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수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의 묘와 석남사를
거쳐서 점심을 먹고 다른 곳 들릴 여유가 없었다. 여유만 있으면 가는 길목에 있는 몇 곳을
더 다녀갔을 터인데도 고속도로를 이용해 집을 향했다.
21.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의 묘(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之墓)
향토유적 제30호,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 산32-1
이 묘는 조선 제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모친이자 영의정을
지낸 안효공 심온(安孝公 沈溫; 1375~1418)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의 묘소이다.
삼한국대부인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인 안효공에게 출가하여 장녀 소헌왕후를 비롯 하여
6명의 딸과 영중추공(領中樞公),공숙공(恭肅公),정이공(靖夷公) 3형제 등 9남매를 출생
양육하였으며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훈육에 헌신하였다. 부인이 세종 26년(1444)에
별세하자 사위인 세종대왕은 수원시 이의동 안효공 묘역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모셨는데,
이 후 세조 13년 왕명으로 이곳에 옮겼다.
약 200㎡의 묘역에는 높이 3.4m 지름 6.5m 둘레 27m의 호석(둘레돌)을 두른 봉분이
설치되어 있다. 묘 앞 중앙에는 글씨가 마모된 원래의 대리석 묘비와 1910년 새로 건립한
묘비가 있으며, 그 앞에 상석,향로석,장명등을 설치하였다. 특히 상석 주위에는 경사지게
장대석으로 사다리형 계단을 조성하였으며, 좌우에는 중대한 문인석을 세워 품위있는
제단(祭壇)을 만들었다. 장명등은 네모난 기단부(基壇部) 위에 네모난 화창(火窓)을 가진
화사석(火舍石)을 만들었고, 그 상단에는 낙수면(落 水面)이 급경사를 이룬
옥개(玉蓋)를 얹었다. by 안내글 인용
❐네비를 따르다가보니 한참을 지났다가 지날 때 본 사당 같은 곳에 차를 대니 제대로
찾았다. 이곳에 삼한국대부인순흥안씨묘를 옮긴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세조의
외할머니를 궂이 외할아버지와 분리시킨 이유는 무었일까?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흔적은
없었다. 아마도 관작이 회복되지 못한 안효공 심온과 함께한 것이 눈에 거슬렸었는가?
금강호수 옆 능선이 꼭 명당자리 같지도 않았으나, 오르는 길도 등산 수준은 되는 듯
했다. 묘역 아래에는 심온의 7세손(by 자치안성신문)이라는 심서의 합장묘가 있다.
그래서 세종의 장모님은 덜 외로웠을까
22. 석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자락에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 고승 석선(奭善)이 세웠고 고려 초기에
혜거국사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에 타 나중에 화덕(華德)이 중 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석남사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두 불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누각, 탑2, 부도,
마애불 등이 있다. 이들 유적과 유물은 거의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으나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사역 근방에 남아 있고, 조선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석탑 등으로 미루어 법등은 꾸준히 계승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남사 종합안내(石南寺 綜合案內) ①대웅전(大雄殿),②영산전(靈山殿),③석탑(石塔),④중심당(中心堂),⑤금광루(金光樓), ⑥동요사(東寮舍),⑦도중당(道中堂),⑧해우소(解憂所),⑨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⑩부도(浮屠) |
by 안내글 인용
❀석남사영산전(石南寺靈山殿) 보물 제823호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불전의 명칭인데, 이 곳은
16나한을 함께 봉안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팔작집인데
칸수에 비해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지붕기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내부를 보면, 불단은 건물 뒷벽에 붙여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삼존을 모셨고, 그 위에 부처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닫집을 매달아
장엄하게 꾸몄다. 중앙의 불단 좌우에는 ㄱ자형 으로 불단을 구성하여 16 나한상을 모셨다.
이 영산전은 1562년 처음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민흘림기둥: 기둥 뿌리가 굵고 위로 올라가면서 굵기가 줄어드는 기둥 ※ 닫집: 궁전 안의 옥좌 위, 또는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 |
by 안내글 인용
❀석남사 석탑(石南寺 石塔) 향토유적 제19호
대웅전 앞 영산전 좌측에 세워져 있는데 이 석탑은 절 아래쪽에 있던 것을 1970 년대에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쌍탑(雙塔) 중 우측의 탑은 1매의 판석으로 지대(地臺)를 마련하였는데, 1단의 괴임이
돌출되어 있고 기단부를 받들고 있다. 상면의 갑석은 탑신부 괴임대가 없는 평평한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1층 옥신석에는 장방형의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좌 측의 탑은 하층기단 갑석에
3단의 괴임이 있고 1층 옥신에는 양우주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이 쌍탑은 옥신, 옥개석의 조성 수법과 그 형식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우측탑이 232cm, 좌측탑은 225cm이다. by 안내글 인용
❐늘 지나치기만 했던 석남사를 찾아드니 등산을 했던 일행이 복장을 고쳐 입고 떠나고
좁고 경사진 터를 차지한 석남사 주차장 입구의 누각(금광루)을 지나 계단을 오르며 좌우에
석탑이 있고 우측 석탑 뒤로 아담스러운 영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르면 제일 높은 곳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법당을 들어가 예를 갖추려 했는데
대웅전 가운데 문이 열려있고 불전함이 그곳에 놓여 있다고 한다. 여지껏 다녀본 사찰에서
이런 대접은 불쾌하기 그지 없어 좀 아 래서 발길을 돌렸다. 대웅전 까지 61개의 계단길인데~
❀석남사마애여래입상(石南寺磨崖如來立像)
암벽에 양각된 높이 5.3m의 마애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민머리(소발:素髮)로 그 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가 있고 넓적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두텁게
표현되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번뇌•업 (業)•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법의:法衣)은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通絹)으로 배
부분까지 U자형으로 내려오며, 가슴에는 내의인 군의(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신체의
주변에도 두광(頭光)으로부터 이어지는 세겹의 신광(身光)이 표현되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은 검지만을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설법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단에는 5개의 발가락이 뚜렷한데 연꽃 문양의 대좌 위에 올려져 있다. 머리와 몸은
비대한데 비하여 다리 부분이 짧다.
이 마애불은 다소 형식적이며 지방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통일신라 마애불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마애불로 여겨진다. by 안내글 인용
❐주차장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찍었다는 홍보물 도깨비촬영지를 뒤로하고,
마애여래입상까지 오르려고 스틱을 꺼내 짚으면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10여 분도 안되어
마애여래입상을 뵈었는데 느낌은 20여 분 이상인듯 컨디션 조절에 힘을 쏫았다. 잠시
머물렀다가 내려오는 길에서는 이정표도 보이고, 단풍나무길 안내판도 보이고, 야생화 꽃길
안내판도 보였다. 그런 여유는 서운산의 등산지도와 등산길 안내도 보였으나 눈이 내리는데
점점 거세져 속히 시내를 향해 달려 나간다.
서운산 등산지도 등[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한 서운산은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하여 서운산이라 전해진다. 능선은 부드럽고 산세는 경사가 완만하며, 산자락엔 사찰과 옛 성터가 있어, 보고 생각하며 오르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장 홍계남과 이덕남장군이 축성한 길이 700m의 토성이 남아있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등산코스: ---석남사~정상(2.3km, 약 60분 소요), ---배티고개~정상(2.4km, 약 50분 소요) ---청룡사~정상(2.9km, 약 80분 소요), ---포도박물관~정상(3.8km, 약 90분 소요) |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올려다 보니 마애여래입상의 흔적이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