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안성의 유적지-3

아름답지만~ 2018. 3. 1. 18:19

11. 안성죽산리삼층석탑(安城竹山里三層石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8호,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240-2

탑이 위치한 이 곳은 고려시대 큰 절인 봉업사가 있던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탑 위에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다시 세운 것으로 전해온다.

탑 기단부의 일부가 땅에 묻혀 탑의 완전한 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2005년도 발굴조사

결과 단층 기단의 구조임이 밝혀졌고 기초 지붕부위에서 발견된 태화(太和) 명 기와를

통해 9세기 전반에 탑이 건립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탑 높이는 3.2m 이다.

기단의 각 면과 탑신의 각 몸돌에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조각 되어 있으며 기단 윗돌

(갑석:甲石)에 연꽃을 엎어놓은 무늬(복련:覆蓮)가 장식되어 있다.

두꺼운 지붕돌(옥개석:屋蓋石), 4단의 옥개석받침 등의 조형 양식을 볼 때 고려시대에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by 안내글 인용

❐허탈한 기분이 들어 석탑만을 확인하고 네비를 죽산향교로 하고 달린다.

 

12. 죽산향교(竹山鄕校)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6호, 안성시 죽산면 죽산향교길 54-45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 교육기관이다. 양민(良民)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經學)이 주요 교육 내용이었다.

향교는 고을 크기에 따라 학생수를 조절하였는데 대체로 군에서는 50명, 현에서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죽산향교의 상량문(上樑文;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역 일시 등을 적어둔 글) 등에

의해 죽산향교는 태종 13년(1413)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후 임진 왜란 때

불탄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옛 향교가 있던 마을은 구교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죽산향교는 위쪽에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위치하고 아래쪽에 명륜당이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대부분의 향교에서 명륜당과 대성전이 같은 선상에

배치되었다면 죽산향교는 명륜당이 주측에서 약간 벗어나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by 안내문 인용

 

❐시골길을 돌다가 큰 공장을 끼고 돌아드니 죽산향교이다. 굳게 잠긴 문은 우리를

거부하는 듯하다. 담도 높아 입구에서 문 사이로 보고는 되돌려 영평사를 향해 중간의

삼죽면 유적지를 통과한다.

13. 2001년 1월 19일 첫삽을 뜨기 시작해 공양간 요사채 완공에 이어 대웅보전 상량식을

거쳐 2012년 고 박정희대통령 추모관과 내원궁을 건립하여 명실상부한 안 성시내

최고의 가람을 설치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의 애국 애족의 정신과 육영수 여사의 봉사정신을 기려 박정희 추모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신라 선종9산문(禪宗九山門)의 하나인 수미산문은 고려 태조 15년(932)에 이엄 (李嚴)이

해주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에서 문을 연 산문입니다. 수미산문의 정신을 계승한

영평사는 현재 문화관광부에 공식등록된 수미산문 조동정종의 총림으로서 선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비롯, 불교의 여러 가지 전통 수행법을 두루 계승하여 수행자 각자의

끈기에 맞게 수행 정진하고 있다. by 영평사 싸이트 中

영평사 석비(石碑)의 글[“침묵을 깨고 나투신 미륵와불 석가모니 부처님의 뒤를 이어

56억7천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다는 미륵부처님! 2004년 불사도중 정림스님의

기도 중에 영험을 얻어 오랜 세월 땅속에 계시던 미륵와불이 침묵을 깨고 영평사 기도도량에

나투시게 되었다. 현재의 여신상 미륵와불은 길이 약 12m 몸둘레 약 9m의 발견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불자 여러분! 중생이 쌓은 죄업이 1천 2백겁동안 생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했으니

도솔천과 맞닿는 이곳 영평사 와불과 인연되어 한량없는 복을 누리십 시오.

                                             by 석비의 글 옮김, 주소: 안성시 보개면 신장리 74-2 外

 

 

                                                                        위는 봉안실이다.

❐영평사를 뒤지니 세월이 흘러 한동안 일제징집으로 운명을 달리한 유골 송환에

정진하시던 삼중스님이 건강이 좋지않은 채 이곳에 계신 블로그 글을 보았다.

또 개인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인 박정희 대통령추모관이 3층에 꽤 넓은 면적을

홍보 겸해서 모시고 있다. 생각을 달리하는 세대와 함께 반론의 여지는 있으나 우리

세대는 다소 억압적이었어도 함께 고생하고 성공한 새마을 사업의 성공으로 이만큼

부(富)를 누리며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생가지와 국립묘지

그리고 이번의 영평사추모관을 찾아 예를 올린 것이다.

 

 

14. 봉업사지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입니다. 봉업사(奉業寺)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갔다가 1363 년(공민왕 12)

청주를 거쳐 올라올 때 이 절에 들러 태조의 어진(초상화)에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봉업사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 사원(眞殿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봉업사지는 오랫동안 죽산리사지로 알려져 오다가 1966년 경지정리

작업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로 밝혀졌습니다. 이후 경기도박물관의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화차사(華次寺)’가 고려시대의 봉업사로

변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청주호족 능달이 관여하였고 고려 광종 때인 963년과 967년에

중창되어 크게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530년 문헌에 의하면 이때에 이미

봉업사는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업사가 사라진 터에 그때의 영광을 그려볼 수 있는

보물 제435호 봉 업사지 오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 봉업사지 삼층석탑, 제89호

봉업사지 당간지주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봉업사지 인근에는 칠장사,

관음당의 장명사지, 미륵당의 매산리사지 등이 남아있어 죽산지역의 불교문화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y 안내문 인용(영남길이야기의 경기도 영남길)

 

15.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安城 竹山里 幢竿支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728

당간지주는 당간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하며 절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당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위신을 나타내는 깃발이고, 간은 당을 거는 장대로 주로

대나무나 철제로 만든다. 예전에는 목재로 당간지주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나

남아있는 목재 당간지주는 많지 않다.

죽산리 당간지주는 현재의 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바로 세워 복원한 것이다.

높이 4.7m, 폭 0.76m, 두께 0.5m로 약 1m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쌍이 서 있는데 돌기둥의

표면이 거칠고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형태이다. 윗부분은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직사각형의 홈이 만들어져 있다. 남쪽의 기둥은 윗부분이

4분의 1정도 깨져 나간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보아 당간지주를 세운 시기는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같은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by 안내글 인용

❐집(수원)에서 곧바로 오는 길은 영동•중부고속도를 거쳐 일죽TG를 경유해 38번 국도에서 가까이

 

16. 안성봉업사지 오층석탑(安城奉業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435호,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봉업사터에 있는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 전기 석탑이다. 이곳

봉업사는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신 국가에서 관할하는 사찰이었는데 조선 초기에

폐사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화차사(華次寺)란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봉업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탑은 그 높이가 6m로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 기단을 두고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이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

(우주:隅柱)이 잘 남아있다. 1층 탑 몸돌의 남쪽 면에는 작은 감실(龕室)을 만들었는데,

그 감실을 막기 위한 문을 달은 듯한 흔적이 보인다. 지붕돌은 얇으면서 각 층마다

5단의 지붕 받침이 표현되어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여 편평한 느낌을 준다.

현재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기단부가 둔중한 점, 1층 탑신이 다른 층에 비하여

유난히 높은 점 등에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by 안내글 인용

 

❐집(수원)에서 곧바로 오는 길은 영동•중부고속도를 거쳐 일죽TG를 통과해 38번 국도

 안성방향으로 오다가 17번 국도와 교차한 얼마후 멀리 송문주 장군상이 보이며 우측으로

들면 가까이에 있다.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한군데서 다 볼 수 있다. 두 유적은 꽤 넓은

공간을 아래 위로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4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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