우고 들어서니 차 안에 아들인 듯한 사람이 앉아 있고 그의 어머니인 듯한
아주머니께서는 석불을 몇 바퀴인지 돌면서 기도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높은 건물 안의
석불을 한바퀴 돌고 앞에 있는 미륵당오층석탑을 본 다음 다 음의 장소로 이동한다.
10. 안성죽산리석불입상(安城竹山里石佛立像)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7호,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산6-2
이 불상은 연꽃 모양의 대좌(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받침대) 위에 놓여있는 높이 3.36m의
석불입상으로,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현 장소에 다시 세운 것 이라고 한다. 얼굴은
온화한 인상이고,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다. 민머리 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있으며,
양 어깨부터 배 부분까지 타원형의 옷 주름이 촘촘히 새겨있다. 몸체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어 있고 육계, 타원형의 옷 주름의 표현 등으로 고려 초기 불상 양식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by 안내글
❐봉업사란 간판에 좁은 골목으로 들어 아주 좁게 주차하고 들어가니 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어댄다. 아마도 처음에는 마주 보거나 했을 듯 연꽃 모양의 대좌가 석불 바로
앞에 빈 채로 이고 옆에는 상부가 없는 2층석탑이 있다. 그 앞으로는 근래에 만든 듯한
오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차를 돌려나와 조금 이동해 가니 넓은 입구와 삼층석탑이 있다.
한 경내인데 어렵게 두 곳을 돌은 격이었다.
3부에서 다시 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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