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성지를 찾아서-은이성지

아름답지만~ 2021. 11. 9. 16:01

은이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되면서 형성된 교우촌으로서,

은이(隱里)란 글자 그대로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 성지는 1836113, 프랑스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신부가

그 해 4월경 이곳을 방문하여 당시 15세인 소년 김대건(金大建; 1821~1846)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성지 내 김대건 기념관 앞 옛

은이공소지(隱里公所址)로 전해지는 곳에 소년 김대건이 세례받는 형상의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안드레아)711일 서울 모방신부 댁에 도착하여 이미 선발된 동료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등과 함께 라틴어를 배우다가, 123일 중국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8년 뒤인 184412월 초에

최양업과 함께 만주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았으며, 이듬해인 1845817일에는 상해(上海)

인근의 김가항(金家港)성당에서 제3대 조선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는 18451012, 교구장 고()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강경 황산을 통해 귀국하여, 11월 경부터 1846년 부활대축일까지 약 6개월 동안, 은이공소에서

기거하면서 서울과 용인 일대 교우들을 사목하였다. 그러므로 은이 성지는 사실상 김대건 신부의 본당

역할을 한 곳이며, 그의 땀과 신앙이 배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성소(聖召)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풍성하게 열렸던 곳이 은이(隱里)이다. 즉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성장(산너머 골배마실),

세례성사, 신학생 선발, 사제서품 후 사목활동의 직접적인 장소로서 한국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미리내 성지까지 가는 길에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이 고개는 김대건 신부 생전에는 그가

걸어서 넘나들던 사목활동 행로였고, 순교 후에는 그의 유해가 옮겨진 경로가 되었다. 예부터 교우들은

이 고개를 신덕고개(은이 고개), 망덕고개(해실이 고개), 애덕고개(오두재 고개)라고 부르며, 지금껏 도보

순례를 하면서 그의 고귀한 순교 신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1925725일에 로마에서

사복되었고, 198455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었다.

201691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70주년에 즈음하여 새 성전을 봉축하며

은이성지위원회, 은이 김대건 신부 현양위원회

은이성지(隱里聖地) 김가항성당(金家港聖堂)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 서품을 받은 상해의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이다. 은이성지 일대는 189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소년 김대건의 일가도 골배마실에 터를 잡고 살면서 신앙활동을 하였다. 김대건은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신학과정 후 부제품(副祭品; 신품 선사의 첫째 단계 품으로 주교와 사제를 도와 말씀과 제단, 자선 사업 따위에 봉사하는 직품)을 받았다. 이후 1845년 8월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로서 이곳 은이공소에 도착한 1845년 11월부터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해           다시 떠난 1846년 5월까지 은이를 중심으로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김가항 성당은 17세기 중반 중국 상해의 김가항에          민가 건축을 개조해 만든 성당이다. 1841년에는 남경교구의 중심이었으나 2001년 상해 정부의 도시 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수원교구는     철거 직전 성당에 대한 실측을 실시하고 기둥과 대들보 등 일부 부재를 가져와 2016년 이곳에 복원하였다.

 

여기서 걸어서 골배마실성지를 갔으면 되돌아서는 건 은이성지 찰글 찾으러 콜택시 탈뻔~

이곳까지 올랐다가 시간도, 거리도 않되어 되돌아 차를 몰고 골배마실성지를 찾았다.

골배마실은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어린시절을 보내며 신앙을 키워온 곳이다. 1827년경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과 가족들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용인으로 피신하여 교인이 숨어 살던 신앙촌인 골배마실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예로부터 첩첩산중에 뱀이 많은 지역이라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 부르던 동네의 골짝에 위치하고 있어 ‘골배마실’이라 불려왔다. 소년 김대건은 최초의 서양이 선교사 모방 베드로            신부로부터 산넘어 은이공소에서 1836년 봄, 15세의 나이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또한 이 곳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이 관헌에게 체포된 곳이며, 사제가 되어 오신 김대건 신부가 어머니와     첫 상봉한 장소요, 미리내로 향하던 김신부의 유해가 어머니 고 우르슬라에게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린 곳이기도 하다.
용인(龍仁) 고초(枯草)골 공소(公所) 국가등록문화재 제708호 공소란 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신자들의 모임 장소이다.             고초골 공소는 수원 교구 내 한옥 공소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고초골은 1820년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촌이다. 그런데 고종 3년 (1866) 병인박해로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은 붙잡혀 순교하였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고종 23년 (1886)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기도 및 집회    장소로 사용할 공소를 마련하였다. 현재 공소 건물은 189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 문촌리의 안기선 전 천안군수 댁에서 누에를 치는 데    쓰던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고 한다. 신자 수가 증가한 1910년대에 현재와 같은 규모로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소 건물은 현재도 미사 장소로   이용하고 있고, 주변에는 피정 장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는 근대 천주교가 정착하면서 한옥 건물의 기능과 형태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